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상한 나뭇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두 눈에 담뿍 담기고,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수많은 생각이 나무를 바라보며 맺히고 사라졌다. 마치 열매처럼 주렁주렁 기억과 생각이 그 자리에 왔다가 스쳐 갔다. 까마귀가 스쳐서 지나간 것처럼, 내 기억도 나무 위로 매달렸다가 아무것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열매를 만들어 달아보기도 했는데, 그건 그저 환상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나무에는 아무런 것도 없었고, 앙상한 나뭇가지 뿐이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나무가 안쓰러워서 아무리 초록색, 파란색 풍선 같은 기억들을 덧붙여 봐도, 저 나무는 똑같다.
봄, 여름, 가을을 지나고 겨울을 견디는 나무는 말라있고 애처롭다. 아주 쓸쓸해 보인다. 저 나무도 분명히 청춘을 보냈을텐데, 화려한 잎사귀를 가득 매달고 찬란한 여름을 지났을텐데,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한 장면을 계속해서 생각했다. 수많은 좋은 일들 중에서, 아주 나쁜 일 한 가지를 반복해서 그렸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이해해보려고 했는데, 그럴수록 나를 알게될 것만 같아서 두려워졌다. 내 안에도 괴물이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모든 걸 오해하고, 사람의 진심을 알지 못하고, 내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해버리는 아주 연약하면서 폭력적인 괴물이 내 안에도 있다. 아빠를 용서할 수 없는 만큼, 나 자신도 용서하기가 어렵다.
아주 이해할 수가 없는 일, 아주 좋은 우리 아빠가 왜 그런 일을 했을까? 나는 좋은 사람이 맞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 저 눈 앞의 나무는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자란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열매도 없고, 쓸쓸하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나무. 그러나 저렇게 자랐다. 나뭇가지를 펼치고, 아주 못생기게 자라나서 혼자 떨고 있는 나무가 우리 가족의 모습이다. 나에게 필요했던 건 나무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뿐이었다.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지만, 내가 원하는 가족이 아니었지만, 저 나무를 볼 때마다 새록새록 펼쳐지는 기억들은 오직 나와 우리 가족만의 것이다. 가끔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여동생이랑 치던 것도, 남동생이 그려준 이야기에도. 어떤 정답이 되는 가족 속에서 태어나는 것, 그런 게 삶에서 필요한 게 아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이 기억을 만들어주고, 이런 삶을 만들어준 가족이 있어서 나란 사람이 저 나무처럼 이곳저곳으로 가지를 뻗어내 저런 모습이 되었다는 걸 아는 것이다. 어떤 열매 하나 없어도, 그저 뒤죽박죽 자란 가지일지라도, 나와 너무 닮아서 처량해보여도 그래도 행복한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런 기억이 있기 때문에 내 가족이 소중하다.
어떤 좋은 가족에게서 태어나는 걸 바라는 게 아니라, 이미 태어난 곳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인지하고 인정하는 게 더 중요한 것이라는 걸 안다. 내가 태어난 가족은 어떤 정답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답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정답과 오답에서 벗어나, 삶의 파노라마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나의 삶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게 내가 만들 수 있는 답이다. 이런 삶에서 어떤 것을 바라게 되면, 이 삶을 거부하게 되기도 한다. 내 삶을, 내 가족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그 모습을 보는 게 진정으로 중요한 일이다.
나무 한 그루에, 청춘이 지나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지금이 끝이 아니다. 봄은 오게 마련이고, 어느 누구에게나 봄은 온다. 좋은 시절이 모두 지나갔다고 할 수도 없다. 더 좋은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런 때를 위해서 좀 더 갈고닦는 게 필요할 뿐이다. 저 나무가 여러 가지를 펼쳐냈듯이, 나에게도 아주 많은 가지가 펼쳐졌던 것뿐이다. 그리고 나의 모습도 조금 밋밋할 뿐, 나름대로 여러가지 방향을 만들어낸 형상이다. 그럼에도 몸통이 되는 줄기는 곧게 자라있다. 나도 굽어지고 아주 꺾이고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까지 가본 적이 많지만, 몸통이 되는 줄기는 굳건하다. 그리고 이 줄기를 만들어준 게 나의 뿌리가 되는 부모님이라는 걸 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통에 난 상처도, 속에서 곪은 것들도 다 하나의 나무가 되었다. 그렇게 성장했다. 아주 장성한 한 그루의 나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한 그루의 나무다. 못생기거나 울퉁불퉁하거나 해도 한 그루의 나무이다. 모두가 그렇듯이 나도 똑같은 한 사람이다. 그러니 이렇게 장성해서 어떻게 생겨났든 서 있다. 어릴 때 꺾이지 않고 크게 성장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나무와 같이, 한 사람으로서 언젠가 키가 자라는 게 늦춰진다면 더 굵어지고 두꺼워지는 일만 남았다. 충분히 깊은 마음이 되어, 언젠가 내가 재목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속을 다스리고 내실을 갖추도록 하자. 언젠가 내가 크게 쓰일 때, 속이 썩어있는 게 아니라, 썩은 속이 치유되어 최상급의 상품으로 여겨질 수 있도록 나를 잘 다스리자. 호수처럼 맑은 마음으로 나의 몸과 마음에 양분을 주고 건강하게 앞으로의 삶을 살아내자.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까닭은,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키워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은혜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나무 한 그루를 키우기 위해 좋은 손길로 키워준 은혜를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