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9월 27일 가로수길 데이트

by 신하연

남자친구와 신사역에서 만났다. 가로수길로 가는 8번출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남자친구가 보였다. 황토색 니트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손을 흔들었다. 어깨는 넓고 얼굴은 작았다. 운동을 했지만 적당히 마른 체구여서 니트가 몸에 잘 맞았다. 가을하면 떠오르는 색상의 옷을 입고, 분위기도 다정하면서 온화했다. 남자친구는 나에게 편지를 꺼내 주었다. 실로 앞부분을 감아서 묶을 수 있게 되어 있는 흰 편지봉투였다. 우리가 200일이 되어서 준비해준 것이었다. 남자친구가 그 편지를 꺼낼 때 놀랍고 감동을 받았다. 사실 나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준비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이 상대적으로 무심하게 느껴지는 반면, 남자친구가 더 세심하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나 정말 사랑받고 있구나, 하는 걸 느꼈다.

그리고 점점 남자친구가 해주는 선물로 내 일상이 채워지고 있다. 커플링을 항상 차고 다니면서 본다. 100일 선물로 받은 턴테이블을 가끔 분위기를 내고 싶을 때 듣기도 한다. 턴테이블로 엘피를 들으면 아날로그로 긁어내는 거라 더 소리가 부드럽고 생생하다. 직접 연주하는 걸 듣는 것 같기도 하다. 점점이 끊어지고 선명한 디지털 음악보다 아날로그는 소리를 어루만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렇게 내가 소중하게 꺼내 듣는 턴테이블도 있고, 200일 선물로 목걸이도 받았다.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 디디에두보로 받았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고른 것인데 착용해 보니, 나 자신이 우아해 보이고 얼굴형과도 잘 어울렸다. 내가 착용해본 목걸이 중 가장 비싼 것인데, 가격이 높으면 이렇게 사람이 더 고급스러워 보이기도 하는구나는 걸 느꼈다.

내가 감동받은 채로 고리에 감겨 있는 실을 풀지 못하자 남자친구가 풀어 주었다. 지금 바로 읽어봐도 되냐고 물었는데 이따 읽으라고 했다. 내가 그래도 읽고싶다고 하니까 읽어도 된다고 했다. 평상시에도 나를 많이 생각하고, 나를 생각하면서 힘을 얻는다는 게 느껴졌다. 내가 남자친구에게 힘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뿌듯했다. 항상 철없게 굴어서 힘들게 하는 줄 알았는데, 남자친구도 나에게 의지를 하는지도 모른다.

가로수길은 예전보다 훨씬 한산했고 가게도 많이 빠져 있었다. 먼저 폴로 랄프로렌 매장을 구경했다. 내가 좋아하는, 다양한 색깔의 옷이 많아서 좋았다. 미국 서부에서 입을 만한 자켓도 보였고, 따뜻한 크리스마스나 겨울 느낌의 옷도 보았다. 가방 구경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90만원이나 하는 폴로 가방을 들 여자는 없을 거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 다음에 우리는 에이랜드로 갔다. 남자친구가 옷을 네벌 골랐는데, 입어보더니 다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깔끔한 느낌이 아니어서, 새로운 스타일이기는 해도 어울리지 않았나보다.


근처에 다행히 cos 매장이 있는 걸 발견했다. 저번에 남자친구 생일 때도 코스에서 옷을 사줬는데 굉장히 잘 어울리고 보기 좋았다. 들어갈 때부터 좋은 향이 나고, 깔끔하게 옷이 진열되어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남자친구도 훨씬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상의 세 벌을 골라서 입어보는 동안, 나는 방금 남자친구가 마음에 들어했지만 사이즈가 없어서 입어보지 못한 자켓의 사이즈를 찾았다. 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직원분이 들고 계시면 힘드니까 걸어드리겠다고 했다. 전달해 드리겠다고도 했다. 그리고 남자친구가 나왔을 때, 우리는 L사이즈를 골랐는데, 좀 크게 나와서 이 옷은 M사이즈도 추천드린다는 말을 했다. 남자친구는 입어보더니, 앙고라 니트와 방금 입은 자켓 M을 골랐다. 선물로 사주고, 옷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일식당 우와로 갔다. 남자친구도 바빴을 텐데 가로수길에서 맛있는 식당을 여럿 찾아보고 나에게 고르게 해서 내가 고른 식당이 우와였다. 야끼소바와 오꼬노미야끼를 파는 곳이었다. 살짝 어두워서 분위기가 좋았고, 직원분이 굉장히 세련되고 친절했다. 구체적으로 주문하는 방법과 먹는 방법을 설명해주셨는데, 전문적인 분위기가 났다.

야끼소바가 나와서 먹어봤는데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면이 얇은데 겉은 은근히 바삭하고 속은 쫀득해서 입에 딱 감기는 맛이 아주 좋았다. 소스도 어떻게 만든 건지 적당히 짭쪼름하고 감칠맛이 나서 먹기 좋았다. 면과 채소가 맛있게 볶아져서 먹을 때마다 감탄했다. 같이 섞여 나온 돼지고기도 노릇노릇 잘 익어 있었다.

그 다음에 오꼬노미야끼가 나왔는데 밀가루를 쓰지 않고 양배추로만 만들어졌다. 그래서 가볍고 몸에 좋게 느껴졌다. 찐득한 밀가루가 들어간 오꼬노미야끼가 살짝 그립기는 했다. 그래도 이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별미였다. 나는 많이 먹지 않고 적당히 먹었다.

우리는 나와서 오는 길에 본 도쿄 수플레로 가려고 했는데, 가는 길에 에그타르트 집을 보아서 들어가 보았다. 클래식 에그타르트 두 개를 주문해서 먹었는데, 이것도 놀랍도록 맛이 좋았다. 포르투갈식이라 겉부분의 페스츄리가 바삭하고 잘게 부서졌으며, 그 안에 들어 있는 노른자 커스터드가 부드럽게 씹히면서 입안에서 녹았다. 아주 달콤했고 페스츄리랑 쉽게 어우러졌다. 이걸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가족들 줄 것까지 박스로 샀다.

그러고 도쿄 수플레로 갔는데 남자친구가 크렘브륄레 수플레를 골랐다. 우리는 항상 서울대입구 근처에 있는 오후의 과일에 가서 수플레를 먹었는데, 이곳 도쿄 수플레는 또 다른 신세계였다. 오후의 과일 것은 부드럽고 폭폭하게 녹는 맛이 있었는데, 도쿄 수플레 것은 더 찰지고 쫀득했다. 부드러운데도 커스터드 크림처럼 마지막까지 입안에 감기는 맛이 있었다. 크림 덩어리를 먹는 것 같기도 했는데, 크림보다 훨씬 덜 불편하게 달콤하고 쫀득했다. 윗면에 크렘 브륄레 코팅이 되어 있어서 아주 살짝 바삭하게 부서지는데, 그곳의 캬라멜 부분이 굉장히 달았다. 놀라운 맛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영화 아멜리에의 크렘브륄레 장면이 아주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해서 보여주려고 했는데 유튜브에서 그 장면을 찾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색이 다양한 아멜리에 장면을 보여 주어서 좋았다.

오늘 데이트도 굉장히 재미있었다. 오랜만에 데이트하는 것이라 더 좋았다. 설레기도 하고 너무 좋은 것들을 많이 해서 호사스럽다고 느껴졌다. 다음 번에는 더 재미있는 대화를 많이 하고 싶다. 남자친구 의견도 듣고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면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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