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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Oct 01. 2024

돌고 돌아 제자리

공복보다 더 무서운 것 (9)

하루종일 누워 생각에 잠겨있던 그날 저녁. 우리는 서로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소리 내어 울었다.


나는 그가 그의 원가족에게서 나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도 내가 자신의 원가족을 버텨낼 수 없을 것이란 걸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자꾸 희망을 보려고 할까.


몇 번이나, 왜 자꾸.



'여기 있었네.'


슈트케이스 맨 앞 지퍼를 열자 한참 찾고 있던 교통카드 케이스가 나왔다. 며칠 전에도 나오지 않아 남편 것을 들고나갔었는데, 오늘은 남편과 함께 나가야 하니 내 것을 찾아야 했다. 서랍이란 서랍은 다 열어봐도 나오지 않던 것이 붙박이장 안 슈트케이스 속에서 나왔다. 집 나간다고 짐 쌀 때 손 닿는 대로 가방 겉주머니에 넣어두고 잊어버린 것이다.


짐은 도로 풀었다. 나를 지키겠다던 남편의 다짐이 이번에야 말로 실현될 것 같아서가 아니라, 내가 없는 일상이 무섭다는 눈물 콧물이 발목을 잡았다. 단, 상황이 바뀐 것은 아니고 남편에게 느낀 실망감이 녹아내린 것도 아니라 아직도 둘은 서먹서먹한 채였다.


이런 때에 내 돈과 시간을 써가며 시누 부부를 만날 필요가 있나.


지금 우리 집이 엉망진창인데 무슨 개과천선을 시키겠다고.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부으면 속이라도 시원해질까 했는데 지금 같아선 그걸로 스트레스 발산이 될 것 같지도 않다. 요 며칠 동안 시누 부부 따위, 더더욱 내게 아무것도 아닌 인물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피로연에 참가할 수 없다는 것도 직접 전달해야 할 것 같았지만, 이제까지 저들이 보인 작태를 생각하면 그들처럼 똑같이 문자 한 통으로 띡 통보한다 해서 뭐가 나쁜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파란 모자를 눌러썼다. 손윗사람이면 손윗사람 값 해야지 그 애들이랑 똑같이 굴 순 없잖아. 도쿄로 향하는 전철을 기다리며 남편에게 당부했다.


"마음 같아선 분 풀릴 때까지 패악이라도 부리고 싶지만, 걔네 결혼한 지 세 달 밖에 안 됐는데 이제 막 시작한 사람들한테 나쁜 소리부터 하면서 초치고 싶지 않아. 말은 최대한 골라하겠지만 내가 말 많이 하지 않아도 되게끔 좀 도와줘. 걔네도 나보다 자기 오빠, 자기 손윗처남한테 듣는 게 더 와닿을 거고. 오늘 식사도 전부 우리가 사자. 싫은 소리 들을 거 알면서 나오는 애들인데 맛있는 거라도 먹여 줘야지."




"お久しぶり(오랜만이야)"


신주쿠 오모이데요코쵸(思い出横丁)의 한 가게에서 시누 부부를 만났다. 원래 식사를 하기로 한 가게는 다른 곳이었는데 예약시간이 20시 45분이라 시간이 약간 떴다. 여기서 딱 한잔만 마시고 자리를 옮기면 될 것이다.


"じゃあ、話はじめようか?覚悟はできてる?(그럼 이야기 시작할까? 각오는 됐어?)"

"えええ、嫌だー! しないとだめ?(에에에, 싫어-! 안 하면 안 돼?)"


맥주잔을 테이블에 놓자마자 남편이 농담처럼 말을 꺼냈고, 시누 역시 농담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이들은 내가 할 이야기를 뭐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되게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는 것'처럼 희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이미 남편은 원팀이 되지 않을 것임이 느껴졌다. 여긴 시끄러우니 조용한 데서 이야기하자고 하니 시누와 시누 남편의 얼굴이 일순 딱딱해졌다. 


"そういえば、同棲と結婚、何か違いはありましたか?(그러고 보니, 동거와 결혼, 뭔가 다른 게 좀 있나요?)"


딱딱해진 그 얼굴들을 마주 보고 있기 싫어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 친구들은 사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거를 시작해 3년 동안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그들 때문에 수없이 싸워야 했는데.


맥주 한잔을 마실 때까지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다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도 들어가고 '当たり障りのない(별 해를 끼치지 않는) 보통의 이야기들'을 해서 그런가 시누의 표정은 다시 좀 부드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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