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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Aug 16. 2023

지갑과 공간을 공유하는 부부

2023 화이트데이

괴나리봇짐 (*노트북 가방) 매고 1시간 걸었다고 어찌나 진이 빠지던지, 집에 오자마자 옷부터 갈아입고 털썩 누워버렸다. 손가락만 겨우 꼼질대면서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남편에게서 라인이 왔다.


'今から帰ります!(지금부터 집에 갈게!)'


이 사람은 사귈 때부터 연락은 참 잘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눈뜨면 기체후 일향 만강하셨는지, 출근하면 출근한다, 퇴근하면 퇴근한다 꼬박꼬박 연락을 해왔다. 결혼하고 나서는 귀가 후 라인을 할 일은 없으니 (아, 있구나, 다른 방에 있을 때) 전체적인 메시지 건 수는 줄었지만, 오히려 연락 빈도는 더 늘은 것 같다. 예전엔 근무 중에는 라인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하니까.


일본인은 연인에게도 연락을 잘 안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확실히 전체적인 경향으로는 시시콜콜한 작은 연락을 잘하지 않는 사람, 읽고 금방 답을 보내지 않는 사람 비율이 한국에 비해 많긴 하다. 때문에, 일본인과 썸을 타는 중인, 사귀는 중인 한국 여성들의 속앓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내 블로그 유입키워드에도 '일본남자 연락' '일본인 연락' 이런 검색어가 종종 등장한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사람 by 사람. 그래서 그 사람의 연락 성향이 나와 잘 맞으면 다행인 거고, 그렇지 않다면... 근데 이건 요즘 느끼는 건데, 결혼하고 같이 살다 보면 연락 말고도 아웅다웅할 일은 차고도 넘쳤으니, 썸이나 사귀는 단계에서 연락이 적어 신경 쓰인다면, 처음부터 싸울 요소가 최대한 적은 (또는 적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최선의 방책 아닐까 싶다. (마음이 사람 마음대로 된다는 전제하에)


우리는 그런 면에선 다행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집에 온다는 라인이 오면 대충 15분에서 20분 정도 후에, 남편 차가 주차장에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서방님 언제 오실까 하여 창문 앞에 찰싹 달라붙어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고, 주차장 입구 바닥에 길게 배수구가 있는데, 그걸 차가 밟으면 크게 소리가 난다.


그런데 이 날은 40분이 넘도록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왜 안 오지? 중간에 뭐 무슨 일이 났나? 하고 걱정도 됐겠지만, 이날은 분명, 아무 생각 없이 집에 간다고 했다가, '아차!' 하고 뭘 사러 간 것이 틀림없다.






지난 밸런타인데이에는 이 초콜릿을 만들어 주면서 '이건 취미로 한번 만들어 본 거니까 화이트데이에 오카에시 (お返し, 답례로 되돌려 주는 것) 안 해도 된다'라고 말해 두었다. 우리 집은 남편 지갑도 내 지갑, 내 지갑은 내 지갑인 집이라, 남편이 나에게 뭘 사주면 나는 묘하게 내돈내산 (내 돈 주고 내가 산 것) 같아서 기쁜 마음이 반감된다.


그래서 화이트데이에 혹시나 뭘 사줄 생각이라면 절대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런 것치곤 나는 의미 부여하길 좋아하는 사람이라, 시내에 볼 일이 있어 나간 김에 화이트데이 기념이라며 혼자 조각 케이크 사 먹고, 나만 몰래 재밌게 지내고 왔다. 그리고 양심에 찔려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들어온 참이었다.


그러나 이건 내 생각일 뿐이고, 남편은 남편 나름대로 생각하고 하고 싶은 바가 있을 터이니, 초치는 하지 말고 그냥 아무것도 모른 척 누워있기로 했다.






「초치는 소리 하지 않기」


이건 요 1년 동안 정말 어려웠던 미션이고 지금도 어려운데, 나는 나의 공간이 전부 스스로에 의해 컨트롤될 수 있는 상태이길 원하는 타입이다.

