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복보다 더 무서운 것 (11)
전철을 탈 때는 같이 탔지만 내릴 때는 따로 내렸다. 남편이 꾸벅꾸벅 조는 사이, 버리기 좋게 미리 다른 칸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먼저 집에 가 현관문 안전고리를 걸고 집에서 내쫓아 버려야지. 부지런히 역 계단을 내려왔는데 벌써 역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젠장. 눈치채고 나보다 더 앞칸으로 옮겨갔구나.
아는 척을 하는데 안 보이는 것처럼 그를 지나쳐 갔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각. 종종 뒤를 돌아보면 저 멀리서 남편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것도 싫어서 빠른 걸음으로 골목길을 몇 개 구불구불 돌아갔더니 이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지어진지 100년도 넘은 목조 창고들이 듬성듬성 남아있는 거리에, 인적이라곤 나 밖에 남지 않았다. 평소엔 밤늦게 지나가야 할 땐 남편이 마중을 나와주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서로를 지우는 일도,
실은 이렇게 간단한 일일 것이다.
우리 집이 시야에 막 들어왔을 때, 타이밍 좋게 거실에 불이 켜지는 걸 보았다. 남편이 먼저 도착했는가 보다. 혹시 똑같은 생각으로 현관문고리를 걸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싶었지만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전철 안에서 '내가 꺼져줄 테니 가족분들과 행복하게 살라'라고 라인을 보냈다. 그제야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한 남편은 전철에서 내리면 이야기를 하자 했지만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열쇠를 여는 소리에 그게 현관으로 나와 '왔어?'라고 했을 때에도,
남편이 이야기 좀 하자고 내 반대편에 앉았을 때에도,
마치 남편이 투명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나는 남편을 바라보지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
할 말도 없었다. 말은 이미 성대에 굳은살이 배길 정도로 했다. 아, 어, 쓰이는 어휘만 다르지 나는 몇 년째 같은 이야기를 해왔다. 시가와의 갈등에서 내가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해결책에 가까워질 수 있는지. 이제 와서 더 할 말도 없고, 오늘 일을 질책할 기력도 없다.
말해본 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 나 자러 들어간다."
제풀에 꺾인 남편이 할 수 없이 침실로 들어가자, 나는 혼자 남은 거실에 이불을 폈다. 에어컨이 거실에만 있어서 여름에는 이부자리 생활을 하고 있다. 에어컨을 쓰지 않은지는 벌써 이주쯤 지났지만 아직 거실에서 미적거리던 덕분에 이불을 꺼내는 수고를 줄이게 되었다.
거실의 불을 끄고 이부자리에 몸을 뉘었다. 창 밖의 가로등 불빛만 스며들어오는 거실에서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느끼고 있는 후회와 실망에 대해.
후회. 막심하다. 경우 없는 사람들에겐 똑같이 경우 없이 구는 수밖에 없는데 내가 무슨 성인군자랍시고. 이리 하나 저리 하나 결국 이렇게 될 것 같았으면 두 번 다시 안 볼 사람처럼 지랄을 떠는 것이 정답이었다. 며칠 전까지는 내 속이라도 시원하게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서, 왜 갑자기 허무주의에 빠져서는 우리가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존재들 운운, 신혼 3개월 차 운운, 매제 앞에서 손위 처남 체면 운운 하며 온건주의자가 되었냔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남편을 떠올리자 실망을 넘어 분노에 가까운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는 나 이외에 이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고, 안하무인인 시누를 그 자리에서 가장 적합하게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동생의 손을 들어준 꼴이 되고 말았다.
시누는 18살에 상경해 남편과는 이미 15년이나 떨어져 살았다. 18년 동안 함께 살았다고는 해도, 자아 없는 유아시절을 빼면 사실상 정서적 교류가 가능했던 것은 그 절반 정도, 그나마 시누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남편은 대학생이었으니 서로 마주칠 시간도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본가에서 생활하던 때보다 다른 모습을 더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똑같은 것이 문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걔는 뭘 좀 몰라서 그렇지 나쁜 애는 아니다. 잘 타이르면 충분히 알아들을 애'라고 감쌌다. 내 눈에는 '뭘 잘 알면서도 일부러 그러는 나쁜 애, 잘 타일러도 들으려 하지 않는 애'로 밖에 보이지 않았고 오늘의 회동은 그것을 재확인했을 뿐이다. 남편은 오늘의 동생을 보고 정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을까.
핏줄이란 뭘까. 일어난 사실관계와 타당한 정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일까. 남편의 본가에서 남편은 핍박당하고 착취되는 역할을 맡고 있는데 어째서 아무런 불만을 가지지 않는 걸까. 그리고 내게도 같은 역할이 요구되는 것을 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로 일본어를 배우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 오지도 않을 것이고,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남편을 만나 행복하고 즐거울 때도 있었지만, 잊을만하면 한 번씩 불어닥치는 원가족의 입김이 지긋지긋하다.
그들이 유리한 입장을 선점하고 우리 부부에게 이기적으로 구는 것이 원인이지만, 사실은 그것보다도 원가족의 입김이 닿을 때마다 같은 피해자라 생각한 남편이 내 편이 아님을 느껴야 하는 게 더 아프고 쓰라리다.
생각해 보면, 한국어와 일본어를 자유로이 쓸 수 있는 나와, 한국어를 모르는 일본인 남편이 일본에서 산다는 것. 처음부터 공평하지 못한 출발이었다.
한국의 내 가족들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남편과는 공통언어가 없기 때문에 남편은 결혼 후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인간관계나 감정소모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혹시라도 뭔가 있을 땐, 내가 그를 온전히 지켜왔... 지켜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가 지키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겠지만.
반면, 나는 그의 원가족이 가끔씩 흩뿌리는 소나기 아래에, 우산도 없이 서서 비를 맞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남편이 쥐어준 '그들이 (나쁜 소리나 행동을) 할 리가 없어'라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는 비를 막을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다.
베개 옆에 아무렇게나 놓아두었던 핸드폰을 들어 나의 브런치북 '우리 집 일본인'을 열어보았다. 남편과 처음 만나 결혼에 이르기까지를 회상하며 쓴 글이다. 연재 브런치북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이 브런치북의 존재가 남편과의 불화에 좋은 안정제가 되어 줄 것이라는 기대도, 농담 반 진담 반, 했었던 것 같다.
중간 즈음에, 처음 만났던 날의 이야기들을 열어보았다.
쉬운 만남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운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복숭아뺨을 한 소녀 같은 발상을 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우리 만남을 운명이라고 한다면, 나만 해도 대학에 낸 수천만 원, 진로로 방황하던 시절들, 고된 타국살이까지, 그놈의 '운명'을 위해 지불해야 했던 대가와 운명의 내용을 생각하면 수지타산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지금처럼 이렇게 거지 같은 기분으로 숨을 쉬어야 할 때 더욱 그렇다.
결국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눈물은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