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을 읽다가 오르한 파묵의 먼 산의 기억을 알게 되었다. 오르한 파묵은 2006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이다. 그가 쓴 먼 산의 기억은 특별한 책이다. 소설은 아니다. 그림 일기장이다. 그가 공책에 적은 글과 그린 그림을 그대로 스캔을 떴다. 책의 가운데 부분에 그 스캔본을 넣고 위아래 양옆에 한국어로 번역한 글을 입력했다. 나는 이런 형식의 책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오르한 파묵은 그림을 잘 그린다. 자신이 화가가 아니라고 했지만, 캔버스가 아니라 공책에 그리고 색칠한 그의 그림은 상당히 정교하고 아름답다. 투박한 손길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오히려 정감이 있다. 선이 얇지는 않고 색칠도 굵게 했다. 가끔 놀랍도록 얇은 선과 구체적으로 표현된 사물이 보인다.
등대를 그릴 때는 빛이 뻗어나가는 걸 주황색 선으로 표현했고, 바다는 파란 계열의 색 여럿을 선으로 그렸다. 나무와 숲에는 짙은 초록색과 연두색 대여섯 개를 뒤섞었다. 집의 모양도 잘 잡았다. 문은 검은색, 지붕은 붉은색, 벽은 흰색 그리고 주황색 땅까지.
산비탈을 그릴 때, 보라색과 남색으로 가까운 산을 표현하고 먼 산은 분홍색으로 그린 게 인상적이다. 검은 수풀도 보이고, 도로는 희다.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 걸까? 아니면 색을 마음대로 쓴 걸까.
사실적으로 그리는 화가의 그림보다 오르한 파묵의 그림에 더 눈길이 가기도 한다. 그림을 기술로 기법으로 그린 게 아니라, 보이는 대로 그렸다. 투박한 손솜씨라 더 순수하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그림을 대충 그리지 않고 아주 정성껏 오랜 시간을 들여서 그렸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그린 게 느껴진다. 그의 눈에 아름다운 것들을 담고자 했다. 사진을 한번 찍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이렇게 공책에 오랜 시간을 들여 그림을 그리고 글을 적은 그의 여유로움이 부럽다. 시간은 그도 나도 같을 텐데, 오랫동안 한 풍경을 그림으로 담을 정도로 그의 눈은 느린가보다.
글도 상당히 많이 적었다. 비행기를 타고 이동한 일, 소설을 쓰다가 느끼는 상념들, 만난 사람들과 먹은 식사들이 적혀 있다. 그가 생각하던 일을 적었는데 흐름이 짜여 있고 잘 만들어져 있기보다는 생각나는 대로 적은 느낌이다. 자신에게 주는 메시지도 있다. 하나의 주제로 쓴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생각들이 뒤죽박죽 적혀 있다. 같은 페이지에 다른 색깔의 펜으로 여러 내용을 한 번에 적어놓은 것도 있다. 하나의 문단으로 있는데도 소설쓰기와 모차르트 듣기, 수영하기 같은 그의 일상을 적어 놓고 그림을 풍경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도 적었다. 소설 쓰기가 어렵다는 내용도 같은 문단에 들어 있다. 짜임새가 없는 이런 글이야말로 솔직한 글인지도 모르겠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도 일기장에는 자유롭고 편안하게 글을 적는다. 나는 이런 민낯같이 정돈되지 않은 글이 좋았다. 걸작품이라 할 만한 대단한 이야기도 아름답지만, 이렇게 오가는 생각들을 솔직하게 적은 것도 책으로 나오는 걸 보니 희망이 부풀었다.
나도 일기장을 언제가 책으로 출판하고 싶다. 나는 소설가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설가가 아니어도 작가일 수 있지 않을까. 글을 쓰는 건 좋아하지만 소설은 나에게 너무 어렵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있었던 일을 적는 일기는 재미있고 편하다. 나도 이렇게 하나씩 내 이야기를 적어 놓고 언젠가 묶어서 책을 낼 수 있으면 좋겠다.
2025년 올해 처음으로 읽은 책이 이 책이었다. 올해 시작부터 6월까지 50권이 넘는 책을 읽었지만, 오르한 파묵의 먼 산의 기억을 첫 책으로 읽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