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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Nov 13. 2023

가을에 하는 벚꽃놀이

추워지면 다시 찾아오는 희한한 벚꽃, 후유자쿠라

오랜만에 콧구멍에 바람 좀 쐬어줄 겸, 지난 주말에는 근처 산에 벚꽃을 보러 다녀왔다. 좀 있으면 눈 내릴 11월에 무슨 헛소린가 싶겠지만 후유자쿠라(冬桜, 겨울벚꽃)는 4월에 한번, 10월 말에서 12월 상순 사이 한번, 일 년에 두 번 꽃을 피운다. 작년에도 보러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 치치부까지 가는 바람에 후유자쿠라는 못 보고 엉뚱한 폭포(케곤노타키)만 보고 왔는데, 그 아쉬움 때문에 올해 다시 도전하게 되었다.


이 쪽은 사이타마현인데, 건너편 댐 (시모쿠보댐) 은 군마현이다.

이곳은 사이타마현(埼玉県)과 군마현(群馬県)의 경계에 있는 죠미네(城峰) 공원.

표고 500미터 높이에 있어 탁 트인 댐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고 가을에는 후유자쿠라가 피는 것으로 이 근방에서는 나름 유명한 공원이다. 멀지 않은 사쿠라야마 공원(桜山公園)도 후유자쿠라 명소인데 사람도 많고 가파른 산길 계단도 올라가야 해서 체력소모가 크다. 개인적으로는 아담하고 조용한 죠미네 공원이 더 좋았다.


단풍과 후유자쿠라

알록달록한 가을산을 배경으로 핀 벚꽃이라니, 봄과 가을을 억지로 모아놓은 것 같은 엉뚱함이 묘하게 재미있다.


흰색과 분홍색, 두 종류

후유자쿠라는 봄처럼 흐드러지게 피는 화사함은 없다.

꽃이 피는 가지의 3분의 1만 가을에 피고, 3분의 2는 다음 해 봄에 피기 때문이다.

대신 한번 꽃을 피우면 1개월 정도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봄보다 더 오랜 기간 즐길 수 있다.


'가늘고, 길게'의 힘.

어차피 대단하지 못할 거라면 꾸준하기라도 해야 하는데,라고 이상한 타이밍에 자기반성을 해본다.


단풍
캠프장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에 후두둑 떨어져 있던 가을


오고 가는 계절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봄에는 봄꽃 보러 가고 싶고, 가을 되면 단풍 보러 가고 싶고, 겨울은 일루미네이션을 보고 싶어 진다. 분명 작년에도 보았던 것, 보았던 곳이지만 올해는 또 뭔가 다를 것 같고 실제로도 그렇게 느껴진다. 그렇게 매년 새로 아로새겨진 계절의 단편들은 혼자 커피 마시고 있을 때, 글 쓰고 있을 때, 멍하니 길을 걸을 때, 그렇게 별 것 없는 시간들 틈에서 갑자기 툭, 떠오르곤 하는데, 예전엔 그런 시간에 떠오르던 기억들은 하나같이 지우고 싶은 추태나 실수뿐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드디어 예쁘고 뭉클했던 추억들이 내 삶에 더 많이 채워져, 싫은 기억 따위는 어찌 됐든 좋을 정도로 잊혀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냐는 추측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만큼일지는 알 수 없지만 사는 동안에는 좋은 기억들을 바지런히 모아가고 싶다.



1시간 정도, 가지 여기저기에 작은 솜뭉치처럼 매달린 벚꽃 잎을 바라보고, 걷고, 또 바스락바스락 떨어진 낙엽을 밟고, 때때로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다시 차에 올랐다. 2년 전에 왔을 때는 남자친구였던 이가 보온병에 담아 온 커피가 아직 따뜻했다. 찬바람에 식은 몸을 커피로 훈훈히 데우고, 우리는 다시 산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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