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복보다 더 무서운 것 (12)
몸은 피곤했지만 쉽사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몇 시간 전의 일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시누의 건방진 표정, 말투, 목소리. 좋은 말로 중재하는 듯했지만 열심히 자기 와이프 기분을 맞추던 그녀의 남편. 맞은편에서 함께 보고 있었으면서 아무런 제지도 보호도 하지 않던 우리 남편.
싫은 사람만 늘었다.
어찌 잠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날은 9시를 훌쩍 넘기고서야 눈이 떠졌다. 휴일에도 7시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는 남편은 10시가 넘어가도록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제의 정황을 복기하며 내가 왜 이러나 열심히 원인을 찾고 있을 것이다.
습관적으로 노트북을 켰지만 뭘 읽거나 볼 기분도 아니었다. 덤덤히 흰 창을 열어 며칠 전의 일을 이어서 쓰기 시작하는데 배가 고파온다. 맘이 괴로울 때에는 배도 안 고픈데. 생각해 보니 어제 시누 부부를 만난 자리에서도 오토시(お通し, 이자카야에서 자릿세를 받고 주는 일인용 전채요리)와 회 몇 점 먹은 게 다다.
커피라도 끓일까 일어서는데 시누가 준 쇼핑백이 눈에 들어왔다. 오다가 산 것인지 비에 젖지 말라고 비닐 포장이 덧대어져 있었다. 아무런 부연설명 없이 '이거'하고 내밀어진 쇼핑백에는 달로와요라 쓰여 있었다. 마카롱일 것이다.
"뭐 이런 걸 다."
'하와유 아임파인땡큐앤유' 같은 정해진 대답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뭘 받고 이렇게까지 감사한 기분이 들지 않는 것도 처음이라 느꼈다. 싫은 사람에게 이유도 없이 은혜를 입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주는 사람도 기계적으로 건네고 있는 것 같아 썩 유쾌하지 않았다.
가게를 나올 땐 내가 들고 나왔지만 역으로 향하는 길에 남편에게 떠밀듯 건넸다. 취해있던 남편이 흘리지도 않고 잘 가져다 놓은 쇼핑백을 보고 있자니 시어머니가 한국 여행 플랜을 억지로 짜게 하면서 주고 간 '자기 냉동실 처분품'을 생각나게 했다.
포트에 물을 끓이려다 말고 쇼핑백 앞으로 돌아와 힘껏 발로 걷어찼다. 힘없이 벽에 처박힌 쇼핑백에 한번 더, 다시 한번, 또 한 번, 발길질을 했다. 그리고 쓰레기통에 있는 힘껏 욱여넣었다. 시어머니가 만들어 준 티슈케이스, 동전지갑, 파우치도 전부 그러모아 처넣고, 몇 번 쓰지도 않았는데 뒷면이 다 타버린 프라이팬, 시간 조절 버튼이 뽑힌 고장 난 선풍기는 현관 신발장 앞에 내동댕이쳤다.
물건에 화풀이를 하는 것은 정말 싫어하고, 사람이 직접 만든 물건은 잘 버리지도 못하는데. 지금은 그 집구석 인간들 손길이 닿은 것은 하나라도 내 집에 남겨두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앞섰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테이블 위에 놓인 기한 지난 카탈로그를 우악스럽게 찢어발겼다. 나는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일까. 코팅된 종이가 지익 지익 찢어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조금 후련해 지는 것 같다.
진정될 무렵, 남편이 '오하요-(おはよう, 아침인사)'하며 거실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미 프라이팬과 선풍기를 보고 왔겠지만, 널부러져있는 종이쪼가리들을 보며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려는 듯 했다. 이내 남편은 말없이 바닥에 떨어진 종이 조각들을 하나하나 주워 쓰레기통에 넣었다.
남편은 이런 사람이다.
무심하고 둔감하며 소극적이라 답답하고 답답, 또 답답하지만, 내가 제 성질을 못 이겨 수준이하의 패악질을 부리고 속이 상해 엉엉 울어도, 그것이 설사 자신에 대한 미움으로 말미암은 일일지라도, 나한테 왜 그러냐고 묻거나, 놀라거나, 그만하라 하는 대신, 묵묵히 그 자리를 정리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
나는 그것이 이 사람의 내면에 내재된 '선함'이나 '강함'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전부가 전부 그렇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러한 행동을 하도록,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의 원가족들에 의해 설계되어 온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는 '질문'이나 '짜증' 같은 '반항값'은 입력되어 있지 않다.
그래야 편리하니까.
시가에서 돌아오는 길은 꼭 묘하게 뒷맛이 나쁘고, 앙금이 오래 남았다. 특히 시모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면 금방 탄로 날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는데, 그런 거짓말을 '일본의 상식' 또는 '자식이 해야 할 효도', '우리 집은 원래 그렇다'라고 포장했다.
그 언동들이 너무 뻔뻔하고 자연스러워 한동안은 내가 이상한 건가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상했다. 일본의 상식이란 건 인터넷에 쳐봐도 알고, 자식 도리는 부모와 맞담배 피우는 일본인들보다 유교나라에서 어머니를 끔찍하게 모시던 장남 효자-우리 아빠다- 를 코앞에서 지켜본 내가 더 잘 알 것이다.
딱 하나 '우리 집은 원래 그렇다'만이 미지의 세계였는데, '그런 적 없다'는 남편의 증언과, 지난번에 했던 것을 이번에는 안 하는 것을 보며 '우리 집은 원래 그렇다'는 것도 딱히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또 이상하게 여긴 것은, 남편과 그의 원가족들의 역학관계다.
