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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TP Jan 23. 2024

다산의 마지막 공부,  우아한 공포정치의 시작

데카르트의 명제 분석을 토대로 유가사상 살펴보기


# 마음, 다산의 마지막 공부


'다산의 마지막 공부'는 조선시대 대학자 정약용이 노년에 이르러 매진한 마음공부를 다룬 책이다. 저자 조윤제는 논어와 중용, 시경과 주역 등 사서삼경 속에 담긴 유가 사상의 핵심 대목을 짚어주며 "마음을 두드리는 글을 읽으며 작은 깨우침을 하루하루 쌓아간다면,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있었던 마음이 나도 모르게 되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공자-증자-자사-맹자로 이어지는 유가사상은 궁극적으로 예를 기반으로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이상국가를 꿈꾼다. 이것은 '극기복례'를 근간으로 하는 '인'이 필수적이며, 이것의 실천을 위해선 '경' 즉, 혼자 있을 때 더욱 삼가는 '신독(愼獨)'이라는 마음수양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다산은 진정한 신독이란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스스로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신중하게 다듬는 것이라고 말한다. 남이 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더 엄격한 잣대로 나를 다스릴 때가 진정한 신독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庸言之信 庸行之謹
閑邪存其誠
평상시 말할 때는 믿음을 주고
평상시 행동할 때도 근신하여
사특함을 막아 성실을 보존해야 한다


 

'성(誠)'이란 인의예지의 덕성을 모두 갖춘 것으로 곧 중용의 도다. '신독'은 평상시의 삶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때 하늘의 도인 '성'을 이루고 보존할 수 있음을, 위대함은 바로 평상시의 삶에서 시작됨을 함축하고 있다.


 

​ 다만, 이 '신독'은 달리 해석하면 제법 무서운 말이다. '신독'은 ‘도’ 즉, ‘도심’을 위한 수양지침으로, ‘도심’은 사람의 감정과 욕망인 ‘인심’을 바르게 쓰게 유도하는 도덕적 기준이다. 프로이트 식으로 해석하면 도심은 일종의 초자아인 셈인데, 초자아는 아동이 부모에게 개기다가 얻어터지며 머릿속에 강제로 탑재되는 개념이다. 다 큰 어른이 혼자 있을 때조차 '너 이 놈의 자식, 엄마가 언제 그런 거 하래!?'라는 일갈과 함께 딸려오는 등짝스매싱에 전전긍긍하는 모습, 슬프지 아니한가.


 

​ 이 '도심'을 위해 정약용 선생님 팔아먹는 게, 마치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라는 멘트에 슬쩍 생명보험 끼워 넣는 거와 비슷한 냄새가 난다. 초장부터 삐딱하게 설정한 시선, 조금만 더 삐딱하게 가보도록 하자. △우리는 도심을 제대로 체현할 수 있는 건가, △도심으로 무장한 이상국가의 끝은 무엇일까 순으로 차근차근 달려보자.


 

 

# 우리는 도심에 다다를 수 없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는 1,500년 ‘자화상’을 그렸다. 본디 화가들은 자뻑증도 해소하면서 모델료 없이 그림 연습할 겸 툭하면 자화상을 그려댔다. 약간 예수님 삘 나는 페이스긴 하다만 굳이 그림으로 담을 만큼 잘생겼다고 하긴 어렵고, 길가의 돌멩이처럼 넘쳐나던 게 자화상이던 판국에, 이 그림을 언급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뒤러는 ‘정면’에서 자기 자신을 그렸다.

 


중세 미술에서 정면으로 담을 수 있는 대상은 오직 ‘신’뿐이었다. 뒤러의 자화상은 자신의 모든 영역에서 신을 주체로 삼았던 중세인들이 르네상스 시대를 맞아 신을 끌어내리고 자신을 주체의 자리에 올리기 시작했음을 나타낸다. 즉, ‘근대적 개인’의 탄생이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서양 근대철학자 데카르트의 문장이 유명한 이유도 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된다. 데카르트는 ‘나’ 즉, ‘존재로서의 나’는 신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나’에 의해 존재한다고 제창하며 근대 합리주의 철학의 포문을 열었다. 이것은 중세라는 거대한 시대의 종언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속된 말로 중세를 안드로메다로 관광 보내고, 문장 자체도 간지가 철철 넘쳐흐르는 이 명제는 딱 하나 문제가 있는데, ‘틀렸다’는 거다. 데카르트는 나를, 세계를 대상화시키는 주체로 보았으나 오히려 그 주체를 세계에 속박시켰다.


 

생각은 대상을 인식하는 작용이며, 인식은 감각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우리 몸이 습득한 감각자료를 종합하고 하나의 개념으로 통일시키는 게 인식인데, 가만 보면 ‘몸’이 ‘생각’보다 선행하고 있지 않은가.


 

데카르트의 명제를 보자. ‘나는 생각한다’의 나는 ‘나는 존재한다’의 나에 선행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로 고쳐 써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칸트는 데카르트가 대상인식과정을 역행하는 우를 범했다고 비판했다.


 

여기에 데카르트의 명제를 칸트 식으로 풀어보면, 흥미로운 게 하나 더 있다. 예를 들어, 눈앞에 분필이 하나 있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 하얗다, 원기둥이다, 딱딱하다 등 분필의 다양한 특징을 수집한다. 그럼 이제 이 특징들만을 모았을 때 ‘분필’이라는 ‘하나의 인식에만 언제 어디서든 정확하게’ 다다를 수 있는가?

