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나에 대해, 글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한다. 나의 꿈은 작가이고 브런치에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하지만, 내가 과연 어떤 작가가 될 수 있을지 고민이 된다. 소설가를 먼저 생각해봤지만 작품 토지를 읽을수록 기분 좋게 압도당하는 느낌에, 전혀 이렇게 쓸 수 없다는 생각만이 가득하다. 이런 생각 자체가 내가 부족하다는 증거이겠지만 오늘 읽은 대목에서 나는 경건하게 무너졌다.
“홍이는 이 몇 해 동안 뭔가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불현듯 느낀다. 나이 탓이 아니다. 세월이 간 때문도 아니다. 스물아홉, 잃을 나이는 아니다. 지난날 생모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파국으로까지 몰고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격렬한 시절의 아픔, 분노, 언제 그런 것들과 이렇게 먼 거리에 와서 있는가. 숱한 그 괴로움을 잃었다. 잊었다가 아니라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절도와 미온은 어떻게 다른가. 아니면 같은 것인가. 마치 병마처럼 밑바닥으로 몰아넣고 굳게 마개로 밀폐한 그 숱한 청춘의 갈등은 병마개를 따면 과연 터져나올까? 판술네 집에서 그것들이 터져나올 것만 같아 위기를 느꼈던 것은 한갓 기우였었는지 모를 일이다. 밀폐해버린 것. 그것들은 모순이며 회의이며 욕망, 또한 절망이기도 했었다. 그것은 혈기였으며 자기 추구였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지순한 것, 방종 뒤켠에 숨겨진 맑은 것, 진실이었을 것이다. 끝도 시작도 없었으며 풀지도 맺지도 못하는 몸부림과 쓰라렸던 것. 그러나 살기 위하여, 살아 남기 위하여 적당한 곳에서 매듭짓고 적당한 곳에서 풀어버리고… 해를 따라가는 해바라기, 나뭇잎 뒤켠에 알을 까는 곤충, 나무는 비옥한 흙을 향해 뿌리를 뻗는 섭리다. 인간의 방편도 그 섭리에 속하는 것인가. 망각과 상실의 강도 그 섭리에 속하는 것인가. 도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냐! 사람은 해바라기가 아니다. 곤충도 아니다. 한 그루 나무도 아니다. 그것들이 생명을 향한 비밀이 있듯이 사람도 생명을 향한 비밀이 있겠으나, 그게 바로 방편일 수는 없다. 방편은 오히려 인위요 섭리에 반한 것일 수도 있다.” (토지 13권 p.335-336, 박경리, 나남출판 중)
이 청춘을 잃어버려가는 느낌, 혼란스럽고 뭔가 잃어버린 듯하면서 그 감정을 절도와 미온이라는 단어로 절묘하게 표현해버린다. 그 차이를 물어보면서 감정의 깊이를 헤아린다. 청춘의 갈등을 모순, 회의, 욕망, 절망이라고 부르짖기도 한다. 혈기이자 자기 추구, 지순한 것, 방종 뒤켠에 숨겨진 맑은 것, 그리고 진실.. 몇 페이지를 더 가서야 홍이가 하던 고민에 숨겨진 것이 있다는 게 드러난다. 바로 첫사랑 장이에 대한 모호하고 복잡한 감정을 그럴듯한 고민으로 숨겨 놓고, 그걸 마지막 장에 가서야 드러낸다. 어떻게 이렇게 치밀하게 글을 구성하고 쓸 수가 있을까. 사람의 머리로 이게 가능한 계산이기나 할까. 계산하지 않고 계산하는 게 가능할까. 나는 박경리 작가 앞에서 무너진다.
첫사랑 앞에 떳떳하게 설 수가 없어서 치욕을 주고, 그걸 다시 한 번 함께 치욕당하며 이루지 못한 꿈, 이제 와서야 혼란스러워지는 사람의 감정이 절절하다. 토지 안에 살아있는 등장인물 하나 하나의 감정이 이해되고 느껴진다. 그것도 아주 흘러넘치듯이 살아서 나에게 감정으로 와 닿는다. 이런 글을 쓰는 작가가 우리나라에 있어서 다행이고, 감사하지만 내가 절대 이룰 수 없는 꿈으로 존재한다는 게 무너지는 마음을 만들고, 그건 다시 숭고해진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쓸까. 어떻게 이런 작가가 있을까.
나같은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닿지 못할 경지,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글을 쓰고 토해냈던 박경리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나는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방황할 뿐이다.
동화를 쓸까 해보았다. 이게 나에게 맞는 장르라는 생각도 들었다. 공모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소설 장르보다는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상과 상상이 가득한 글이 편하기는 한데, 뭔가 실체를 붙잡지 못하는 느낌에 아쉬움이 가득하다. 편하다고 다 되는 게 아니란 것은 안다. 실은 나도 제대로 부딪치며 문학이 하고 싶다. 온몸이 불타는 듯한 느낌, 활활 타올라서 나의 안에서 꺼내지는 그런 문학을 하고 싶다.
나는 에세이, 일기, 비평의 언저리를 방랑하며 계속해서 나에게 맞는 장르를 찾으려고 했지만 조금 알 것도 같다. 나에게 맞는 장르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만들어갈 뿐이겠지. 내가 0에서부터 시작해서 채워나가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 것도 같다. 글은 고통이고, 내 고통에서 태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저 즐겁게 쓰고 싶다면 즐거워하는 데서 머무르면 된다. 하지만 예술에는 고통이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것 같다.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니까. 내가 힘이 들고 그 힘든 걸 견디고 나면 결과물이 나온다. 쉽게 모든 게 이뤄지지는 않는다. 이 세상은 거대한 초콜릿 케이크가 아니니까. 그저 달콤한 것만 쫓으면서 가볍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 세상의 거대한 무게 속에서 내 자리를 찾아가고, 그 안에서 내 반경 안의 생활을 꾸려가면서 살아가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저번에 쓴 글처럼 전형적으로, 어떤 전형성이 되기 위해서 사회 안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내 일을 수행하면서 살아간다. 흉내내기가 아니라, 어떤 것의 진정한 전형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오리지널리티를 찾고 만들어가면서 나의 삶을 꾸려가는 게 내가 사회에서 하는 일이라면, 예술은 뭔가 다른 방식으로 온다. 예술을 찾고 찾아다니며 헤매다가 모든 걸 잃고 무너질 때 내 안에서 예술이 탄생할 것이다. 그게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러니 찾는 걸 멈추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