공복보다 더 무서운 것 (17)
이후, 남편과는 '이 화제에 대해 더 이상 싫어하는 티를 내거나, 회피하거나, 쉽게 이야기를 접으려 하지 않는다'를 전제로 원가족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카운슬링을 받아볼 것도 생각해 봤지만 이 지역에선 그런 프로그램이 없어 아쉬운 대로 유튜브 강의와 책을 보며 가족관계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다.
그간 내가 목이 터져라 말할 때에는 에이하고 넘어가던 남편은, 기능부전가족과 독이 되는 부모(毒親), 자기애성 성격장애, 트라우마를 가지고 어른이 된 어덜트 칠드런의 개념에 대해 알게 되고, 자신과 원가족에게 대입시켜 보면서 보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부모 형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일을 떠올려 보면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많았는지, 한동안 '내가 생각해 온 것들이 가족들 입맛에 맞게 커스터마이징 된 가짜일 수도 있는 걸까' 라며 울적해하기도 해 전문가 진단 없는 판단은 위험한 것이니 참고 정도로만 하자고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지금은 괜찮다.
실질적으로 해결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는 이 징그러운 9월이 어서 끝나길 그 누구보다 고대해 왔지만, 유야무야 넘어가면 언젠가 우리의 날이 무뎌졌을 때 또다시 같은 일들이 반복될 것이란 예감에 10월이 되고 나서도 악착같이 지긋지긋한 이야기들을 화제에 올렸다. 남편은 더 이상 한숨 섞인 'もういいよ(이제 됐어)'를 내뱉으며 피하려 하지 않았고, 어느 한쪽이 팩 하고 토라지거나 불편한 감정 때문에 이야기를 그만두는 일도 없었다.
실질적으로 해결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어느 날, 침대에 누워 불을 끄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를 파고드는 내 말에 하나하나 대답을 해가던 남편이 코를 훌쩍였다.
"내 안에는 이상적인 가정이 있고, 그걸 흉내 내고 싶었던 것 같아. 그런데 우리 집 사람들은 아무도 보통 가정을 경험해 본 적이 없잖아? 그래서 모여도 대화다운 대화도 할 줄 모르고, 알맹이 없는 아무 말이나 던지면서 상처 주고. 그런데 난 이상하단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형태를 갖춘 것에만 만족했던 것 같아. 내용물은 엉망진창인데."
남편은 눈을 비벼 눈물을 훔치고 이어 말했다.
"원래 '저런 형편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나이를 먹고 나서는 그 사람들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 갑자기 왜 그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을까."
"글쎄. 약간 허세를 부려보고 싶었던 것 아닐까? 어쨌거나 나는 이렇게 잘 자라서 자기 가정도 꾸렸고, 내 부모를 되돌아볼 정도의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다고. 어쩌면 스스로 '좋은 가족'으로 바꿔보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지. 그 사람들 스스로가 변하려는 생각이나 문제의식조차 없어서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
"그런가. 혹시 동생도 가족을 바꿔보고 싶었던 걸까."
"아니, 너와 네 동생은 달라. 그 애는 자기 자신의 이득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이니까. 같은 자식이고 성장과정에서 결핍이 있었다고 해도 분명 다른 타입이야. 너보다 네 부모를 닮은."
"맞네. 내가 괜한 생각을 했다. 나랑 걔는 다르지."
창밖으로 자동차 엔진음과 함께 불빛이 지나갔다. 이 건물에 살고 있는 주민 누군가가 집에 돌아온 듯했다. 남편은 나쁜 기억만 많이 만들어줘서 미안하다고 했고 이젠 괜찮다, 이제 다 알았다고 했다. 무엇을 알았고 무엇이 괜찮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흐느끼는 등을 그저 토닥토닥 두드렸다.
10월이 되고 내 생일이 왔다. 남편은 어머니가 보낸 라인에 답장을 하지 않았지만, 내 생일은 좋은 핑곗거리가 되기 때문에 시모가 남편도 없는 시간에 불쑥 찾아오진 않을까 했는데 급작스러운 방문은커녕 안부 문자 한 통 없었다. 솔직히 맥이 풀렸다.
