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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Oct 16. 2024

또 다른 종류의 가스라이팅

공복보다 더 무서운 것 (14)

시가 사람들이 나르시시스트 성향을 가진 것. 그래서 시시때때로 부조리와 인간불신, 나와 남편, 내 부모까지 모욕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도 부부 사이만 좋다면 다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저들은 어디까지나 주변인이니까 우리만 정신 바짝 차리고 있으면 된다고 믿었다.


오만했다.


가스라이팅이 정말 무서운 것은 내면 아주 깊은 곳에서 그 사람의 사고에 관여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시가 사람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험하고 강구하는 사이에도, 남편의 원가족들이 심어놓은 가스라이팅의 씨앗은 계속해서 남편을 조종했고, 그 때문에 우리 관계는 더욱 아슬아슬한 곳까지 치달았다.


내가 싸워야 할 것은 그들이 남편에게 행사하고 있는 영향력이고, 그것은 나 혼자가 아닌 남편도 같이 싸워야 한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겪고 나서야 알았다.


남편과 함께 싸우기 위해서는 내가 손수 서랍에서 갑옷을 꺼내 입히고 문간에 세워두었던 방패를 손에 꼭 쥐어줘야 한다는 것도.




내가 어릴 때에는 왕래를 하고 지냈던 큰 외삼촌은, 어느 순간 외할아버지와 관계가 틀어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고 5년쯤 지나자, 갑자기 큰삼촌이 외갓집에 가 외할머니 손을 붙잡고 울면서 어머니, 죄송합니다, 했다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한시름 놓은 것 같은 엄마와 달리, 의심 많은 나는 갑작스러운 해빙모드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삼촌네 둘째 언니가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곱게 단장한 예비부부는 고모네인 우리 집에까지 인사를 하러 왔는데 어른들 때문에 애들이 고생한다는 생각에 내가 다 민망했지만 엄마 아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들을 맞이했다.


이 사건은 20대 중반이었던 내게 충격적인 일이었다. 외할아버지와 그 장남이 왜 어긋나게 되었는지, 어른들은 내게 알려주지 않았지만, 십몇 년 동안이나 가족을 모른 척하고 살던 큰삼촌은 상당히 부도덕적인 사람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돌아온 큰삼촌 가족과 이를 받아 준 가족들을 보고 혈연이란 이런 것이라 생각했다.


끊으래야 끊을 수 없는 것.


그런데 지금 나는 큰삼촌처럼 모질지도 못하고 큰삼촌보다 몇십 배는 더 자신의 가족을 끔찍이 대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사람에게, 그의 원가족과 연을 끊을 '각오'를 하길 기대하고, 설사 그럴 생각이 없다 하더라도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마음에 품어보라 하고 있다.


만약 반대상황이라면 나는 어떤 기분일까. 나냐, 원가족이냐 양자택일의 패를 내미는 배우자가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나라면 이혼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원가족과의 연을 끊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아, 아니야. 나의 원가족은 남편을 괴롭힌 적이 없고 나도 남편을 방치한 적이 없다. 없었던 일을 '만약'이라는 상상까지 해가며 마음을 헤아려보는 건 역지사지가 아니다. 자기 검열에 불과할 뿐.


자기 검열.


그렇다. 나는 이 순간에도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다.

나도 남편의 원가족들과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다.


남편을 자기 구미에 맞게 이용하던 사람들이라 해도 남편에게는 부모 형제다. 그런 원가족과 거리 두기를 원하는 것, '우리'의 행복을 논하며 '남편을 구성하고 있는 무언가'를 포기하게끔 압박하는 것 역시 남편에게는 또 다른 종류의 가스라이팅일지도 모른다.


너 그거 이상한 거야, 너네 가족이 줄곧 널 세뇌해 온 거라고, 그래서 네가 그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거역할 수 없고 숨 쉬듯 비하당하고 뜯어 먹히면서도 이상하다 느끼지 못하는 것, 그거 다 결과물이고, 그로 인해 나까지 괴롭고 비참한 기분을 느끼고 있다고, 너는 당연히 나를 지켜줬어야지, 분하지도 않아? 화도 안 나? 


뜨겁게 쏟아내는 나의 목소리가.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한다고. 절연."


그의 대답은 굉장히 예상 밖의 것이었다. 내가 진짜 절연까지는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고 하는 대답일까? 아니면 정말 그 정도의 각오를 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나의 가스라이팅'의 결과일까.


무슨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묻는 내게, 남편은 자신은 나와 헤어지는 건 생각도 해본 적 없으며, 매번 그 사람들 때문에 괴로워야 하느니 차라리 연을 끊는 편이 행복한 삶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정말 그럴 수 있겠어? 입바른 말 한마디 못하면서?"


'설마'같은 얄팍한 마음이나 '그러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다'며 수동적으로 내린 결론이라면 결국 우리는 시가 식구들의 연락을 받을 때마다 또 싸우게 될 것이다. 이제까지처럼.


"정말 그럴 마음이 있다면 네 동생에게 연락해 어제 일을 따끔하게 훈계하고 그 자기만족성 잔치놀이에도 안 간다고 해. 거실에 있을 테니 다 하고 나면 말해줘."


부모보다야 동생에게 말하는 것이 쉬울 것이다. 동생도 '어어, 이거 생각대로 안되네'하며 조금은 처신을 바로 하지 않을까. 남편이 (나중에야) 두려워할 절연 같은 무시무시한 말을 쓰지 않고서도 상황을 조금 더 나아지게 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고 그에게 말했다.


