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상담사 (genetic counselor)"라는 직업을 바라보고 달려온 지 벌써 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시간 한 번 참 빠르다.
대학교 4학년, 학교 강의를 통해 알게 된 이 직업에 너무나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고, 당시 한국에는 안타깝게도 유전상담 시스템이 없었기에 미국 유학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유학 준비를 하고, 유학길에 오르고, 치열하게 공부하고,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쉼 없이 달려오다 보니 어느덧 9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러버렸다는 것이 참 새삼스레 신기하다. 생소한 분야를 공부한다고 했을 때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신 분들이 더 많긴 했지만, 더러는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하고 사기를 꺾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두 경우 다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마음에 상처를 받고 사기가 꺾였을 때는 잡초처럼 이를 악물고 일어나 두고 보자 하는 마음으로 힘을 길러야겠다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유전상담. 뭐가 그렇게 매력적이었던 것일까.
유전상담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얘기겠지만, 나도 유전학이 좋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유전학 공부를 하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바로 생명의 신비로움이었다. 우리는 건강하게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혹은 나의 소중한 사람이 아프게 되면 그제야 건강한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 몸의 모든 장기, 세포, 뉴런, 호르몬, 효소 등이 다 같이 조화를 이루어서 움직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해 보이지만 이상하리만큼 신비로운 일이다. 우리 몸은 감사하게도 많은 실수들을 허용하고 감내할 수 있게 만들어졌지만, DNA에 있는 오타 한 개로 인해 몸에 꼭 필요한 무엇인가가 아예 만들어지지 못하거나, 너무 많이 만들어지거나, 이상한 형태로 만들어져 유전질환에 걸리기도 한다.
유전상담을 공부하고 유전상담사로서 일을 하면서 매일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지금 내가 그리고 나의 가족이, 친구들이 건강한 것이 참 감사하다는 것이다. 감사한 마음이 들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내 앞에 앉아 있는 환자의 상황이 내 앞에 닥치면 나는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어 무섭기도 하다. 이런 복잡한 마음이 드는 날 정말 소위 말하는 "윗길"을 걷고 계신 분들을 만나기라도 하면 내 마음은 더 복잡해진다. 유전질환을 가지고 있는 아이를 열심히 키워가고 계신 분들, 유전질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원하는 꿈을 펼쳐나가시는 분들, 특정 유전질환의 환우모임을 이끌어나가시는 분들, 특정 유전질환 연구비를 모으기 위해 캠페인을 펼치시는 분들, 치료제를 찾기 위해 해외도 마다하지 않고 다녀오시는 분들 등 뭔가 나는 못할 것 같은 일들을 척척 해나가시는 분들을 만나는 날에는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유전상담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업을 선택해서 하고 있지만, 이런 다양한 분들 덕에 인생을 이해하는 깊이가 조금은 깊어진 것 같아 직업 선택 한 번 참 잘했다 싶다.
그렇다면 이 유전상담이라는 것이 뭐길래 얘가 이러나 싶으신 분들을 위해 유전상담이 무엇인지에 대해 길지 않게 설명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유전질환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다운증후군을 떠올리게 된다. 그 이유는 가장 흔한 유전질환 중에 하나이기도 하고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전질환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보지 않고 살다가 임신을 했거나, 암에 걸렸거나, 아이의 발달이 늦거나, 학교 청력검사에서 재검사 요청을 받게 된다거나, 건강검진을 통해 이상을 발견하는 등의 상황을 통해 유전질환과 그 가능성들에 대해 접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유전상담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2006년 Journal of Genetic Counseling에 발표된 Robert Resta의 논문에 의하면 유전상담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영어 원본>
Genetic counseling is the process of helping people understand and adapt to the medical, psychological, and familial implications of genetic contributions to disease. This process integrates the following:
Interpretation of family and medical histories to assess the chance of disease occurrence or recurrence.
Education about inheritance, testing, management, prevention, resources, and research.
Counseling to promote informed choices and adaptation to the risk or condition.
<한국어 번역본>
유전상담이란, 사람들이 어떤 질환의 유전성에 대해 의학적, 심리학적, 가족력과 관련한 모든 것들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가족력과 개인의 의학적 히스토리들을 바탕으로 질환이 발생할 가능성이나 재발할 가능성을 계산하고 분석하여 알려주는 것.
유전 과정, 검사법, 질환의 관리, 예방, 질환에 대한 자료 및 연구된 것들에 대해 알려주는 것.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질환의 발생 가능성이나 질환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유전상담은 환자 혹은 피상담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서비스가 아니다. 유전상담은 환자가 알기 쉽게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고 그 안에서 환자가 본인과 가족들의 상황에 가장 알맞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주는 서비스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심리학적인 상담도 병행하게 된다. 유전상담은 한 번으로 끝나기도 하지만 몇십 년 동안 혹은 세대를 거쳐 지속되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유전상담 시스템이 도입되고 발달하기 시작했다. 다른 나라들보다 출발이 빨랐기 때문에 시스템 구축이나 상담 기법들이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점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지금은 의학유전학 서비스가 가능한 대학병원뿐만 아니라 중소병원, 대학교, 정부기관, 유전자 검사기관, 보험회사 등에서 유전상담사들의 역할이 점점 더 중요시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위에서 살펴본 유전상담의 정의가 말해주는 것 외에도 지금은 더 다양하고 폭넓은 일들을 유전상담사들이 감당하게 되었다.
