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0.1 일기: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포기하나

by 신하연

아침에 일찍 일어났는데 머리가 맑은 편이었다.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다가 산책을 하고 싶어서 밖으로 나갔다. 산으로 가서 절이 있는 곳까지 올라갈 생각으로 걸어갔다. 산을 걸으면서 내가 참 이 땅을 사랑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땅을 팔라는 소리에, 웃으면서 저는 토지에 대한 집착이 강합니다 라고 대답하며 단호하게 거절한 소설 "토지"의 최서희처럼 나도 이 동네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집착보다는 사랑이었다. 내가 거의 평생을 살아온 이 동네 구석 구석을 사랑한다. 나에게 고향이 있다면 이 동네 뿐이었다. 태어난 독일 땅보다도, 잠깐 살았던 기억이 있는 부천보다도, 내가 어릴 때 앞에 앵두나무와 감나무, 대추나무가 있었던 빌라를 가장 사랑한다. 그 빌라가 아파트로 바뀌고 그 아파트에서 살다가 다른 빌라로 이사왔다.

나는 이 동네에 많은 추억을 갖고 있고, 동네는 큰 변화 없이 내 어린 시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내가 이 곳을 떠나는 날이 올까? 어제 남자친구와 통화를 하고 밤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쩌면 떠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친구를 사랑해서, 나중에 때가 되면 내가 따라가는 게 맞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시 오늘 수업을 하면서 나는 내 직장에 애정이 있고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또 나를 가리고, 이 사랑하는 땅이 나를 붙잡고 있다. 하나를 얻고 싶으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게 서글프다.

절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힘이 들어서 중턱에서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내가 지금보다 훨씬 무거운 몸으로, 12킬로의 가방을 메고 어떻게 하루종일 산티아고 길에서 걸었지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 무게 없이 조금만 산을 올라도 힘든데 어떻게 그렇게 굳세고 강인하게 걸어다녔을까. 체력을 늘려 놓은 것도 아니었는데. 작년에는 또 어떻게 마라톤을 하고 20, 30, 40킬로를 뛰어 다녔나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아무래도 달리는 건 도파민 분비가 활발하게 되어서 또 미친 것처럼 달릴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가장 최근에 아무 준비없이 뛴 게 8월 15일 8.15킬로 였으니, 느리게 뛰면 뛸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평생 다시 평균 430 페이스와 일시적 3분대 속도를 다시 만들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돌아와서 요가에 갔다. 요즘 수련하는 게 재미있다. 명상이 잘 되어서 더 그런 것 같다. 몸에 집중하고 쉬는 게 좋다. 내 몸을 이완시키고 숨이 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고요해지고, 온갖 잡생각이 사라지는 느낌도 좋다. 몸이 점차 풀어지고 부드러워지는 것도 좋다. 선생님이 어제 오셨는데 오늘도 왔다고 좋아하셨다. 나만 보면 반갑다고 하셨다. 진심인 게 느껴졌다. 감사했다. 요가를 하면서 많이 풀고 푹 쉬었다.

그러고 나니 아이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시험 잘 봤다는 연락이었다. 100점이 여섯 명이나 나왔고 3명은 90점 대였다. 잘 보았다. 9월에 주말 한 번도 못 쉬고 정말 고생했는데 보람찬 성적이 나와서 기분 좋았다.

그리고 집 와서 두유에 콘푸로스트를 먹고, 웨스 앤더슨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좀 보았다. 이제 거의 다 본다. 유튜브로 구매해놓았던 것이다. 요즘 영화를 유튜브로 구매해서 본다. 이렇게 보면 월정액보다 돈이 많이 나갈 것 같기는 한데, 생각해 보니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영화를 엄청 오랫동안 나눠 보니까 한달이나 두달에 한 번씩 구매해서 보는 것이면 괜찮은 것 같다. 아무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잘 짜여진 웨스 앤더슨의 미감이 그대로 담겼고 내용도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다. 프렌치 디스패치를 정말 사랑하는데, 정제되고 깔끔하게 진행되는 이야기와 완벽한 구도를 잡는 그의 특징이 아무래도 좋다. 모든 장면이 예술 작품 같아서 참 좋다.

그렇게 보다가 남동생 영어를 알려줬다. 토플 듣기를 하려고 했는데 실패하고 수능 듣기와 수능 독해 문제를 풀었다. 천천히 알려주는 게 확실히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남동생이 체했나보다. 엄마가 전화해서 개비스콘 먹게 하라고 했는데 남동생이 나중에 먹는다고 했다. 걱정이 좀 되었지만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시험 잘 본 것에 감흥이 있기는 했지만 아주 크게 감정적으로 동요를 하지는 않았는데 어머니들께 전화를 드리기 시작하자, 감동이 밀려왔다. 어머니들께서 너무 기뻐하셨다. 둘 다 백점 받은 쌍둥이 어머니께서 두 아이가 내 이야기를 집에서 정말 좋게 한다고 말씀해주셨다. 나는 둘 다 과묵해 보여서 잘 몰랐는데 어머니께서 선생님께서 너무 독기 있게 하셔서 아이들도 쉴 수가 없고 열심히 하게 된다고, 이런 선생님이 잘 맞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참 많이 기뻤다. 사실 나는 독기있게 한 적이 없었는데, 남들은 가끔 이렇게 내가 아주 열심히 하고 있지 않아도 열심히 성실하게 한다고 평가할 때가 많다. 아무튼 기쁜 일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그 정도만 느끼셨냐고 하셨다.

다른 아이 어머니께서는 아이가 의욕 없을 때도 있었는데 그 아이를 기다려주시고 본인이 할 수 있다는 의지를 키울 수 있게 도와주셔서, 큰 행복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셨다. 내가 노력한 것도 있었지만 아주 크게 노력한 건 아니었는데, 너무 좋게 봐주셨다. 물론 아이를 복돋으려고 하고, 잘 안 될 때 도와준 건 있었지만 너무 크게 감사해주셨다. 점점 감동이 밀려왔다. 그리고 수업 가서 아이들 재미있게 가르쳐주려고 했다.

마지막 끝날 무렵까지 전화 통화를 계속 했는데, 어머니들께서 너무 감사해하시고 아이들이 선생님을 너무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내가 정말 꼼꼼하게 가르치고 도움이 많이 된다는 이야기도 해주셔서 감사했다.

그리고 복사를 늦게까지 하고 남자친구와 연락했는데, 내가 늦는다고 했는데도 귀엽게 괜찮아 기다릴게, 하며 개구리 이모티콘까지 보내주는 남자친구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전화를 하면서도 네가 보낸 개구리 이모티콘이 꼭 응원하는 것 같더라, 라고 말하니 응원하고 있지 하고 대답했다. 내가 저녁으로 서브웨이 먹고 부족해서 떡볶이랑 튀김 먹었다고 하니까 튀김 몇 개 먹었어 물어서 세 개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야~~ 하면서 감탄사를 하는데 웃겨 죽는 줄 알았다. 그리고 유럽 갔을 때 엄마가 파리에서 코스 요리 안 사주고 길거리에서 샌드위치 사서 먹인 이야기랑 스위스에서 맥도날드 햄버거 사준 이야기를 하며 재미있었다. 나중에 남자친구랑 꼭 유럽 가고 싶다. 그리고 유럽 마트에세 장 보는 게 너무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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