 


다다를 수 없다. 우리는 감각적 직관만을 보유한 존재이기에 필연적으로 대상의 본질에 다다를 수 없다. 다다르려고 하면 할수록 [대상 ‘a’로서의 분필]이 아니라 [물자체 ‘a’로서의 분필]이라는 왜곡된 결론으로 미끄러질 뿐이다. 본질은 항상 우리의 대상화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에, 데카르트의 명제 속 ‘나는 생각한다’의 나는 애초에 접근할 수 없는 대상이다.

 


다시 말해, ‘나는 생각한다’를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나는 생각한다’를 생각한다.’로 계속 미끄러지는 것이다. 생각은 대상이 있어야 이루어지는데, ‘생각하는 주체’를 대상으로 삼으면 그것은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적 개인’은 필연적으로 자기모순에 봉착하게 되고, 라캉이 환상공식에서 말한 것처럼 자기 결핍 속에 혐오에 가까운 부정만을 되풀이하며 ‘욕망의 유랑’을 반복하게 된다.

 


‘도심’에 대한 탐닉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아무리 ‘도심’을 위해 수신에 힘쓴다 하더라도 생각의 대상인 이상 대상 ‘a’로서의 도심이 아니라 물자체 ‘a’로서의 도심으로 미끄러질 뿐이다. 존재가 그리 규정되었기에, 우리는 ‘도심’에 다다를 수 없고, 그 끝은 필연적으로 왜곡된다.

 


그렇다면, 도심으로 기치로 내세운 유가적 이상국가는 어떻게 되는 건가.

 

 


# 도심의 끝은 '유교 탈레반'이다

 

국가를 성립시키는 요소는 규칙에 대한 약속 즉, 계약이다. 계약은 규칙을 제정하는 주권자와 규칙을 준수하는 인민으로 이루어지는데 문제는 누가 주권자이고 누가 인민이 되냐는 것이다.


 

이때, 루소는 인민주권을 제창했다. 즉, 인민이 주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인민은 국가에게 그들이 가진 힘, 자유, 소유 같은 모든 자연적인 힘을 양도하며 국가는 인민에게 힘을 사용할 권리, 자유로울 권리, 소유할 권리를 양도한다. 결과적으로, 국가는 인민주권을 위해 필요하지만 실상 비어 있는 형식 즉 ‘공백’이 된다.


 

그러나 인민주권에는 문제가 있다. 국가는 인민의 특수의지(정념)의 추상인 일반의지(보편적 질서)를 지니는데, 인민의 특수의지가 집단의 이해관계에 의해 왜곡되다 보니 국가의 보편적 질서는 지배계급의 착취 도구로 쓰일 수 있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칸트가 제시한 방안은 인민의 정념을 제거하고 보편적 질서로 통일시키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인과 국가를 일치시키는 것이다. 방법은 정언명령을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칸트의 정언명령에 대한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아래는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4세가 발리안에게 순례자의 길을 지켜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다.


 

좋아, 부친의 집인 이벨린으로 가게. 이젠 자네 집이네. 거기서 순례자의 길을 지켜주게. 특히 유대인과 이슬람을 보호해 주게. 예루살렘에선 모두가 환영일세. 단지 이득이 되어서가 아니라 그게 옳기 때문이야.



말로만 저러는 건지 진심으로 저러는 건지 알 길은 없다만, 이처럼 정언명령은 언제나 그게 옳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키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 따라 정언명령의 준수여부를 정하는 건 정념이 있다는 것이고 이는 결국 국가를 혼란케 하니, 정언명령만이 올바른 국가 운영 원리다. 공자가 예를 기반으로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이상국가를 꿈꾼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정언명령이라는 게 궁극적으론 다다를 수 없는 것이며, 정언명령을 체화했다고 참칭하는 이들에겐 다른 이들이 정념을 제거하지 못한 이들로 간주되어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여기에 근접한 이들이 바로 단두대 공포정치로 유명한 로베스피에르의 자코뱅당이다. 이들은 루이 16세가 밀려난 빈자리에 앉아 국가와 일체화한 인물들이었고, 다른 이들을 교정하기 위해 툭하면 단두대로 올려 목을 날려댔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와 다르니까

 


대상화로 얻어진 결론들은 죄다 왜곡된 것들뿐이니 생각의 주체인 ‘나’가 가지는 혐오에 가까운 부정은 필연이다. 따라서 로베스피에르 등이 선민의식에 찌든 나머지, 이상을 위한 수단으로써 단두대가 아니라 수단을 위한 수단으로써 단두대를 쓰는 거악(巨惡)으로 전락하는 것 또한 결국 필연이다


 

유가사상은 다를까. 당장 조선시대 사문난적이라는 좋은 역사적 사례가 있지 않은가. 공자가 꿈꾸는 세상의 끝은 ‘예’로 무장한 동양의 로베스피에르들이다. '사랑‘의 회초리라는 신박한 네이밍의 처벌도구처럼 '인의예지 목 뎅강'이라 처형도구가 곁들여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 덧없는 그래서 덧나게


유가적 이상국가의 끝은 왜곡된 선민의식에 기초한 공포정치다. 이는 유가사상의 흠결이라기보단 인간의 존재양식이 가지는 한계 때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대상의 본질을 궁리하기 위한 생각의 대상화가 아이러니하게 대상의 본질에서 미끄러지게 하기 때문이다.

 


신독(愼獨)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개인의 마음수양을 위해선 괜찮은 지침이다. 다만,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수준에 이른다면 그것은 제재되어야 한다. 로베스피에르식 유교 탈레반들이 창궐하는 것보단 라캉식 욕망의 유랑자들이 낫지 않겠는가.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
이름 지을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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