연락하기 껄끄러웠나?
아니, 작년에도 아무것도 없었으니 통상운전이다.
생일이 지나고 3일 후, 남편에게서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왜? 동생 결혼식 안 간다고 역정내셔?"
"아니"
'괜찮을 거라 생각해 개입하지 않았는데 잘 지내고 있냐. 네 엄마가 너희들 일로 걱정돼서 마음이 말이 아니다'로 시작된 시아버지의 전화. 언제적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어머니가 우리 집 앞까지 찾아왔다가 밖에 남편 차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심장이 쿵쾅거려 도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거실 티브이에서 또 유튜브가 안 봐지니 '효도하는 셈 치고 고치러 오라'는 이야기로 전화가 끝났다고 한다.
시부모의 '걱정'과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의 근거'는 대체 무엇일까.
저들에게 나는 아직 '아들에게 맞은 사람'이다. 피해자에게 괜찮니, 어떻게 지내니, 그런 흔하디 흔한 안부 하나 직접 묻지 않으면서 뭐가 걱정이고 뭐가 괜찮을 거라 생각하는 것인가. 시모는 뭐 때문에 집에 찾아온 것이며, 왜 차를 보고 심장이 쿵쾅거려 돌아간 걸까. 시어머니가 걱정하는 건 대체 뭐지? 아들이 이혼당하는 것? 이혼당한 아들이 집으로 돌아와 세탁과 청소거리가 늘어나는 것? 시아버지는 대체 뭐를 '괜찮을 거라 생각'한 것일까. 아들 부부의 사이? 아들의 이혼?
괜찮지 않은 것은, 내 티브이의 유튜브?
집안의 어른임에도 사건 당사자인 내게 말 한마디 직접 건내지 못하는 것. 그것은 나에 대한 무관심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나를, 정확히는 자신들이 예측 불가능한 내 말이나 행동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기 스스로만을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내뱉을 나의 아픔이 자신들을 공격할 무기가 되는 것이 두려워 애써 바라보려 하지 않는 것 아닐까.
환갑이 훌쩍 넘었어도 그들 역시 어른 아이인 것이다.
그런 그들과는 대화를 해도 의미가 없다. 대화는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함이지만, 그들의 세상은 자신을 중심으로 굴러갈 때에야 말로 가장 완벽하기 때문에 현 상황을 딱히 개선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나만 공공의 적이 될 뿐이고, 그들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효도하는 셈 치고'는 시아버지의 고정 레퍼토리이기도 했다. 이제까지 몇 번을 이런 식으로 티브이를 고치러 갔을까. 고장 내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남편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겠지만 수화기는 표정까지는 전달해 주지 않는다. 지금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다 되었다고 해도 한때는 집안의 폭군이었던 아버지. 그래서 더더욱 '싫다'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언제 갈 거야?"
"그냥 생각해 보고 내키면 하겠다 하고 끊었어."
"웬일로?"
"못 믿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두운 방에서 눈물을 흘린 그날, 남편은 알 수 없는 후련함을 느꼈다 말했다. 왜 그렇게 얽매여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귓가에 속삭여지던 원가족들의 족쇄로부터 해방된 듯한 기분이라 했다.
"이제까지는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질기게 남아있던 그 이상한 감정이 말이야."
그렇다고 그들이 미워지거나 완전 남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그들, 우리는 우리, 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딱 그때부터 '진심'으로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날의 눈물은 어린 시절부터 줄곧 억눌러 왔던 해묵은 감정들이 바깥으로 분출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삶의 푸념을 하며 우는 소리만 하는 어머니의 힘이 될 수 없다는 슬픔.
아버지가 언제 또 소란을 피울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런 부모들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는 좌절.
한편으로는 나로 하여금 그들을 변화시키고 사랑받고 싶다는 갈구.
그 상황에서도 오빠로서 동생을 지켜야 했던 어린아이의 무거운 책임감.
