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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Nov 15. 2023

마당 고양이들의 역사

방울이 1기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된 고양이, 방울

한국에 있는 우리 집 부엌에는 바깥 뒷마당과 연결된 쪽문이 있다.

아니, 말이 쪽문이지 현관문이나 마찬가지다. 왠지 모르겠지만 도로와 면한 현관문은 아예 베란다와 연결해 봉인해 두고, 부엌 옆 쪽문으로 다니는데 시골살이에는 나는 모르는 뭔가가 있겠지, 하고 따로 이유는 묻지 않았다.


그 쪽문 근처에 하루에 두어 번 찾아오는 고양이가 있다.

쪽문 디딤돌 근처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다가 사람과 마주치면 '야옹야옹' 애절한 목소리로 뭔가 말해오는 녀석.


"우리 방울이 왔구나. 밥 줄게, 조금만 기다려"


이름은 방울이라고 했다.





우리 집 공식 반려동물은 강아지인데, 마당에서 고양이들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사랑이' 때문이었다.


'난 고양이 별로야. 눈이 무섭고, 발톱이 무섭고 어쩌고' 하던 엄마였는데 마당에 찾아오는 들고양이 한 마리가 딱해 밥을 주다 보니 정이 들었다 한다. 집안에 사는 강아지들이 가녀린 고양이의 '야아~(옹)' 소리만 들어도 잡아먹을 듯 짖어대는 통에 집 안의 따뜻한 온기까지 나누어 줄 수는 없지만, 마당에 친 창고천막 안에서 몸을 쉬이게 하고,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이'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다. 사랑이는 마치 제 집인 양 우리 집을 들락거리고, 때로는 제 친구까지 데려다 밥을 먹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랑이가 새끼를 낳았다.

전부 해서 네 마리. 곁까지는 허락지 않는 들고양이라 먼발치에서만 지켜보았다고 한다. 누가 누군지 구별도 가지 않아, 네 마리는 전부 '방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우리 집에서 새로 태어나는 고양이들은 죄다 기수별로 하나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사랑이의 돌봄 아래, 방울이들은 우리 집 마당에 정착했지만, 어떤 방울이는 차에 치여서, 어떤 방울이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한 마리씩 세상을 떠났고 지금 방울이는 딱 한 마리만 남았다.


그 아이가 이 아이.

방울이 1기 중 유일한 생존자, 방울이다.





새로 마당을 차지한 숫돌이 일가 (정확히 몇 마리인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이와 방울이는 더 이상 우리 집 마당에서 살지 않는다.

'여기 가면 밥 준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 하며 찾아온 '숫돌이'가 사랑이와 방울이를 쫓아내고 마당에 자신의 일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세력싸움에서 진 사랑이와 방울이가 우리 집에서 들어올 수 있는 곳은, 뒷마당 부엌 쪽문 근처뿐이었다. 엄마는 앞마당 점령군 숫돌이들에게도 밥을 주면서, 쫓겨난 사랑이와 방울이가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쪽문 근처에도 밥그릇과 물그릇을 두고 애들을 기다렸다.


내가 파악한 마당 고양이들 관계도 (그 외 다수 더 있음)


이 동네는 노랑 고양이들이 대세인지, 사랑이네도 숫돌이네도 다들 노랑노랑한데 영역싸움에서는 철저하게 승자와 패자로만 갈렸다. 싸움에서 이긴 숫돌이네는 넓은 마당을 독식하고 저들 하고픈 대로 즐거운 시골 라이프를 즐기고 있다. 햇볕 좋은 날에는 마당에 누워 볕을 쬐다가, 또 바람이 차가워지면 천막 안에도 들어갔다가 저기 높은 컨테이너 위에도 올라갔다가 하면서.


하지만 사랑이와 방울이는 이제 어디에 사는지도 모른다.

매일 따로 와서 주린 배만 채우고 갈 뿐.


어쩌면 우리는 모르는, 그들 일가 사이에는 대대손손 이어져오는 무수한 전쟁의 역사가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봤다. 이번에는 사랑이가 졌고, 숫돌이가 이겼지만, 몇 대 전에는 반대로 사랑이네 증조할머니가 숫돌이네 증조할머니를 내쫓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고양이들은 어쩌다 이 마을로 들어온 걸까.





 

완전히 마당 붙박이로 살고 있는 숫돌이 일가에는, 가끔 왔다 갔다 하며 숫돌이가 망을 보는 가운데 급하게 밥을 먹고 가는 고양이까지 생겼다. 이것은 마치 빚쟁이들한테 쫓기는 남편 끼니 챙겨주고 있는 모양새랄까, 몰래 기둥서방 밥 먹이고 있는 모양새랄까.


