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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Sep 01. 2023

외국인과 사귀면 외국어가 유창해질까?

어디까지나 나의 경우

일본에 온 외국인 유학생들을 지도했던 시절의 일이다.


어느 날, 대만에서 온 유학생 한 명이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본국에서 사회인 경력도 있어 여느 학생들보다 나이가 있는 친구였다. 강의실에서 어쩌다 '아저씨'라는 단어가 나오면 학생들이 그를 흘끗 돌아보고, 그럴 때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큰소리로 '왜 다들 나를 보는 거야?'라고 말해 모두에게 웃음을 주는 학생이었지만, 좀처럼 없는 갑작스러운 면담 요청에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며 면담실로 향했다. 


그는 오늘, 나이 지긋한 비상근 선생님이 쉬는 시간의 스몰토크로 '일본어를 더 잘하고 싶으면 일본인 여자친구를 사귀라'라고 했다며 한숨을 쉬었다. 


"저는 이미 같이 살기까지 하고 있단 말이에요"






미성년자도 아닌, 서른 넘은 학생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학생 개인의 사생활까지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얘는 참 쓸데없는 걸 가르쳐 주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를 마저 듣고 있었지만, 어학력 증진을 위해 일본인 애인을 만들라던 비상근 선생님을 원망했다. 농담이었겠지만, 본인도 일본어 하나만 하면서 무슨 근거로 학생들한테 뭐 그런 속 시꺼먼 목적을 갖고 연애사업에 뛰어들란 소릴 하고 있어. 봐, 괜한 소리 하는 바람에 '일본인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는데, 난 이미 사귀고 있는데도 일본어가 하나도 안 는다'며 순진하게 주눅 드는 애가 생겼잖...,


"그래서 선생님은 어떻게 공부하셨는지 궁금해요"


같이 살기까지 하고 있지만 일본어가 전혀 늘지 않아 고민인 그대와 달리, 나는 일본인과의 교제로 언어능력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어 냈을 수도 있는데, 어째서 나는 공부로만 일본어가 늘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인지, 내 안의 딴지 본능이 잠깐 일렁였지만, 미소로 애써 억누르고 나 나름 효과적이었다 생각한 학습법을 몇 가지 일러주었다. 면담은 그렇게 끝났는데, 오피스로 돌아와 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그 비상근 선생님이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 당시, 남자친구와 교제한 지 반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그 6개월 동안 내 일본어에 뭔가 발전이 있었는지를 헤아려 보았는데 어디 가서 '나 일본어 늘었어요!' 할만한 것은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남자친구랑 하는 이야기는 일상적인 이야기나 애정표현 밖에 없기 때문에 사회에 나와 쓸만한 어휘력이나 문법력의 성장은 없었다. 회사에서 '뽀뽀', '시져시져', 이런 혀 짧은 소리를 할 일은 없지 않은가. 


또 남자친구는 딱히 나의 일본어를 고쳐주려 하지 않았다. 알아듣는데 문제도 없는데 일일이 가르치려고 하면 내 기분이 상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뭐, 음. 그렇다. 내가 또 사람 가르치는 건 좋아하지만 누가 날 가르치려 드는 건 딱 질색이지. 


아, 약간의 무의미한 변화가 있긴 했다.


주차 매너가 엉망진창인 할저씨를 보고, 'じじぃ…何してんだよ (할배... 뭐 하는 거야)'하던 남자친구의 혼잣말을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오늘은 아래층 할배할매 외출해서 발소리 신경 쓰지 않고 걸어 다녀도 돼'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남자들의 거친 말투가 입에 붙기 시작해, 주중에는 그런 말들을 쓰지 않도록 뇌에 힘을 꽉 주고 이야기해야 했다. 


그럼 결혼해 같이 살고 있는 지금의 일본어 사정은 어떠한가.






눈에 띄게 퇴보했다.


이전에 만난 옛 동료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남편을 만난 적이 있는 이가 '말수가 적은 사람이다'라고 평했던 것도 있어, '대체 집에서 얼마큼 대화를 안 하고 살길래 1년만에 말을 이렇게 못하게 됐냐'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이 글쓰기가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직장을 다닐 때는 좋든 싫든 하루 8시간은 일본어를 써야 했는데, 집에 있으면서 틈틈이 글만 쓰는 지금은 한국어로 생각하고, 쓰는 시간이 길어져 일본에선 그냥 숨만 쉬고 있을 뿐, 언어생활은 한국에서 살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여가시간엔 재미없는 일본 방송 대신, 한국 드라마, 한국 유튜브만 보고 있으니 인풋도 아웃풋도, 한국어 비중이 아주 높아졌다.  


