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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뀰사마 Jun 23. 2020

호주에서의 삶의 단순기록

그간 이민오며 겪은 수년간을 되뇌며

-2019년 2월에 미디움에 게시한 글을 브런치로 이전했습니다.


- 약간 비관적인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본 글이 자신의 현재 상황에 찬물을 붓거나 비전이나 식견과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을 주의하시고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서 귀중한 시간을 아끼시길 권합니다.


미디엄을 처음 열어보았고 뭘 쓸까 하다가 그간 어디에도 적지 않았던 속내들을 풀어보고자 한다. 딱히 타인의 열람을 위해서라기 보단 시간이 흐를수록 당시에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이 흐려지는 게 아까워서이다. 호주에서의 삶도 어느새 수년이 흘렀고 이 사회에 안절부절못하던 나날이 어느새 기억에 흐린 과거가 되었으니 인간의 기억력이란 참 내가 생각해도 변화무쌍이다.


왜 많고 많은 나라 중에 호주에 이민을 온 걸까? 사실 딱히 분명한 동기는 없었다. 사실 나는 호주로 영구 이민을 오기 전에 캐나다 워킹 비자도 따놓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비자, 쓰지도 못하고 휴지조각이 되었다. 많이 아쉽긴 하다. 그래도 힘들게 딴 건데 발이라도 내딛지. 맞는 소리이다. 이때 안 간 거 지금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몇 개월 채우지 못하고 들어올지라도 이민국 도장이라도 여권에 한번 쾅 찍었어야 했다. 나는 지금도 그 당시에도 그 이전에도 여전히 겁이 많은 쫄보이다.


무엇이 그렇게 겁났을까? 가족관계가 초전박살이라 한국이든 어디든 실패하면 디딜 곳 없다는 불안감? 캐나다 입국하기 전에 미리 취업조사를 하고 다녔는데 캐나다 출신이 아니고서는 아예 이력서를 들여다보지도 않던 캐나디안 리쿠르터들을 향한 실망감? 컴퓨터&미디어 공학 학사 이수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호주 영주권 준비도 하던 당시 상황? 세이빙이 언제든지 날아갈 수도 있다는 공포? 아마 모든 게 다 이유일 듯. 가장 큰 이유는 친가든 어디든 비빌 곳 없는 동양인 외국인 여성이 홀로 당차게 처음부터 뚫고 나가기엔 호주에서 워홀로 지내며 겪은 생활이 나에게 센 빨간약을 쥐어준 것일 게다.


시드니에서 웹디자이너/개발자 포지션을 잡기 전에 백수로 렌트비에 전전긍긍하며 2달간 카페와 공사장에서 표지판 알바를 했던 경험들은 생각보다 스트레스였고 그걸 춥디 추운 캐나다에서 다시 겪을 생각 하니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겁 없이 다시 도전하기엔 나는 너무 많은 걸 알아버린 듯하다. 본디 당차게 뭘 쥐는 사람의 시작은 아무것도 모르고 겁 없이 일단 디디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 초심의 용기를 나는 호주 워홀에서 이미 다 소진해버렸다. 그 텅 비어버린 에너지를 다시 채우기엔 몇 년의 세월이 흘러고서였다. 그마저도 영주권 과정에서 다 탈탈 털려버렸다. 그 이후에도 삶은 여전히 변화는 없었다.


시드니에서 IT 분야는 더 이상 안정된 고용이 보장된 게 아니었다. 수많은 부트캠프들과 매번 떴다가 사라지는 스타트업들이 만들어낸 바이브로 유입된 인력 influx가 엄청나서 14년 이전과 그 이후의 분위기가 다르다. 여전히 나는 여러 에이전시를 부평초처럼 떠돌며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영주권을 딴 이후에 진정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이 더 밀려온다는 나보다 이전에 영주권을 딴 이들의 말을 되새겨보면 그 말이 맞는 거 같다.


처음 프런트엔드 개발에 진입할 때는 너무 재미있었다. 그땐 앵귤러가 갓 1v론칭되었을 때이고 그런트 같은 Task Runner와 SCSS 같은 CSS 프리 프로세싱 구조만 잘 짜도 충분했다. 이런저런 라이브러리를 숙달하는 것보단 어떤 식으로 마크업 스트럭쳐를 짜고 깔끔하게 자바스크립트로 DOM을 연결하면서 시각적으로, 그리고 여러 사람들에게 가장 어프로칭할 수 있는 Accessability 가 중시되던 때였다. 요리조리 정돈된 CSS 코딩과 인터랙션을 덧붙이는 자바스크립트, 스트럭쳐에 충실한 html마크업. 이 디스플린에 나는 동의하고 지금도 이런 베이직이 가장 프론트엔더로서 중요한 스킬이라 생각한다.


