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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Nov 10. 2023

일본 경찰서에서 운전면허 갱신 하던 날

좌차선 우핸들의 나라 일본에서 나는 자전거조차 없는 뚜벅이다.

그래서 아무도 '그럴 것이다'란 상상조차 하지 않지만, 사실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있다.


내가 하지도 않을 운전면허를 손에 넣게 된 계기는 간단하다.

일본에서 장기 체류하는 외국인은 신분증으로 '재류카드'를 발급받는데, 내가 재류카드는 꺼내는 순간, 그때까진 꼬박꼬박 존댓말 하던 구청 직원, 부동산 직원이 갑자기 반말을 하고 '김상, 한자 읽을 수 있어?'라고 염려한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눈 똑바로 보고 대화하고, 자필로 써낸 신청서를 내밀었는데도 말이다. 일본인의 반말은 친근함의 표현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그렇기도 하다) 민원인, 내지는 고객에게 반말까지 써가며 친근함을 표시할 이유가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백이면 백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 반말허가증처럼 느껴지는 재류카드 말고 다른 신분증을 만들고 싶었다. 마침 한국 면허를 소지하고 90일 이상 한국에 체류한 기간이 있으면 시험 없이 일본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을 수 있다. 안 만들 이유가 없었다.


영사관에서 면허증 번역본에 공증을 받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하루 만에 일본 운전면허증이 발급되었다. 하지만 도쿄는 모든 맨션에 주차장이 딸려있는 것도 아니고, 한 달치 임대 주차장 이용료는 딱 내 방세랑 비슷했다. 회사는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차를 사야 할 이유도 없었지만, 정확히는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 후 시간이 흘러 이제는 시동 거는 법조차 가물가물해졌지만, 나는 우량운전자로 진화했다.






지갑에 넣어두면 저절로 면허증 색이 바뀐다. 첫 면허 (녹색) → 일반면허 (파란색) → 우량면허 (금색)


마지막 갱신은 5년 전이었다.

이제까지는 운전면허시험장까지 가서 갱신해야 했는데, 현이 달라져서 그런가 관할 경찰서란 선택지가 생겼기에 가까운 경찰서로 가기로 했다. 면허를 갱신하러 가면 시력검사, 사진촬영, 30분의 우량운전자 강습을 받게 되는데 면허시험장은 가는데만 1시간 이상 걸린다.


여담이지만 우리 동네에는 경찰서가 두 개 있는데,


지역 유형문화재가 된 구 경찰서. 메이지 시대의 건축양식이라는 것이 지정이유라는 것 같다.


하나는 여기,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구 경찰서.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로 조선인 학살이 자행되고 있을 때, 마을 자경단(임시로 조직된 경비단)이 도쿄에서 온 피난열차에 타고 있던 조선인들을 여기로 끌어왔다 한다. 그 후 서내에 수용된 조선인들을 자경단이 습격해 학살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수용인원이 가득 차 다른 현으로 이송하려다 살상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느 쪽이든 안타까운 비극의 역사가 서린 곳임에는 틀림없다. 초등학생 때부터 여기서 쭉 살아온 남편은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을 내게 듣고야 알았다. 씁쓸한 일이다. 여길 지날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  


현재의 경찰서


구 경찰서를 뒤로하고 지금의 경찰서로 향했다. 본관 옆에는 운전면허, 도로사용, 차고지증명과 관련된 민원을 처리하는 별관이 따로 있었는데, 건물이 가까워질수록 손에서 땀이 났다.


솔직히 잔뜩 쫄아있었다.

뭔가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경찰서'는 막연히 무서웠고, 오랜만에 일본 사회와 접점을 만드는 거라 제대로 말하고 들을 수 있을 지도 걱정이었다. 게다가 인구가 7만 명 밖에 안 되는 지역에서 평일의 갱신. 설마 강습실에 강사 하나 나 하나 숨 막히는 30분이 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경찰서에서 면허 갱신하는 것은 처음이라 영 불안 불안했다. 그렇게 떨리는 동공으로 접수대로 다가가 갱신통지엽서와 운전면허증을 내고 접수번호를 받았다.


하지만 뜻밖의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내 번호가 불리고 (이날 나는 '25번 분'이라 불렸다) 갱신 신청서 작성 요령을 설명받을 때, 통칭명(본명 대신에 쓰이는 이름)도 표기하고 싶다 했더니 재류카드를 내라는 것이다. 지갑 속에 항상 있는 거라 아무 주저 없이 지갑을 열었는데, 아뿔싸, 한국 다녀오고 여권 케이스에 같이 넣어둔 채 지갑에 돌려놓지 않았네!


사진 찍는다고 얼굴과 머리에 한껏 찍어 바르고 30분을 걸어왔다. 이마에 맺힌 땀은 조심스레 손수건으로 두드려 닦고, 걸음걸음마다 바람에 날리는 앞머리를 애써 꾹 누르며 걸어온 그런 30분이었단 말이다.

하, 재류카드 그 자식 때문에 만든 면허증인데, 이제는 그 자식이 없어서 내일 또 와야 한다니. 또 찍어 바르고, 스프레이 뿌리고, 땀 닦고 머리 끌어내리며 그렇게 30분을 또 걸어야 한다니.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나의 부주의 때문이라니!!!!!


"마이넘버카드(한국의 주민등록증 같은 것)로는 안 되나요?"

"재류카드 찍어놓은 사진은 있는데..."


'25번 분'은 내가 생각해도 아주 구차하게 질척댔지만, 직원은 단호박이었다.

