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한 산부인과 유전상담사
초음파 화면을 통해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태아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안도감을 느꼈다.
몇 달 전 경험했던 유산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감사하게도 새 생명이 금방 찾아와 주었다.
기쁨, 감사, 놀라움, 환희 등의 단어들로는 표현이 안될 만큼 들뜬 마음과 함께 불안한 마음도 찾아왔다.
혹시 또다시 유산이 되진 않을까.
혹시 태아에게 이상이 있지는 않을까.
안도감도 잠시.
본격적인 걱정과 이유 모를 불안함이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그랬다.
아이가 생기는 순간부터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날이 단 하루도 없을 거라고.
아이가 태어나 벌써 돌이 지났지만
이 말처럼 공감되는 말도 없는 것 같다.
유산을 했던 경험도 그 이유 모를 불안함에 한몫했던 것 같다.
나에게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환자들에게 유산의 횟수와 이유만 물어봤지 그 이면에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이야기들을 나는 미처 신경 쓸 겨를도, 그럴 깜냥도 없었다.
하지만 유산이라는 경험으로 이해의 폭이 예전보다 조금 넓어졌고, 그와 동시에 조금 더 많은 걱정과 불안도 한 보따리 짊어지게 되었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그래서 미신 따위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아온 환경, 주위 사람들, TV, 인터넷 등을 통해 알게 모르게 미신 관련 정보들에 노출되곤 한다. 알게 모르게 듣는 내용들이 그래도 이왕이면 좋은 내용이길 바라는 건 당연한 이야기 일터.
많은 분들이 태몽을 꿔 주셨다. 우리 이모는 돈 잘 버는 똑똑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해석이 담긴 태몽을 세 번이나 꿔주셨다고 한다. 우리 시어머니도 좋은 꿈을 꿔주셨는데, 이번에는 건강한 아들일 것이라는 해석이 담긴 태몽이었다고 한다.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지을 때도, 어른들의 성화에 태어난 날짜 시간 따져가며 이름 뜻풀이까지 해서 겨우 짓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 사실 속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내 자식인데 내 마음대로 이름도 짓지 못하게 하는 현실이 싫기도 했다. 하지만 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이렇게 믿고 싶지 않았던 미신적인 것들이 아이를 낳고, 키우고 있는 지금 조금은 안도감과 위로를 전해주는 것 같다.
아이가 처음에 태어나서 호흡이 안되어 잠시 신생아 중환자실에 갔었는데, 그때 난 “우리 아기는 커서 돈 잘 버는 똑똑한 아들이 될 것이라고 했어. 그러려면 건강하게 잘 큰다는 소리일 거야. 호흡 잘할 거야. 괜찮아.” 이런 마음으로 날 위로하며 다독였던 것 같다. 아이가 감기에 걸렸을 때, 아팠을 때, 넘어져서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을 때 등 아이를 키우며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일들도 다 그런 생각으로 버티며 지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꼭 돈을 잘 벌고, 똑똑한 아들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돈 잘 벌고 똑똑할 거야”라는 말의 전제가 “건강”이라고 생각하며 위로를 얻었다. 물론, 아이가 커서 학교에 가는 시기가 오면 똑똑하길 바랄 것이고, 돈을 버는 나이가 되면 돈을 잘 벌길 바라겠지만 ;)
미국 병원에서 일하면서 신기했던 것은, 이민자의 나라인 만큼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문화, 미신 등을 접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문화들이 모여 서로의 문화에 영향을 주고, 한 문화에서는 쓰이지 않던 미신들이 자연스럽게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전해져 들어가 원래 형태 그대로 혹은 변형된 형태로 쓰이기도 한다. 그래서 미국은 뚜렷한 색깔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들이 인정받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임신했을 때 배가 많이 나온 상태로 산부인과에서 일을 하다 보니 산모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받게 됐었다. 그중 하나가 아들이냐 딸이냐 하는 것이었는데, 당시 아들을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나는 아들이라고 말하며 자연스럽게 한국에서는 배가 옆까지 둥글게 나오면 아들이라고 한다는데 그게 정말 맞는 말인 것 같다고 얘기하면, 신기하게도 어떤 환자들은 자기가 온 문화권에서는 이를 반대로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옆까지 둥글게 배가 나오면 딸이고 배가 앞으로 뾰족하게 나오면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에게 정말 아들이 확실하냐고 묻기도 했었다. 물론 미신은 미신이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그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같은 주제를 놓고 반대의 해석이 나오는 것을 보면 사람들의 생각이 비슷하면서도 다를 수 있구나 싶었다.