어쩌면 역시 가스라이팅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해, 저렇게 해 하는 건, 그들과 나도 똑같지 않나. 


그래도 우리가 부부로서 계속 살아가려면, 남편이 남편답게 살아가게 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


남편 내면에서 끊임없이 그들을 위해 움직이게 하는 영향력 위에 새로운 영향력을 덧씌우는 수밖에.




큰삼촌을 떠올려 보면, 어쩌면 연을 끊는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가족 모임에 나타나지 않고, 연락을 무시하고, 집 앞에 누가 찾아와도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된다. 당장은 곤란하겠지만 다들 생업이 있으니 몇 번인가 거절을 경험하고 나면 더 이상은 쫓아와 귀찮게 굴지도 않는다.


가장 어려운 것은 유교적 윤리의식을 뿌리치는 일 아닐까. 부모자식 간에는 이래야 한다, 형제지간에는 이래야 한다, 이런 것들. 그 견고한 강제를 무시하면 마치 금수라도 된 듯한 수치심을 견딜 수 있느냐 없느냐가 더 어려운 문제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유교의 가치를 정의로 삼는다. 그 안에 '상대가 나에게 어떻게 했느냐'는 들어있지 않는데도. 그래서 어떤 부류의 사람에게는 쓸모 있는 자기 방어 수단이자 상대를 옭아맬 족쇄이고, 착취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데 사용된다는 것을 종종 놓치고 만다.


지금의 시아버지는 힘이 빠져 예전 같은 행동은 하지 않지만, 여전히 가족에게 무심한 와중에 아들에게 효도운운하며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려 하고, 그런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던 시어머니는 여전히 어머니라는 위치를 무기로 호시탐탐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 든다. 부모가 싸울 때마다 다른 방으로 피신시켰던 어린 동생은, 어느새 가족 내의 권력관계를 읽고 지금은 부모의 편애를 업고 우애를 가장하여 오빠 머리 꼭대기에 똬리를 틀었다.


따뜻한 애정은 부재하고 일방적 요구와 선택권 없는 복종만이 남은 관계. 시가족들이 그 긴 시간, 대체 어떤 말과 행동으로 남편을 꼼짝 못 하게 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피해자란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가해자들을 감싸는 머저리가 된 남편이야말로 저들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내 속이 터지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나는 그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다. 함께 자유를 맛보고 싶었다.


한 시간쯤 뒤, 남편이 들고 온 메시지 -동생에게 보내려고 써봤다는 것- 는 실로 처참한 것이었는데, 그걸 읽고 그 혼자서는 그들과의 관계에 균열을 일으킬 것 같은 생각은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음 깊은 곳에서 그것을 피하게끔 하는 메커니즘이 작용하고 있다.


남편의 말(이라 쓰고 '한낱 소망'이라 읽는다)대로, 그의 원가족들은 입이 거칠고 생각이 짧을 뿐 악인은 아닌 것이 정녕 사실이라면, 그가 혈연과 유교를 빌미로 한 그들의 가스라이팅에 얽매여 있듯 그들 역시 얽매여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가 아닌,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래서 남편이 욱해서 조금 실수를 하더라도 결국 '가족이니까'라는 이유로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큰삼촌이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외갓집에 드나들 수 있었던 것처럼.


남편이 혈연가족, 그것도 자기보다 손 아래인 동생에게조차 자신의 목소리로 입바른 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것은, 남편도 무의식 중에 느끼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들은 '가족이니까' 강요는 해도 '가족이니까' 받아들이려는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그러니까 얼기설기로 붙여놓은 약하디 약한 '우리 가족'을 부서뜨리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그에게 심어진 씨앗이 그를 붙드는 것이다.




남편은 억울하다고 했다. 자신의 진심을 담아 썼는데도 그게 거짓말이나 내 발언의 카피로 느껴진다면 그럼 자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내가 했던 말들이긴 하지만, 자신도 듣고 보니 그렇구나 생각해서 적었는데 뭐가 나쁘냐고. 


남편이 뭐라 뭐라 말을 늘어놓았지만 더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어차피 무리다. 네겐 네 원가족들이 걸어놓은 속박이 너무 강력해. 그걸 다 깨는 데에는 얼마만큼의 시간을 더 필요로 할까. 저들은 네 마음 깊숙한 곳에 심은 씨앗에 중간중간 물을 주고, 관찰하며 키워나갈 거야. 내가 아무리 싹을 자르고 잎을 떼어내도 깊게 자리 잡은 뿌리까지는 다 도려낼 수가 없어.


큰삼촌은 자식들의 결혼식을 전부 끝내자마자 거짓말처럼 다시 흔적을 감춤으로써 내게 하나 더 깨달음을 주었다. 도덕이며 윤리며 치덕치덕 발라놓아도 어떤 이에게는 '그럴 마음'만 있다면 혈연도 가족애도 다 탈부착식일 수 있다는 것.


시가 삼인방이 귀에 착, 코에 착, 붙였다 떼었다 하는 '가족' 역시 그러하다. 그런 '가족'에 어째서 남편만이 저리 절절하게 매달려 있는지는 알 수 없고, 나는 평생 이해할 수도 없겠지만 고작 그 정도의 것, 그 정도의 사람들 때문에 더는 이 못할 짓을 계속하고 싶지가 않다.


"됐어. 더 이상 쓸데없이 고생할 필요 없어."


이제 다 끝내자고 하는 나와, 이야기를 하자는 남편의 실랑이는 며칠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다만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는 점점 소리를 지르지 않게 되었고 남편도 서서히 원가족들의 편을 들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남편의 어머니와 시누에게서 제각각 메시지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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