유전상담이 각 분야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어떤 경우에 유전상담이 필요한지 간단하게 알아보면:
임신 중 태아에게 특정 유전질환에 대한 가능성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가족력으로 인한 유전자 검사가 필요한 경우, 초음파로 태아에게 이상소견이 발견되었을 때 등 유전상담을 통해 어떤 검사가 가장 적합한지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안내하게 된다. 산전 진단으로 가능한 기본적인 검사들에는 기형아 검사, 융모막 채취법, 양수검사 등이 있다. 시험관 아기를 하게 되는 경우, 유전상담을 통해 각 부모의 가족력을 파악하고 필요한 경우 수정란 검사에 필요한 상담을 하기도 한다.
안젤리나 졸리가 BRCA 유전자 검사를 통해 유방 절제술을 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유전성 암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진 바 있다. 이른 나이에 암이 발병되거나, 암 가족력이 있는 경우, 매우 드문 종류의 암이 발병한 경우, 암이 양측성으로 나타나는 경우, 여러 종류의 암이 발병하는 경우 등의 상황에서 유전상담을 통해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알맞은 검사법과 치료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소개하고 의사결정을 돕게 된다.
소아의 경우, 자폐나 발달장애 등의 소견을 보이는 경우 의학유전학적 소견을 들어보기 위해 내원하게 된다. 자폐나 발달장애 외에도 청력 이상, 시력 이상, 간질, 발작, 심장질환, 뇌질환, 신장이상, 정신질환 소견, 호르몬 이상, 특정 효소 결핍 등 다양한 증상들로 내원을 하게 된다. 소아가 가지고 있는 증상에 따라 다양한 유전자 검사가 가능하고 유전상담을 통해 환자에게 가장 알맞은 검사들을 소개하고 의사결정 과정을 돕게 된다. 병원 시스템에 따라 유전상담사들은 신경의학과, 심장의학과, 다운증후군 클리닉, 22q 클리닉, 발달장애 클리닉 등 다양한 진료과에서 일을 하게 된다.
소아 시기에 발병되지 않고 성인기에 발병되는 유전질환들도 있다. 대표적으로는 헌팅턴병과 같은 퇴행성 신경질환을 들 수 있는데, 이런 질환들의 경우 다양한 윤리적인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유전상담뿐만 아니라 병원의 윤리위원회, 정신의학과, 신경의학과, 사회복지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진을 진행하게 된다.
10여 년 전부터 새롭게 등장한 유전상담의 한 분야이다. 다양한 유전자 검사들이 가능해지면서 그만큼 다양한 유전자 검사 회사들이 생겨나고 있다. 유전상담사들의 역할은 각 병원에서 들어오는 검사들이 올바르게 오더 된 것인지 확인하고, 검사 동의서 및 검사 결과지 등을 작성하고, 검사를 오더 하는 병원의 의료진들의 질의응답에 응하며, 연구 과정을 이끌기도 한다.
유전상담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대중들이나 의료진들에게 유전상담 분야를 알리기 위해 강연을 하기도 한다. 미국의 경우 유전상담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공급이 한없이 모자란 실정이어서 유전상담사들이 열심히 고등학교, 대학교 등을 방문하여 학생들이 유전상담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강연을 진행한다. 또한, 매년 열리는 유전상담 학회에서 학회가 열리는 지역의 고등학교, 대학교 학생들을 초청하여 다양한 이벤트들을 제공하기도 한다.
위에서 소개한 분야 외에도 더 다양한 분야에서 유전상담사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법적인, 정치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어서 환자들이 유전상담 서비스를 자유롭게 받아볼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길!
유전학 분야에서 일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매우 드문 희귀 질환을 가진 환자들을 보게 되고 말도 안 된다 싶은 극히 드문 케이스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그래서 나에게 1%라는 확률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유전상담을 하면 할수록 환자를 만나 상담을 하는 것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 극히 드물게 일어나는 일들을 나는 남들보다 자주 접하게 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 앞에 앉아있는 환자의 입장이 아니라 나의 주관과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자꾸 상황을 판단하려 하는 경우들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유전상담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러 번 강의도 하고 글을 쓸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참 새롭게 느껴진다. 어느 분야든지 기본에 충실한 것이 중요하듯이 다시 한번 기본에 충실하자 다짐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뭔가 일기스럽게 마무리되어가는 느낌이지만... 이 글이 유전상담사를 꿈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기를.
4월임에도 겨울인 뉴욕에서,
Arang Kim, MS, CGC
Certified Genetic Counsel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