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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Aug 18. 2023

단톡방 카톡에 '딸'이 뜨면 불안해진다

어떤 소식 

엄마 아빠는 카톡으로 말을 걸 때 종종 '딸', 한마디만 할 때가 있다.


처음엔 그냥 '여는 말' 정도로 생각했는데, 패턴이 있었다. 내가 귀찮아할 부탁을 해야 하거나, 한동안 연락이 없는데 잘 지내나, 궁금할 때 마음을 담아 부르느라 그렇다. 그리고 간혹 '바다 건너의 내게는 말하기 어려운, 그러나 전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그렇게 부른다. 친척 누구가 결혼식을 한다는 이야기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그런 식이었다. 


무슨 연유인지, 내 핸드폰에는 카톡 통지가 오지 않는다. 분명 모든 통지가 오도록 설정되어 있는데도 오지 않는다. 그 때문에 몇 시간에 한 번씩 카톡에 들어가 새로운 메시지가 오지 않았는지 확인해야 한다.


며칠 전에도 아빠가 '딸' 한마디만 보내왔는데, 한참을 모르고 있었다. 

2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눈치채고, 바로 '왜?' 하고 대답했지만, 아빠는 대답이 없었고 엄마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도 못해 줄 만큼 무슨 일이 있었나 해서 불안했다. '왜?' '무슨 일이야?' 몇 개 더 카톡을 보내봤지만, 아빠의 대답이 도착한 것은 또다시 2시간이 흐른 뒤였다.  


'뭐 해?'





기다리는 동안 별의별 상상 다 하면서 사람 심난하니까, 앞으로는 그냥 용건을 바로 말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말한 것이 불과 이틀 전의 일이었는데, 이번엔 엄마가 '딸' 하고 불렀다.


'왜'


왜는 엄마 사위네 나라가 왜(倭)지만, 퉁명스럽게 왜 (부르냐)라고 대답했다. 이틀 전에도 말했는데, 또야 또, 하면서. 어차피 내가 회사 다닐 때 이 즈음에 항상 휴가였으니까, 남편도 여름휴가 기간인 줄 알고 휴가 잘 보냈니 이런 이야기일 것이 뻔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금방 돌아온 엄마의 대답은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〇〇오빠가 하늘나라 갔어'


갑작스러운 친척오빠의 부음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 오빠의 이름은 거의 15년 만에 들어보았다. 내가 일본에 나와 살면서 친척들을 못 만나게 된 것도 그렇지만 원래 왕래도 잦지 않았다. 옛날 청춘스타와 닮은 잘생긴 오빠였고, 어쩌다 친척모임에서 만나면 항상 살갑게 대해 주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오빠가 어려웠다. 나이차도 있었지만, 껄렁해 보이는 겉모습과 말투가 나와는 사는 세상이 다른 사람 같아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모범생이었던 어린 나는, 국민학교 졸업하면 중학교 가고, 중학교 졸업하면 고등학교 가고, 고등학교 가면, 이제까지 내 등을 떠밀어 상급학교에 진학시키던 교육부의 보이지 않는 손이 대학은 자동으로 배정해 주지 않는다 해도, 저가 알아서라도 대학에 가고, 졸업하면 어딘가의 회사에 들어가, 거기서 누군가를 만나 결혼을 하고-, 그런 것이 세상을 사는 모두의 인생 루트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길에서 크게, 그것도 아주 크게 빗나가 있는 그 오빠가 마치 다른 세상 사람처럼 보였다. 프린세스 메이커에서 열심히 기르던 딸이 마왕이 되어버린 엔딩을 실사화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어린 마음에 그런 철없는 생각도 했다. 


