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위의 장례식장

by 개나리

하늘색 문들과 물이 스민 벽지가 낡았지만 바다가 보이는 거실과 어우러지니 것도 퍽이나 빈티지스럽고 사랑스러웠다. 특히나 방 2개에 다락방 1개, 거실과 주방까지 따로 있는데도 연세로 550인 조건이라니 더욱 그윽한 집이었다.

거실에서도 안방에서도 새파란 바다와 함께 군데군데 빨간 지붕들이 마치 동화 같은 풍경을 이루어 몽글몽글한 마음이 들었다. 그 집에서 홍과 나는 제주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홀렸다.

그간 몇 년간 다녀간 제주를 주제로 만든 곡이 쌓였었고 정규앨범을 낸 참에 앨범홍보차 (사실상 누구 하나 초대 안 한) 제주로 여행을 가기로 했었는데 여행 출발 전날 갑자기 제주 라디오에 (JBS장성규의 뮤직 브런치) 초대되었다. 덕분에 한껏 목에 힘이 들어간 채로 기쁜 마음으로 여행길을 떠났다.

앨범을 전해 주러 들린 북카페에서 단골 아주머니는 귤을 까먹고 계셨다. 정말 맛있다며 우리에게도 권하셨는데, 이 당도가 육지에서 먹던 것과는 말도 안 되게 달콤하다! 아주머니는 아들과 남편과 함께 1년 살이로 제주로 내려와 살다 글쎄, 너무 좋아 2년째 살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당근에서 매물을 보는 법과 어느 정도가 싸게 나온 집인지 적정선도 알려주셨다. 옆에서 듣던 사장님은 거기에 더해 귤은 효돈, 위미, 남원이 최고라며 또한 효돈, 위미, 남원이 따뜻해서 추위 싫어하는 사람들이 살기에 딱 좋다고 맞장구쳤다.

그러한 분위기에 휩싸여 충동적으로 남원 신흥리에 집을 보러 간 것이다.

이 그림 같은 집에 산다면 일 년 동안 꿈같으리라! 그간 나를 괴롭히던 게으름, 무기력, 우울감 등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도 벗어나리라 생각하며 계약금을 넣었다.

사고를 친 느낌과 동시에 흥분됐다. 육지에 가서 홍과 함께 차근차근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는지 다시 따져보기로 했지만 이미 마음은 제주에 살고 있었다. 그렇게 여행 마지막날 집을 계약하고 다음날 새벽 비행기를 타러 나가는 길이였다.

카톡 알람이 울렸다 '이 시간에?'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7살 때 즈음 이혼하고 떨어져 살았던 아버지는 1년 전쯤 뇌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지셨다가 삼촌에 의해 3일 뒤에나 발견되었다. 의사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 했다. 3일 내내 중환자실을 왔다 갔다 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고 의식이 없는 아버지의 귀에 이어폰을 꽃아 내 음악을 처음으로 들려드렸었다.

며칠 후 아버지는 기적적으로 살아나셨다. 하지만 기쁜 마음도 잠시, 현실적으로는, 가혹하게도, 그 뒤가 더 문제였다. 병원 관련 일들로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였다.


아버지는 혼자 일어서지도 걷지도 화장실도 못 하는 상태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며 치매까지 온 상황이었다. 그간의 쌓은 정이 없이 혈육이라는 이유로 원치 않는 고생들을 해가며 지쳐있던 상태에 아버지를 보고 가끔은 원망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히 아버지는 개인회생을 통해 몇 년 전 보증 빚을 다 처리해 놓으셨고 모아두신 돈도 꽤 있어 당분간의 병원비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아직도 드라마 같은 데서 빨간딱지가 덮인 tv나 가구가 나오면 나는 반사적으로 가슴이 철렁 거린다. 순진하고 남을 돕기 좋아하던 아버지는 친구의 보증을 섰었고 어마어마한 빚을 고대로 안았었다. 그리고 집과 자식들이라도 지키기 위해 어머니와 이혼하고 가족과 떨어져 힘든 삶을 살았었다. 그에 따라 어머니와 우리의 삶도 함께 흉 졌기에 나는 자연스레 아버지를 원망하게 되었었다. 아버지는 내가 성인이 되었을 즈음부터 1년에 네다섯 번 정도 집에 와서 몇 시간씩 앉아 있다 가셨었는데 온갖 험한 일과 사고들을 겪으며 외형이 보도 못할 지경이 되었지만 나만 보면 깨진 치아로 히죽거리며 “예쁘다” 하며 웃었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와 눈도 잘 안 마주치고 인사만 겨우 하고 내방으로 가 휴대폰만 했다.