남편은 원가족들에게 자기 목소리를 내길 꺼려한다. 시어머니가 궤변을 늘어놓으며 행동에 제약을 걸어올 때에도, 시아버지가 밤 9시 넘은 시간에 티브이 고치러 오라고 닦달해도 딱 잘라 거절하지 못했다. 시누에게도 마찬가지. 왜 항상 너만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줘?라 물어도 별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러면 좀 어때라고, 대수롭지 않아 했다.
하지만 저들은 남편에게 무심하다. 안부를 묻거나 해준 것에 대한 감사조차 하는 법 없었다. 그렇게 '아리가또' 소리 잘하는 일본인들이 말이다. 우리 아들 살 빠졌네, 안색이 안 좋네 하지만 그렇다고 영양가 있는 밥 한 끼 손수 만들어 먹이는 것도 아니다. 아들에 대한 소유권을 재확인하고 며느리 타박을 하고 싶어 해 보는 말일뿐, 관계의 흐름은 언제나 같은 곳으로만 흘러가고 있었다.
시모는 남편이 아직 어렸을 때부터 '넌 장남이니까', '넌 오빠니까' 같은 말로 자신과 동생을 지켜주기를 끊임없이 당부했고, 자기 연민의 하소연을 쏟아놓으며 그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활용했다.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임에도 굳이 타지에 나가 살던 아버지는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기보다는 일과 취미, 권리행사를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던져서 깬 컵조각을 엄마와 함께 주우며, 우리 엄마 이렇게 불쌍하니까 나라도 말 잘 들어야지,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 생각의 근저에는 '첫 아이인 내가 구순구개열로 태어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을 것이다. 한 번은 그의 유년기 시절 사진앨범을 보았는데, 갓난쟁이 시절 사진은 하나같이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시모는 빨리 다음 장으로 넘기라 했고 그다음은 여동생이 태어난 이후에 함께 찍은 사진들 뿐이었다. 기어 다니거나, 유모차에 타 있다거나, 걷기 시작했거나 하는, 흔히들 남기고 싶어 하는 성장과정에 대한 사진은 하나도 없었다. 위화감을 느꼈다.
당시엔 큰 충격이고 아픔이었겠지만 '아주 없었던 일'처럼 하여 극복하는 방식은 건강한 방법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사실 시어머니가 겪은 감정은 나로서는 다 알 수 없지만 지난 일이라고 화제를 피하고, 아들에게 잘해주는 것도 없이 나를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아들을 높이려 하는 것을 보면, 이미 한참 전부터 아이에게 죄책감을 전가하고, 자신에게 복종해야 하는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에만 연연하던 사람일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나에게 하는 것 역시 '너는 보잘것없는 인간이니 남편 보필 잘하고 시부모에게 충성하라'라고, 자신의 아들에게 했던대로 가스라이팅을 반복하고 있는 것뿐이다.
시누는 그 사이 '오빠 사용법'을 어깨너머로 배워갔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 모든 것을 방관하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했다. 언제나처럼.
그냥 외국인 며느리에게 박하게 굴고, 아들, 오빠 알길 우습게 아는 못난 사람들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행동들이 나르시시스트의 그것과 닮아있음은,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시가 사람들에게 느끼는 불편함은 소위 말하는 '시짜짓' 범위 내의 것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들 내면 깊숙한 곳에서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는 심리적 결핍. 그것이 시가를 기능부전가족(機能不全家族, 정서적 교류 등 가정의 역할을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하는 가정)으로 만들고, 그들 스스로 이기적으로 살며 나와 남편을 괴롭히게 한 원동력은 아닐까.
유독 남에게 희생하고 수동적인 경향이 있는 남편 역시 그런 결핍가정의 증거이나 피해자라 생각한다. 예전엔 착해서 그러겠거니 했지만 시가 사람들을 겪으며 이 역시 그의 타고난 성격이라기보다는 심리적 억압과 강요에 의해 고착화된 행동 패턴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간 작지만 많은 노력을 해왔다. 내 의견을 먼저 말하면 그걸로 정해져 버리기 때문에, 먼저 남편 의견을 물어 스스로 판단하도록 유도하며 생각을 밖으로 꺼내는 연습을 했다. 가족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전반에서 자신을 희생하기 때문에, 남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받아오던 유급휴가도 남편은 법정기준치 이외엔 쓰지 못했다. 그래서 진짜 웃긴 이야기지만, 내 비자받으러 간다는 핑계 (사실이긴 하지만)로 쉬어보기도 하고, '절대 안 될 거다'라던 월요일에도 휴가를 받아보거나 하는 식으로 성공사례를 늘려갔다. 남편 생각보다 회사는 쉽게 쉬게 해 주었다.
그 안에서 우리끼리 부딪힘이 있기도 했고, 아 인간 참 더럽게 안 바뀌네 하고 좌절한 적도 있지만 다 지나가야 할 과정이었다. 가족관계에 대해서도 겨우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시누는 '예전에 하던 대로' 너무 쉽게 남편을 원래대로 돌려놓았고, 남편은 '예전에 하던 대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까지의 그 시간들은 다 뭐였을까. 한심하고 또 한심하다. 쉽게 다시 잘해보자 하는 기분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나는 남편이 우리 집에서 태어났으면 훨씬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미 마흔 바라보는 나이에 '자, 0부터 다시 되돌리자' 할 수도 없는 건 알지만 함께 늪을 빠져나오는 것 정도는 해봄직 하다 생각했는데 알을 깨트릴 의지조차 가질 수 없다니.
그래서 이번만큼은 굳이 대화를 하려 하지 않았다. 내가 힌트를 주면 안 된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이대로라면 정말 어쩔 수 없게 되는 건 우리라는 걸 남편이 스스로 생각하고 바뀌려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이제까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우리의 관계를 이제 남편에게 맡기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