사용빈도가 달라지다 보니 알던 말도 기억이 잘 안나게 됐는지, 어제는 '베란다에 호랑나비가 날아왔었어'란 말을 하려는데 아게하쵸(アゲハ蝶, 호랑나비)가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그 왜 있잖아, 버터플라이 (나비도 생각이 안 났다)인데, 노란색 버터플라이. 날개도 노란색에, 검은색으로 선이 있고, 날개 모양도 특이하고 화려한데'라고 설명했다. 남편이 '아~ 아게하쵸'라고 하자 그제야 생각났다. 


그냥 무서운 꿈을 꾼 날, 난데없이 호랑나비까지 날아와서 이상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나비 설명만 길어지고 정작 별 내용 없는 말에 남편은 맥이 풀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뇌에 긴장 풀고 말해도 괜찮을 관계의 사람과, 긴장 풀고 말하는 대화 방식에 급속도로 익숙해졌고 퇴보는 아주 순조로웠다. 지금도 순조로운 중이고. 






반대로 우리 집 일본인은 어떠한가. 


한국에 있는 우리 가족과 직접 의사소통을 해보고 싶다며 공부하기 시작한 한국어는 즐거운 가나다 파트가 끝나고 '-해요', '-아요' 체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어려워져서 그런지 학습 흥미가 뚝 떨어져 요즘은 그 좋아하던 듀오링고도 어쩔 수 없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요즘 그는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유창한 인토네이션으로 '아니?', '아닌데?', '왜?', '아니라고', '시로'라고 대들기 시작했다. 이 다섯 말의 쓰임새와 억양만큼은 오리지널 한국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런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가 통하지 않으면, 시선을 떨구며 소리 내지 않고 '시바루'라고 입술을 달싹댄다. 가끔 드라마에서 이상한 설정의 캐릭터를 발견하면 '미친 아죠씨', '미친 아쥼마'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오고, 닥터 차정숙에서 김병철 배우가 외친 '여보' 소리가 인상 깊었는지, 가끔가다 '요보, どこいく?(어디 가)?'라며 화장실 가는 나를 불러 세우기도 한다. 어디 가? 는 끝끝내 외우지 못해 일본어로 말하는 게 또 웃기지만, 딱히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무심결에 내뱉은 나의 말이나 드라마 속 대사를 저 혼자 알음알음 흉내 내고 외워가는 걸 보면 그에게는 나와 한국 드라마라는 요소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긴 하다. 


게다가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때려 맞추는 '눈치'만 점점 늘어서, 이야기의 맥만 맞으면 도중에 한국어로 말해도 얼추 의미를 이해해 깜짝 놀라게 한다. 


실제로 아는 건 쥐뿔도 없는데 말이다.





남편의 성장과 나의 퇴보를 보고 짐작하건대, 혹시 그때 그 비상근 선생님이 말했던 '외국어를 잘하게 되는 것'이 일상적인 슬랭에 능숙해지고 언어적 감이 좋아지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면, 또 '외국인과 사귀는 것'이 외국어를 활용할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초급 레벨에서 기대할 수 있는 반짝 효과일 뿐이지, 노력하지 않는 무임승차자에게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다는 결론을,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내리게 되었다. 


작은 용량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쓰지 않는 일본어 폴더를 한국어로 덮어쓰기 해버린 무자비한 뇌 운용 프로세스 덕분에, 나는 대학 졸업 후 일본어를 쓰지 않았던 때보다도 더한 일본어 퇴보기를 맞이했다. 환경이 조성되어 있어도 노력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막 공부해야지! 잘해야지! 하는 모티베이션도 딱히 없다. 퇴보했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을 느낄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다간 사회생활 경험까지 다 까먹고 남편 등 뒤에 숨어서 남편 하고만 속닥속닥, 손가락으로 이것저것 가리키고 남편에게 대신 말하게 하는 그런 소극적인 외국인 아줌마가 되어 갈 것 같은 불안은 있다. 


어쩌면 내게 필요한 것은 책을 펴고 단어를 외우는 게 아니라, 사회에 나가 일을 하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그래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사랑만 속삭이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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