 

그래서 일본어학교 기숙사 다인실에서 사는 건 정말 정말 괴로웠고, 기숙사에서 나와 혼자 살게 된 이후로는, 오롯이 나의 의지와 생각, 기분으로 집이라는 공간에서의 시간을 보내왔는데, 남편과 결혼하고 나의 공간과 그의 공간이 공유되어 '가정'이라는 형태를 띠게 되면서, 공간개념과 각자의 존재에 대한 개념이 조금 복잡해졌다. 그와 함께 있으면 그를 나의 공간에 들어와 있는 나의 일부 내지는, 나의 종속물이어야 할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래서 나의 공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예를 들어 바닥에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를 테이블 위 앞접시에 올려놓는다거나- 을 그가 취했을 때, 나는 즉각 수정대응(잔소리)에 들어간다. 아니 왜 바닥에 떨어진 걸 접시에 올려놔? 그러다 실수로 먹으면 어쩌려고. 더럽잖아.


하지만 그는 내가 아니고, 여기는 그의 공간이기도 하다. 아무리 부부라 하더라도 독립된 개별 개체이기 때문에, 내 생각과는 다른 그의 사고와 행동에 내 마음이 불편해질 때가 있다 하더라도 내가 마음대로 그를 조종하거나 지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다. 내가 쓴 룰북을 남편에게 읽으라고 종용하고 있지만, 읽게 하는 것 자체가 그의 입장에서 보면 부조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


알고는 있지만 읽든 말든 네 맘대로 하라, 고는 안 되는 거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남편의 생각을, 좀 더 존중해 줘야 할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남편의 귀가를 기다렸는데, 돌아온 남편은 거실로 가 뭔가 부스럭부스럭 꺼내놓고는 방으로 들어와 아직도 아프냐고 물었다. 며칠 전에 자다가 목에 담이 와, 움직일 때마다 비명이 절로 나오는 상태였는데, 간밤에 남편이 깰까 봐 소리도 못 내고 하악, 하고 음소거로 소리 지른 걸 들었나 보다.


"아니, 그냥 피곤해서 누워있었어."

"그래, 더 누워있을 거야?"

"아니, 슬슬 일어나야지"


일어난다 하니 남편이 한발 먼저 거실로 들어간다.

아 이제 주겠구나, 하면서도 모른 척 거실로 갔더니, 초콜릿을 내민다.

여기까진 예상 가능한 결말이었는데, 하나 더 있었다.


생각지도 않던 꽃다발.




내가 퇴직하면서 회사에서 꽃을 받아와 방에 장식을 해뒀던 적이 있다.


그때, 내 자취방에 놀러 와 같이 이삿짐을 싸며, '꽃, 괜찮네' 하더니, 결혼 후엔 매달 27일마다 꽃을 사 왔다. 27일에 입적 (入籍, 혼인신고)을 했기 때문이다.


날이 더워지고 또 금방 쌀쌀해지며 남편의 꽃 선물은 한동안 중지됐지만, 오랜만의 꽃다발에 마음이 들떴다. 내돈내산 같을 것 같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와! 웬 꽃이야! 예쁘다!'라며 사진을 몇 장이나 찍고 있는 나를 보며, 남편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남편이 원했던 건, 단지 내가 기뻐하는 것,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이 못난 와이프가 네 돈은 내 돈, 공간이 어쩌구 하고 있는 사이에도.


선인장이랑 고민했다는 남편에게 "근데 왜 꽃을 살 생각을 다했어?"라고 물어봤더니, "날도 따뜻해졌으니 슬슬 집에 꽃이 있어도 좋을 것 같아서. 그리고 꽃을 고를 때의 그 기분이 좋아" 란다.


... 뭐지, 꽃을 사는 자기 자신에게 취해있는 것인가...?


감동은 순식간에 호로록 봉인되고, 님편이 나르시시스트일지도 모른다는 의문만 남긴 채, 2023년의 화이트데이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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