요즘은 특정 스킬 셋을 따라가지 않으면 바로 루저 취급당하는 이상한 바이브(특히 이 트렌드를 조장한 페이스북과 구글-_-)에 실증이 느낀다. UI마크업에 특출 난 개발자가 JS만 할 줄 아는 SPA앱 개발자에게 무시당한다던가 요런 클래스 전쟁이 깔린 업계 분위기에 숨이 턱턱 막힐 정도. 특히 모든 UI의 구성요소를 JS에 다 욱여넣는 방식을 Forcing 하는 현재 트렌드는 도저히 동의도 못하겠고 말이지. 심지어 번들러 툴링도 Parcel이나 Webpack이나 그저 취향대로 선택할 뿐인데 웹팩 잘 안 쓴다 하면 팀에 아예 껴주지 않는 것이라던가.. 언제부터 개발자의 능력이 특정 툴과 라이브러리에 끌려가게 된 건지 모르겠다.


요즘은 내가 과연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막말로 경영, 운영, 마케팅, 디자인은 호주 헤드쿼터에 두고 프로덕션은 홍콩이나 필리핀으로 외주 줘버리는 경우도 엄청 흔해졌다. STEM 특히 IT는 탈조선 및 이민자로서 사회에 유입하기엔 쉬울지 몰라도 이민 생활에 슬슬 적응하고 영주권 딴 후 빅픽쳐를 구상하기 시작하면 현타가 밀려오는 분야가 아닐까 내심 생각하고 있다. 본디 남아 있는 자는 목소리가 크고 떠난 자는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게 현실이니까.


처음 호주 살면서 3년 반 동안은 오로지 영주권만 바라보고 이 악물고 살아왔다. 그 여파가 이제야 오는 걸까. 한 가지 목표가 해결되고 나니 갑자기 정신머리가 느슨해진 건지 심한 우울증 증상이 훅 도졌다. 스트레스와 울화가 그간 쌓여온 게 한꺼번에 터진 거겠지. 한국에서도 가지 않았던 정신과를 호주에서 다니고 있다. 다행히 내가 가진 사보험 플랜은 무조건 65% 맥시멈 한도 이내에 보장이라 신나게 hicap 페이하고 있다. 상담 선생님은 미국에서 이주 온 프렌치+파키스탄계 호주인인데 부모님은 키위인 신기한 국적을 지닌 사람이다.. 그러니까.. 미국 캘리에서 살다가 호주로 다시 이민 와서 시민권 신청한 케이스.. 뭐 이렇게 생각해도 될까나. 이민 한 번도 난 힘들었는데 이 분은 세 번이나 했네. 허이고.


현 상담 선생님은 완벽한 건 아니지만 뭐 딱히 크게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다니고 있다. 근데 간혹 이야기하다 보면 넘 울 엄마같이 잔소리하는 경우가 있다. 엄마와 애증 어린 관계 때문에 내 트라우마가 커진 게 상담의 시초였는데 상담 선생님이 넘 내 모친과 유사성이 짙어서 가끔 뜨악스럽다. 애초에 내가 탈조를 처음 시도했던 계기가 가족관계가 가장 큰 이유였는데 말입니다… 파키스탄계가 한국계랑 정서 코어가 비슷하다더니 이런 건가; 뭐 가끔은 선생님 말만 듣다가 기빨려 오는 현자 타임을 맞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주시니까. 이 분과의 상담 썰은 다른 포스팅에서 풀기로.


여하튼 요즘은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이 깊어가고 있다. 한국인도, 호주인도 아닌 외계인. 한국 국적을 버리고 호주 국적을 딴다고 해도 여권만 호주 여권이지 이 사회는 여전히 나를 외국인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인으로 살기엔 이제 한국사회와 너무 동떨어져버렸다. 어느 집단에서도 유대감을 느끼기가 너무 어려워졌다.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젠더에서 유대감을 찾자니 그 안에서 백인|비백인 그리고 영어 모국어자|비영어 모국어자의 장벽이 있다. 정치 성향이나 취미가 비슷한 사람들을 찾아 이야기를 해도 다 각자 자기들만의 그룹이 있고 나는 외지인일 뿐이다. 밋업을 나가면 나갈수록 오뚝 히 떨어져 구석에 세워둔 보릿단과 동화되는 느낌은 더 심해지더라고. 내 동거인과 그의 가족들은 여전히 내 영어와 사회 스킬을 꼬집고 있는데 글쎄.. 그렇다면 나는 뭐 백날 노력해도 어차피 인사이더는 되지 못할 거 같은데?


아 김밥천국 떡볶이와 순대를 안주로 안동소주나 소다수에 말아서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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