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뚜벅뚜벅 Jan 03. 2022

저녁 챙기기 싫은 날

하루 일을 마무리할 때쯤 시계를 올려다보면,

역시나 오후 5시 전후가 된다.

체질이 바뀐 것일까? 프리랜서지만 오후 6시 전에는

퇴근하겠다는 혼자만의 규칙을 세운 뒤

아무리 복잡한 일도 시간 안에 정리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는 중이다.

오늘도 역시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며

책상 위 짐을 하나 둘 챙긴다.

6시가 넘어야 퇴근할 수 있는 직장인들을 뒤로하고

 '자유로운 프리랜서라서 훌쩍 갑니다.'라고

말하듯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고 나섰다.

잠시 뒤 퇴근길 꽉 막힐 도로의 사정을 생각하며

오늘도 다행이라는 생각과 이만하면 잘했다는

뿌듯함에 사로잡힐 때쯤 주차장에 도착했다.  


'저녁 메뉴는 뭐가 좋을까? 남편이 저녁 모임 하는

날이니까 딸이랑 고기 사서 굽고, 파스타도 좀 만들까?'

즐거운 상상을 하며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저녁을 하기 싫어졌다.  


발 디딜 자리마다 뿌려진 문제집들,

하교 이후 주인에게 버림받은 듯한 책가방은

우선순위에서 밀린 듯 구석에 버려진 채

지퍼를 열고 쳐져 있고,

딸은 뭔가를 부지런히 숨기듯

 '벌써 왔네'라는 말로 인사를 건넸다.

(그래, 하루 이틀도 아닌데 자기가 불편하면 치우겠지.

잔소리하지 말자)


처음 보는 풍경도 아닌데 마음을 꾹꾹 누르며

참기를 다짐했다. 각종 문제집과 가방들 사이를

가로질러 거실로 들어섰는데...

이건 아니잖아. 아침에 입고 나간 딸의 옷이

식탁 의자에 산을 이루며 쌓여있는 게 아닌가.

신기하게 넘어지지도 않은 채 말이다.

(겨울 옷이라 두꺼워서 옷장에 넣기 힘들겠지.

내일 또 입을 때 치우자)


두 번째 고비를 넘기고, 부엌에 들어섰다.

입으로는 상상했던 저녁 메뉴를 떠들며

동의를 구하는데 하수구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치킨들이 나를 자극했다.

치킨 뼈들은 간식으로 챙겨 먹은 듯한

과일 그릇과 조각들을 품은 채

씻기 어려운 기름을 내뿜는 중이었다.

결국 난 폭발하고 말았다!

"먹었으면 제발 잘 버려달라고 했잖아.

이렇게 두면 누가 치워?

엄마는 왜 물건 따라다니면서 치워줘야 하는데?

힘들 게 일하고 왔다고. 나도 저녁 하기 싫어!"

얼마나 퍼부었을까...

요즘 초등학교 5년 딸과의 대화는

이렇게 단절되고 있었다.

이에 질세라 전에는 곧잘 사과하던 딸이

목소리를 높이며

"치우려고 했어. 치우면 되잖아."로

상황을 정리해버린다.  

(맞아. 곧 치우려고 했는데 내가 먼저 소리친 거지.

아니야, 같은 상황이 여러 번 있었는데

아직도 못 고친 거 아니야?)


사춘기에 접어든 딸과 갱년기는 멀었다고 생각하는

엄마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

누구도 사과할 마음이 없는 상황.

결국 난 저녁을 안 먹겠다고 선언했고,

알아서 먹고 싶은 것 챙겨 먹으라며

어른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다.

(냉동 삼각 밥 돌려 먹겠지? 뜨거운 물 쓰면 위험할 텐데...)


그런데, 딸이 보란 듯이 냉동 얼큰 칼국수를 꺼내더니

레시피대로 빠르게 물을 끓이고

냉장실 남은 버섯까지 알차게 썰어 넣어

한 끼를 가볍게 만드는 게 아닌가.

겨우 냉동밥, 핫도그 녹여서 전자레인지 요리만

해 먹는 줄 알았던 초5 딸이

계란 프라이를 적당히 익혀 즉석밥을 돌리고,

그 위에 비벼 먹기까지 했다.

열을 식히던 나는 식탁 앞 차려진 상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곧이어 내가 얼마나 못난 엄마인지 딸과의

소중한 저녁시간을 어떻게 놓쳤는지 후회하기 시작했다.

버섯 올린 얼큰 칼국수와 계란 프라이 곁들인 즉석 현미밥, 먹을 양만큼 덜은 김치까지(초5 딸이 홧김에(?) 차린 저녁 밥상)

"이걸 다 차린 거야? 사진 찍어도 될까?"

밥상을 찍어서 기억해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사진을 찍냐는 질문에

"다음에 혹시 다투면 이 사진 꺼내보려고.

우리 딸은 혼자서도 잘하는데  

엄마가 속이 좁은 것 같아서."

그랬더니 딸이 하는 말

 "아빠한테도 사진 찍어 보냈어."

아뿔싸, 남편이 알면 나는 또 마이너스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