그로부터 이십 년이 넘게 지나고 나서야, 내가 상상하던 '모두의 인생 루트'는 '그저 무수한 루트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나 자신도 그 루트를 벗어난 인생을 살면서 그 오빠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오빠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한창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할 나이에 부모의 이혼을 경험하고 시골 할머니 집에 맡겨졌다. 부모로부터의 애정이 결핍된 아이는 부모를, 환경을 원망했고, 그 원망은 점점 엇나감으로 이어져, 늙고 가난한 조부모 손으로는 점점 더 감당하기 어려운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조부모나 친척들에게서 그가 받고 싶었던 형태의 사랑은 아마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그는 일찌감치 집을 떠나 사회로 나갔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아무것도 없었으니 아주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했고, 한 때 들리던 이야기로는 요리사가 되려 한다던가, 결혼을 하려 한다던가. 조금씩 안정을 되찾는가 싶었지만 그 후로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은 그다지 좋은 내용들은 아니었다. 나도 안정적인 직장을 찾지 못하고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좋지 않은 소식들보다 반대의 루트로 전해지고 있을 내 좋지 않은 소식-대학까지 나와놓고 놀고 있대요-이 더 신경 쓰였다. 


그러다 나는 일본에 왔고, 시간이 흘러 아주 오랜만에 들은 것이 부고 소식이었다. 혼자 방 안에서 앓던 오빠는 결국 가는 길도 혼자 외롭게 떠났다고 한다. 본가와도 연을 끊고 지냈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투병사실을 알지 못했다. 세상을 떠나고서야 밝혀진 사실들을 멀찍이서 전해 들으며 인생의 황망함을 느꼈다.

엔딩보다 컨티뉴가 더 어려운 인간의 삶. 희망이 보이지 않는 매일 속에서, 그는 이 생을 더 살아나가는 것과, 천덕꾸러기 인생이 끝이 나는 것, 어느 쪽을 더 원하고 있었을까?


 




마지막을 배웅하러 가지는 못했지만, 요 며칠 동안 오빠 생각을 많이 했다. 

반백년도 안 되는 그의 삶을 되짚어 보면서, 이랬다면, 저랬다면, 그럴걸, 저럴걸, 이런 생각을 특히 많이 했다. 오빠가 자기 부모랑 살 수 있었더라면, 학교를 끝까지 마칠 수 있었더라면, 만났을 때 새침하게 굴지 말걸, 그 오빠의 좋은 점을 더 많이 봐줄걸, 그랬다면 조금 덜 외로워했을 텐데.  


만약 그가 우리 집에서 태어났다면 조금은 달랐을 텐데, 란 생각도 했다. 가끔가다 카톡으로 '아들' 하고 한마디만 보내와서 가슴이 철렁하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인생에 아주 큰 굴곡은 없이, 평평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버림받았다고 원망하거나 슬퍼할 일도 없고, 당연하게 쏟아지는 관심과 애정을 비료 삼아 뽀얗고 해맑은 얼굴 그대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행복은 아무것도 아닌 원점 (0,0)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일사분면처럼, 좌표가 전부 양수인 상태, 그러니까 뭔가 마구 신나고 즐겁고 강렬한 자극이 있어서 '아, 행복하다!'라고 마음속에서부터 드는 그런 기분만 행복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행복의 범주가 원점을 포함해 시작하는 것이라 한다면, 그냥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무덥고 평화로운 오늘, 특별한 이벤트로 대변되지 않는 애정이 있고, 언제나와 같은 별 의미도 없는 말 한마디를 나누며 피식 웃음이라도 지어볼 수 있는 이 흐리멍덩하고 미적지근한, 아무것도 아닌 (0,0)의 시간들도 다 행복이다. 


그렇다면 외롭고 힘들었을 오빠의 시간들 속에서 일사분면에 찍힌 좌표 같은 행복은 많이 없었을지라도, 흐릿한 (0,0)의 행복들만큼은 손가락 열개를 몇 번씩 접었다 폈다 할 정도로 많이, 아주 많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리고 저 세상에서는 오빠가 아프지 않고, 힘들지 않고, 

평안하고 즐겁게, 그저 좋은 일들만 겪으며 지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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