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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Aug 17. 2023

나는 지금 수박 중

여름과일의 왕

벤이라는 가수를 좋아한다. 청초하고 가느다랗지만 힘 있게 뻗어나가는 목소리와 절절한 감성이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그런 가창력의 소유자. 내 인생 드라마인 '또! 오해영'의 OST로 알게 됐는데, 노래가 너무 좋아서 다른 곡들도 찾아들었다.


그런 그녀의 노래 중에 '열애 중'이라는 노래가 있다. '헤어졌지만 난 아직 너와 열애 중'이라는, 미련이 뚝뚝 흘러넘치는 내용의 가사인데, 어후, 이제 좀 그만 헤어져라, 여자가 자존심도 없냐! 싶으면서도, 벤의 애절한 목소리가 좋아 아직도 가끔가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훅 하고 떠오를 때가 있는 명곡이다.


근데 그 노래가 왜 수박 먹을 때 떠올랐을까.

 


그제, 시어머니에게 라인이 왔다.

수박 좀 나눠줄라 하는데, 집에 있냐는 내용이었다.


날이 더워 앞머리를 실핀으로 틀어 올리고 마흔 줄 다 되어서는 어울리지도 않는 양갈래 머리를 하고 있던 나는 집에 있다고 회신을 하고는 허겁지겁 머리를 하나로 다시 모아 묶고 옷을 갈아입었다. 얼마 뒤, 주차장에 도착했다는 라인이 왔고, 나는 아래로 내려가 수박을 받아왔다. 사실 그제인 8월 15일, 광복절이기도 하면서 일본인들에겐 종전기념일이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추석과 같은 날 (오봉)이기도 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는 시가에 가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 불편해서 따지러 오시나? 싶어 긴장도 했는데, 차에서 내리는 시어머니의 표정이 밝으시길래 나도 그냥 '어멋! 그러고 보니 오봉이었네! 남편도 출근하니까 깜빡 잊었지 뭐예요 호호' 하고 모른 척했다. 그냥 수박 주러 오신 거였다.


그런데 수박을 건네받고, 시어머니가 시누가 온 이야기, 같이 어디 간 이야기들을 하시길래, 혹시 이제부터 어디 가셔야 하는 거냐고 물어봤더니, 대답대신 왜? 하고 물어보셔서 '날도 더운데 따뜻한데(진짜 이렇게 말했다), 아니 따뜻한 데래. 시원한데 올라가셔서 냉차라도 마시면서 이야기해요' 했더니 장보고 강아지 산책 시켜야 해서 그냥 간다고 하셨다. 나는 살짝 안도했다.






수박은 1/4통 정도였는데, 받을 때도 묵직했지만 냉장고에 넣으려고 보니 도대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오이지통을 꺼내 작은 통에 옮겨 담고, 안 들어가는 건 반찬으로 만들어 또 더 작은 통에 담아 겨우 공간을 확보해 넣었다.


그날 저녁, 차갑게 식은 수박 절반만 썰어 담았더니 프라이팬 만한 유리그릇이 가득 찼다. 처음 자를 때부터 '많지 않을까?' 하던 남편에게 '에이, 수박은 다 물이야. 걱정 마. 드라마 보면서 다 먹을걸?'이라고 했는데 반도 못 먹고 냉장고에 다시 봉인했다. 물이라고 무한정으로 마실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물이라 다 먹을 수 있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왔을까.


나는 언사외로 대학 간 문과생이다.


오랜만에 먹는 수박.

가히 여름과일의 왕이라 블러도 손색없을 달달하고 사각사각 산뜻한 식감.


그 산더미 같은 수박을 와삭와삭 씹어 먹으며, 어째서인지 벤의 노래 ‘열애 중'이 떠올랐다.


'난 아직 열애 중,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해, 열애 중, 헤어져도 헤어진 적 없어 언젠가 내가 너와 이별할 수 있을까'라는 그 노래가, 수박을 먹는 내내 내 귓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아무런 연관도 없는 그 노래의 가사에, 자연스럽게 내가 먹고 있는 수박이 덧씌워져,


'난 아직 수박 중~ 누구보다 차갑고 맛있게 수박 중~ 먹어도 먹어도 남아있어 언~젠가~ 내가 너를 다 먹을 수 있을까~' 하며 흥얼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걸 수박 같이 먹고 있는 사람과 공유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요즘 자주 '왜요?' 하는데, '왜요는 일본 요가 왜요지'라고 해묵은 쌍팔년도 개그를 선보일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제 썰은 수박은 어제 다 먹었기에, 아까 남은 수박을 마저 다 썰어 나는 또 지금 수박 중이다.

먹어도 먹어도 남아있던 그 수박, 언제 널 다 먹을 수 있을지 걱정하던 그 수박과는, 아마 오늘 저녁 안녕을 고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수박 싫어하는 거 억지로 꾸역꾸역 먹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달고 시원한 수박을 먹으면 뱃속에서부터 한기가 올라와 너무 좋아한다.


다만, (판결문에서도 이 다만을 주의해야 한다)


맛있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손에 물 묻는 것이 싫어 제 손으로 먹는 과일은 귤, 바나나만 먹고, 다른 건 누가 깎아줘야 나 먹는 내게 있어서 수박은, 맛있지만 가까이하기엔 서먹한 뭔가가 있다. 자르는 것도 보관도 일이라. 그래서 어쩌다 사 먹어도 네모나게 깍둑썰기 해 팩에 든 것만 먹었는데, 마트에서 잘라진 건 잘라진 데로 뭔가 찜찜해서 잘 사 먹지 않았다.

하지만 한꺼번에 깍둑썰기 해둔 수박을 더울 때마다, 입에서 땡길 때마다 야곰야곰 꺼내먹는 재미를 알아버렸으니, 가끔은 큰 맘먹고 수박을 사도 괜찮을 것 같을 기분이 든다.


'우리 집은 그냥 삼각형으로 썰어서 손에 들고 먹었는데?' 하던 남편도, 이 네모네모 수박의 편리함을 알았을 것이고.


여차하면 자르라고 시킬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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