(참고로, 배 모양과 성별은 전혀 관계가 없다. 그냥 태아가 어떻게 자리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 뿐.)
영어 표현 중에 “knock on wood”라는 말이 있다. 이는 나쁜 운, 안 좋은 결과, 징크스 등을 막기 위해 사용되는데, 말로 “knock on wood”라고 말하기도 하고, 아니면 정말 말 그대로 나무를 (혹은 나무로 된 가구나 나무로 된 소재 아무거나) 두드리기도 한다 (문을 노크할 때처럼 손가락 관절로). 예를 들면, 약으로 간질(seizure)이 잘 조절되고 있는 환자에게 내가 “약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라고 말했을 때 그 환자가 나무로 된 책상을 두드리며 “knock on wood”라고 말했었다. 내가 “약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라고 좋은 말을 했지만 이게 징크스가 되어서 안 좋은 결과로 변질될 수도 있는 것을 막기 위해 한 행동과 말이다.
“God bless you” 혹은 “bless you”라고 말하는 것도 미국 사람들이 많이 쓰는 표현 중 하나다. 이는 누군가 재채기를 했을 때 그 사람에게 해주는 말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냐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들이 있는데, 가장 그럴듯했던 두 가지는 - 1) 예전 유럽에서는 재채기를 하는 것이 전염병의 첫 증상일 수 있어서 이를 막고자 “God bless you”라고 말하면 신이 막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과; 2) 고대에는 사람들이 재채기를 하면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하여 신께 이를 막아달라고 하는 의미에서 “God bless you”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유래가 어떻든지 지금은 하나의 예의처럼 자리 잡았다. 누군가 재채기를 하면 “(God) bless you”라고 말해주고, 재채기를 한 사람은 그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물론 지금 COVID-19이 판치는 이때에 재채기를 하면 째려봄만 당하지만. 재채기는 옷소매로 가리고 합시다 :)
사람들이 이런 미신들이 정말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믿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고 마음의 평안을 찾고자 하는 것 아닐까.
유전상담사란 직업 상 ‘아프다’의 정의가 나에게는 매우 극단적일 수밖에 없다.
전 세계에 1명 혹은 치료제도 없는 희귀 질환 등 아주 드문 경우들만 봐왔던 터라, 그 희귀하다는 것이 나에게는 꽤 자주 일어나는 일이 되어 버렸다. “만 명 중 한 명 꼴로 나타나니 걱정하지 마세요. 0%나 다름없어요”라는 말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그 만 명 중 한 명을 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미신을 주제로 글을 쓰면서 환자들의 마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건강한 아들을 낳았음에도 하루하루 걱정과 불안을 안고 사는데, 유전질환을 가지고 있는 아이를 키우시는 부모님들의 마음은 어떨까. COVID-19 때문에 6개월도 넘게 기다려온 유전학과 예약도 취소해야만 하는 환자들과 그 부모님들의 마음은 어떨까. 유전질환 외에도 다양한 질환들로 고통받고 있는 가족들의 마음은 어떨까. 조금이라도 희망을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미신을 믿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람들에게 ‘아프다’의 정의가 나에게만큼 극단적이지 않길.
이 글을 쓰기까지 일 년이나 걸리다니요...
참...
역시 아이를 키우면서 뭘 한다는 게 이렇게나 힘들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작가의 서랍에 넣어두었던 이 글을 지금이라도 이렇게 완성할 수 있어서 기뻐요.
집콕이 하나의 삶의 방식이 되어버린 지금.
에너지 넘치는 아이들과 씨름하느라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시는
이 세상 모든 엄마들 (아빠들 할머니들 할아버지들 이모들 삼촌들) 파이팅입니다!
한 달 안에 다음 글 발행을 목표로 해보며,
COVID-19 때문에 집콕하고 있는 3월 말, 집에서.
Arang Kim, MS, CGC
Certified Genetic Counsel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