"여보, 집사들 오기 전에 빨리 먹고 가"


흰색에 검은 점박이라, 검은색 털 섞인 머니들의 아빠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 내연남 정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중이다.


하지만 원래 터줏대감이던 사랑이네는 숫돌즈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왔다 조용히 사라져야 한다.


이후, 사랑이는 다른 밥줄을 찾았는지 발길이 뜸해지게 되었고, 방울이만이 하루에 한두 번, 쪽문 근처로 와 밥을 얻어 먹고 가게 되었다. 그렇게 고양이들의 영역다툼도 어느 정도 일단락 지어진 줄 알았는데, 덩치가 커진 살구와 머니들이 영역을 넓혀 와 방울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어떨 때는 밥 먹던 방울이를 쫓아내고 밥을 빼앗아 먹기도 했다. 심지어 아직 방울이 얼굴을 구별 못하던 나에게는 방울이 인 척하고 밥을 얻어먹고 갔다.


"걔네 오면 방울이 밥 먹으러 못 오게 되니까, 살구랑 머니는 꼭 마당으로 돌려보내"

"밥이라도 편하게 먹고 가라고 방울이 밥 먹을 땐 옆에 서서 지켜 줘야 해"


엄마의 가르침을 방울이가 아닌 살구에게 베풀어, 살구 밥 많이 주고 보초까지 서줬다는 사실은 나중에 사진을 보고서야 알았다. 둘 다 치즈태비지만 방울이는 입 주변에 인절미 콩가루를 묻힌 것 같고, 살구는 그냥 하얗다.


살구가 방울이 인 척 하면서 실눈 뜨고 눈치보는 중
배고파 힘없어하는 방울이 인 척 밥 주길 기다려보는 살구





진짜 방울이


방울이는 얼굴도 그렇지만, 살구들이랑은 태도부터가 다르다.

똑같이 김 씨 집 마당 셋방살이에 밥까지 얻어먹으며 살고 있지만 사람을 경계하는 숫돌이 일가들과 달리, 방울이는 누구에게든 야옹야옹 말을 걸고 제 몸을 비빈다. 밥을 먹고 있을 때 쓰다듬어도 가만히 몸을 내어준다. 너무 사랑스럽다.


급하게 밥을 먹고 경계하는 방울이


하지만 그런 방울이는 오랜 거리 생활의 습관인지 항상 허겁지겁 밥을 먹고, 밥을 다 먹으면 뒤도 보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밥을 먹다가도 종종 어딘가를 응시하며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혹여 작은 바스락 소리라도 나면 귀를 쫑긋 세우고 적이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식사를 시작한다. 어떤 날은 방울이가 밥을 먹다 말고 내 뒤를 쳐다보고 있길래 나도 흘낏 뒤돌아 보니 소리소문 없이 다가온 머니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 황급히 도망쳤다. 그제야 방울이도 다시 밥을 먹었다.


인간 입장에서 보면 다 똑같은 우리 집 더부살이 고양이들. 그래서 어지간하면 모두 사이좋고 평화롭게 지내주었으면 싶지만 고양이 세계에선 그런 건 용납되지 않는가 보다. 안타깝긴 하지만 배고파 찾아온 아이에게 짧은 시간이나마 주린배를 양껏 채울 수 있도록 밥과 물을 내어주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사람이 근처에 있으니 가까이 오진 못하고 멀리서 방울이를 지켜보던 숫돌이





한국에 있던 3주 동안 거의 매일 만났던 방울이. 어디 사는지,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른 채 간밤에도 안녕했는지는 쪽문 앞에 나타나 주어야나 알 수 있는 방울이. 다른 고양이들 텃세에도 혼자 꿋꿋이 살아가고 있는 외로운 방울이. 일본에 돌아오고 난 뒤에도 신경이 쓰여 종종 안부를 묻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살구들의 견제에도 꿋꿋이 자기 밥그릇은 챙기고 있는 것 같다.


10월에도 입김이 나왔는데 지금은 훨씬 더 추워졌겠지.

산 아래 동네라 아침저녁으론 뿌옇게 안개가 끼어 더 추울 텐데, 올 겨울도 제발 무사히 보내주기를 바라본다.


얼마나 목이 말랐는지 물을 한참 동안 마시다 갔다
설마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건 아니지?


부디, 다시 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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