집을 계약하던 날 다이어리에 적었다. ‘다시 돌아가면 제주로 오기 전 남은 2달 동안 아버지 일을 처리하자. 앞으로 건강하고 오래 사시도록 병원일을 다 해결해 놓고 와야지. 더 좋은 요양시설에서 재활도 하실 수 있도록 꼭 옮겨 드리고 와야지. 아빠 조금만 기다려줘’

그렇게 적고 잠이 들었는데 불과 몇 시간 뒤 새벽 비행기를 타러 나가는 길에 카톡 알람이 울린 것이다.


순식간에, 예상치 못하게 눈물범벅이 되었다.

홍(남편)에게는 말하지 못하고 메시지만 보여주었다.

홍은 내가 휴대폰을 건널 때 이미 눈치채고 가슴이 철렁했다고 했다.

홍은 모든 짐을 다 들고 간신히 걷고 있는 나를 부축하며 비행기를 탑승하러 갔다.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이 잘 안보였다.

아버지의 영원한 부재에 영화처럼 아버지와 함께 했던 순간들이, 없었는 것 같았던 순간들이 드디어 떠오르며 필름처럼 지나갔다.

어렸을 적 계곡에 가서 튜브 타고 물놀이한 것, 내가 백일장에서 상을 받을 때마다 어떻게 알고 찾아와 날 데리고 서점에 가서 원하던 책을 장르 상관없이 1권씩은 꼭 사줬었던 것. 그래서 지금까지도 책을 읽고 고르는 순간들을 더 사랑하게 해 준 것.

유치원 시절, 소풍 도시락으로 정말 재료 없이 김에 밥만 싸줘 너무 창피했던 기억과 이제는 보이는, 그래도 서툰 솜씨로 쩔쩔매며 김밥을 쌌었을 모습.

부재일 때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는 것일까. 아버지가 위독했는데 그것도 모르고 나는 제주에서 놀고 있었다니.

아버지의 죽음을 맞닥뜨리니 내가 가진 당연하던 원망은 죄책감으로 바뀌고 있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홍이 내 자리를 겨우 찾아 날 앉혔다. 다행히 겨울이라 패딩모자를 푹 눌러쓰고 죄책감에 숨죽여 나오는 눈물만 계속해서 흘리고 있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는 이상하게 귀가 잘 들린다.

그때 나는 내 울음소리가 메아리쳐 울리던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내 귀가 이상해 졌는지 내 울음소리가 하울링 쳐서 여기저기 스테레오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비행기라 귀가 이상해졌나?’

비행기에서 내린 후 홍에게 자세한 내막을 들을 수 있었다. 승무원은 연신 내게 휴지를 가져다주었었는데 차마 나에겐 묻지 못하고 홍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고 홍은 그 사정을 이야기했다. 홍이 말하기 전까지는 다들 '남편이 뭐 큰 잘못을 했나 보다'라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내향형인 홍은 아마 자신도 모르게 조금 크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분위기가 바뀌어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졌단다. 심지어 휴지를 가져다준 승무원도 함께 울었다고.

내가 느끼기에도 이상하리만큼 한 시간 동안 조용하고 축축한 비행이 이어졌다. 모두가 처음 보는, 아무 관련 없는 나와 함께 울어준 것이다.

그날, 뜻밖의 위로가 없었다면 나는 제주를 오가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자연스레 죄책감과 공포를 떠올렸을 것이다. 제주에 살면서도 10~20번 정도 비행기를 탈 일이 었었는데 그때마다 그런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 위에서 함께 울어준 사람들 덕분에 나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약간의 재미있는 기분과 함께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따뜻함으로 그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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