마음 가장 깊은 바닥에 끈적하게 눌어붙어있던 어린 시절의 감정들, 그들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한 질척한 옛 기억들이 눈물로 녹아내리고 나서야, 비로소 일그러진 가족사가 남긴 상처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리라. 사람은 자신의 상처를 똑바로 바라보고 스스로 보듬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강해진다. 남편은 그날 누구의 오빠나 아들이 아니라, 비로소 '나'가 된 것이 아닐까.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워 과거의 트러블에 대해 다시 의견을 물어보았다. 이제까지 다시 끄집어내어 본 적도 없던 아주 초창기의 기억들. 평소의 그라면 절대 하지 않을 대답을 했다. 그럼 이건? 저건? 대답은 100% 였다가 80% 였다가 하는 굴곡은 있었지만 우리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음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아, 이제야 겨우 시작점에 설 수 있게 되었어.
나는 남편의 손을 꽉 쥐었다. 남편도 내 손을 꽉 잡았다. 지금이라면 정말로 그 자기만 아는 사람들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보인다. 그들의 실패한 가정을 대물림하지 않고,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며, 그들이 우리를 향해 내뿜는 부의 감정이나 과거의 슬픔을 떨치고 우리는 우리 둘의 가정을 일구어 나가자.
우리의 룰로.
앞으로 '우리'는 보폭을 함께 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던 이들과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걸어 나갈 것이다. 티브이 고치는 것 따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별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말로도 고마워하지 않는 일을 사랑받지 못하면서 빚 갚듯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남편의 원가족들로 인해 마찰을 빚고,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밤을 몇 번이나 지새우면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위기를 직면하고, 고뇌하고, 눈물을 헤엄쳐 여기까지 왔다. 무촌인 부부라도 노력이 있어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을, 한치 건너 노력하지 않는 이들이 냉대를 받는다고 입을 쭈욱 내밀어도 그것이야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피를 나눈 가족, 법률로 묶인 가족이라고 해도,
나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누가 귀한 사랑을 내어주고 싶겠는가.
다음 날 밤, 시아버지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지만 남편은 전화 온 걸 모르고 받지 못했지만 평소처럼 다시 거는 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빠도 참. 늦은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를 왜 받아? 나 같으면 안 받아. 이사도 멀리 가버릴거야. 출근이 뭐가 중요해? 내가 미치겠는데? 하여튼 우리 부모 진짜 이상해."
효도하려고 식을 연다던 시누라면 어떻게 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후기>
10월도 후반부를 향해가고 있습니다. 그 사이 저는 한 살 더 먹어 나이 앞자리 수가 바뀌었어요. (덜덜) 목표는 생일 전에는 이 어둡고 무거운 글들을 정리해내고 싶었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았네요. 인생은 역시 불확실의 연속입니다. 기르는 사람이 행복하지 않으면 다육이들에게도 전해지는지 몇몇 개체는 시들기도 하고, 한동안 사경을 헤매는 듯하다가 다시 잎을 통통하게 키워나가는 애들도 있습니다. 최근의 저는 그 친구들과 비슷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에... 술을 너무 마셔서 통통..... 콜록콜록
이 글을 이렇게 길게 쓰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글을 쓰면서 저도 깨달은 것이 많았습니다. 글을 쓰면서 이 가족의 '어둠'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었고, 남편이 가진 상처도 재조명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 역시 배운 것이 많은 모양입니다.
고구마만 잔뜩 차려놓고 한 달 동안 가슴 답답함만 선사해 드리고 말았지만, 독자님들의 응원이 있어 포기하지 않고 생각을 계속할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무사히 '시작점'에 안착할 수 있었고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공복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일단 여기서 종결짓도록 하겠습니다. 괴로움의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된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시들은 저희를 괴롭게 할 것이지만, 혼자가 아닌 같이 싸워나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 생겼기에 이제 상처보다 미래를 바라보고 싶어요. 스트레스 때문인지 한 달 내내 떨어질 생각을 안 하던 여드름과도 작별을 고하고 싶고요. 다시 밝고 건강한 마음으로 이 가을을 즐기고, 즐거운 글쓰기, 재미있는 글 읽기를 계속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다양한 관계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이 있으시다면, 모두에게 하루빨리 좋은 날들이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남기며, 앞으로도 자주 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