어차피 통칭명 표기에는 주민표(가족관계증명서 비슷한 것)가 필요하고 거기 재류카드 사항도 적혀있다면 그걸로 확인해 주겠으니 시청 가서 떼어오란다. 3시 반까지만 오면 되니까 일단 접수번호표와 운전면허증이 복사된 신청서는 보관하고 있겠다며.


잰걸음으로 경찰서를 빠져나온 나는, 평소엔 절대 건너지 않는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에는 마이넘버카드에 내장된 IC칩을 읽어 주민표를 발급해 주는 기계가 있다. 마이넘버카드 신청서 받으러 가느라 한번, 카드 받으러 가느라 한번, 통칭명 넣느라 한번, 재류기한 바꾸느라 한번, 카드 하나 때문에 시청에 오락가락 네 번 (내년에도 한번 가야 함)을 하면서까지도 굳이 발급하고 유지해 왔던 건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시청이 먼 것은 아니지만 더 가깝고,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이 쪽이 훨씬 빠르다.


인쇄 직전, 동전이 없는 걸 깨닫고 (대체 이 지갑 안엔 들어있는 게 뭐란 말인가!) 녹차를 사고 뭘 하고 부산을 떨었지만, 따끈따끈한 주민표를 손에 들고 5분 만에 경찰서로 돌아갔다. 본인 동의가 있으면 공공기관에서 마이넘버카드를 읽어내리고 주민표를 열람할 수 있게 하는 법률장치만 마련되어 있으면 종이 뽑고 어쩌고 하지 않아도 그 안에 들어있는 내 인적사항을 확인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페이퍼리스화에도 기여할 일이다. 하지만 아날로그의 나라 일본에서 마이넘버카드를 쓸 일이라곤 내 집에서 세금신고하고 납부상황 열람하고, 재류기한 연장 신청하고, 편의점에서 증명서 뽑는 것뿐이고 공공기관에 업무 보러 갈 때는 그렇게 뽑은 증명서 등등을 지참해서 가야 한다.


아, 잠깐. 건강보험증 대신에도 쓸 수 있는데, 병원에서 쓰는 건 되는데 경찰서는 왜 안 되는 걸까.






어찌어찌 무사히 갱신함



약간의 트러블은 있었지만 '25번 분'은 무사히 갱신에 성공했다.  


'시력검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면허 갱신 안되고, 그런 경우에도 수수료는 반환되지 않습니다'라는 것치곤 시력검사는 너무 간단했고 (기계에 눈을 대고 보이는 대로 말하면 되는데 기계 없이 그냥 하는 검사보다 더 잘 보였다), 강습 수강자는 다행히도 나 말고 한 명이 더 있었다. 책상도 없이 등받이 없는 병원 대합실 같은 의자에 앉아 안전운전 경각심을 일깨우는 비디오를 20분 정도 보고 나머지 10분은 강사분이 짧게 강의하는 시간으로 되어있었는데, 강사도 하루종일 하려면 지겨운 건지 비디오만 틀어주고 비디오가 끝나니 다시 돌아와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기계적인 시스템이었지만, 사람이 적으니 리액션을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아서 최대한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표정도 풍부하게 짓느라 노력했다. 얼마나 관객 역에 심취했으면, 사고례에 대해 말해줄 때 나도 모르게 '아이고' 소리가 나올 뻔했다.  


마지막으로 구멍이 뚫린 옛 면허증과 새 면허증을 돌려받고, '이름, 생년월일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라' 했는데, 기재 내용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사진에 문제가 있었다. 사진은 방금 전 여기서 찍은 건데, 안경 굴절 때문에 볼에 파란 배경이 들어간 게 아닌가. 아니 면허증이 이래도 돼? 란 생각을 잠깐 했지만, 인쇄하고 한 번은 보았을 테니 뭐, 괜찮은 거겠지 하고 집으로 돌아오..


안주


... 지 않고 근처 사이제리아에 들어갔다.


긴장 탄 채로 안달복달 뛰어다니다 마지막엔 한참을 뻣뻣하게 앉아있었더니 몸도 마음도 피곤했다. 왠지 모르게 심장도 계속 두근거리는 것 같아 자리에 앉자마자 안정제 WN03부터 주문서에 적어 넣었다. 사이제리아의 주문서는 요리 코드를 적게 되어 있는데, WN01은 레드와인 글라스, WN02는 화이트와인 글라스, WN03은 레드와인 250미리 디캔터, WN04는 화이트와인 250미리 디캔터다. (05, 06까지 있는데 각기 500미리 디캔터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이제까지 얼마나 시켜댔으면 며칠 지난 지금도 앉은자리에서 코드를 적어낼 수 있다. 이 정신으로 공부를 했으면 (이하 생략)


주문서를 다 적고 벨을 누르면 점원이 와서 주문표를 확인한다.

WN03을 본 점원이 물었다.


"운전할 예정은 없으십니까?"


몇 번이나 들어오던 대사인데도 오늘은 좀 새롭게 들린다.

주마등처럼 몇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1.5차선 넓이에 중앙선이 그어지지 않은 어떤 2차선 도로. (믿기지 않겠지만 골목길도 아니고, 시골 구 시가지를 관통하는 정말 그냥 2차선 도로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운전. (일본인들의 준법의식이 생각보다 투철하지 않다)

최근에 알게 된 일본은 적신호 좌회전이 안된다는 사실.


한국에서는 옆에 큰 차가 지나가면 덜컹대는 모닝으로 잘도 다녔었는데 아, 무서워. 너무 무서워.


대답을 기다리는 점원에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없어요."


아직도 한참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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