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의 산책

by 개나리


개성 있는 소품샵에 가서 주인의 취향을 맘껏 구경하거나 책방에서 감성적인 음악을 들으며 흐드러져 있는 것도 정말 좋아했지만 제주에 영 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한 것은 아니었다.

영 살고 싶다는 순간들이 강렬하게 찾아오는 것은 바로 자연에 있을 때였다. 숲 속에서 자리 잡고 누워 공기를 먹고 있거나 바다에서 천천히 걸으며 다양한 빛의 풍경을 먹고 있거나.


일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마늘이와(강아지) 함께 일몰 시간 바닷가를 산책할 때다.

집에서 몇 걸음만 걸으면 신흥리 포구의 드넓은 바다가, 그 어느 것에도 방해받지 않은 채, 가슴이 확 뚫릴 만큼 넓게 펼쳐진다. 태어나서 본 바다 중 가장 아름다운 바다를 1년 동안 집 옆구리에 끼고 살았다.


집을 나가 모퉁이를 돌면 바로 보이는 바다를 향해 마늘과 함께 달려 나간다

바다는 시야에서 점점 더 넓게 펼쳐지다 끝없이 펼쳐진다

숨이 탁하고 차오르는 순간, 마침내 바다 한가운데 있는 듯한 지점에 다다르면

꼭 이 순간만큼은 바다를 자유로이 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일몰시간은 ‘황금 시간’이라 칭했다. 해는 완전히 지지 않고 밝은 달빛이 조금씩 뜨고 있는 그 시간이야말로 산책을 즐기기에 가장 좋은 때이기에.

나는 계절별로 해 지는 시간을 체크했고 그 시간을 지켜 ‘황금 산책’을 즐겨왔다.


우리 집은 요리할 때가 아니면 노란색의 간접조명만 켜놓고 생활한다. 특히나 쉼이 필요할 때는 최소한의 조명만을 켜놓고 아주 작은 크기로 음악을 켜놓곤 한다.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특질인 본능적으로 숨고 싶은 마음일까? 나는 특히나 겨울일수록 동물적인 감각이 올라와서인지 한껏 웅크려 있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해진다. 공연도 현저하게 줄여드는 계절이라 사람들과 연락도 최소한으로 줄이고 인스타나 페이스북도 접속 자체를 하지 않는다. 변명을 하자면 재충전을 위해 일종의 심리적인 겨울잠을 자는 것이리라..!



어쨌든 일몰이라는 시간이 되면 그 하루가 마음에 썩 들지 않았어도, 마음과 몸이 무겁게 웅크려져 있다가도 겨우 나가볼 용기가 난다. 자연이 간접조명을 켜는 때랄까?

한껏 힘을 머금고 돋아나는 일출도 멋있지만 모든 걸 다 받아들이고 이제 떠날 때를 준비하는 일몰이 훨씬 편안하다. 이는 내가 삼십 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어서일까.

모든 계절의 일몰은 아름답지만 특히나 겨울의 일몰은 더욱 차갑고 단정하다. 이 시간을 산책할 때면 마음의 불순물이 가라앉고 잠시나마 단정해질 수 있었다.

겨울의 일몰은 뜨거운 감정과 쏟아붓고 싶은 말들을 기꺼이 다 내려놓고 그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가벼운 미소를 띤 채 마주 앉아서, 마치 고요하고 내면이 담담한 ‘어른’들의 성숙한 이별 같았다. 또 충분히 아름다운 색채를 지녀 다채롭게 말할 수 있지만 몇 개의 색만을 골라 담백하게 내려간 정갈한 ’ 글 ’ 같기도 했다.


그런 자연의 품에 안겨 스스로를 걷게 했다. 제주살이를 하기 위해 늘 돈을 아껴야 했지만 자연이 하루에 한 번씩 무료로 건네주는 일몰의 황금 산책시간 덕에 우리는 마음이 몽글몽글한 상태로 제주의 일 년을 무사히 날 수 있었다.


나는 제주여신의 일몰 자태를 볼 때마다 여기에 안겨 살고 싶다고, 언젠가는 '일 년 살이'가 아니라 '정착'을 하러 오리라는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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