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안녕, 아름다운 데이트

by 신하연

나는 남자친구와 강남역에서 만났다. 남자친구가 나에게 화이트데이 선물로 사탕도 주고, 1주년 편지도 써줬다. 수제 사탕이라서 그런지 상큼하고 깔끔하게 달았다. 편지 내용에 한결같이 우리 만난 날부터 나를 사랑해왔다고 적혀 있어서, 점점 늘어나는 날의 수에 감동받았다.

교대역으로 가는 길에 남자친구가 조금 춥다고 했지만 나는 춥지 않다고 했다. 그랬더니 남자친구가 나보고 열이 많이 돈다고, 정열적이라고 놀렸다. 나는 세광 양대창 노래를 지어서 부르면서 신이 난 채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12시 20분 정도였는데 사람이 우리밖에 없었다. 양대창 2인분과 치즈 양밥을 주문했다. 오랜만에 먹었는데도 기름지게 녹아드는 양대창 맛이 일품이었다. 세광 양대창에서는 양대창을 그냥 굽지 않고 달콤하고 감칠맛 나는 붉은 소스에 발라서 구워주고, 그걸 또 빨간 소스에 찍어 먹을 수 있는데 그 덕에 느끼한 맛이 많이 줄어든다. 양대창 자체가 가진 풍미와 부드러운 식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서비스로 나온 고추장 순두부 찌개도 칼칼하니 맛이 좋았고, 치즈 양밥도 고소했다. 바닥에 눌어 붙은 걸 맛있게 먹었다. 남자친구가 나보고 다음에 전골을 먹어 보자고 했다. 전골에 볶음밥 해 먹으면 내가 좋아하는 눌은 걸 많이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내 취향에 맞춰서 이렇게 다음 일을 생각해보는 남자친구가 너무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양대창 두 개도 나에게 양보해 주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하면서. 고마웠다.

우리는 3호선 라인을 타고 안국역으로 갔다. 삼청동에 가려고 하다가 가는 길에 한식 문화 공간이라는 곳을 보고 들어가봤다. 한식 상차림도 모형으로 해 놓고, 장독대도 각 지역의 특색에 맞게 늘어놓았다. 장 담그는 걸 온라인으로 체험해 볼 수도 있었고, 장 담그면서 기원하는 노래를 들어볼 수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는 이렇게 한국적인 걸 많이 좋아했던 것 같다. 그리고 도서관이 있어서 책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아주 두껍고 비싸 보이는 세계 요리 책과 인도의 요리책을 들춰보면서 구경했다. 그리고 나와서 벽 코너에 있는 오무라이스 잼잼을 찾아서 조금 읽어 보았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귀여운 그림체로 그려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웹툰이었는데, 왜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남자친구는 전투하거나 싸우는 등 남성적인 웹툰도 좋아하지만 이렇게 몽글몽글하고 따수운 웹툰도 좋아한다. 남자친구의 취향이 성격을 잘 대변하는 것 같다.

그러고 나와서 푸딩집을 발견해서 흑당 푸딩을 먹어 보았다. 푸딩 위에는 인절미가 올려져 있었고 아래는 흑당이 가득했다. 달콤하고 찐득한 흑당과 푸딩을 같이 먹으니까 탱글탱글한 맛이 제대로였다. 그러고 우리는 서울서 둘째로 맛있는 집에 가서 식혜와 팥죽을 먹었다. 가는 길에 삼청동 옷가게에서 2시간 정도 알바하고 잘린 기억이 있어서 그 얘기를 해주었다. 남자친구가 스물 두 살의 나는 굉장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남들은 스물 두살이면 참 어릴 때고 밝을 때인데, 나는 참 어둡고 힘들었단 생각을 했다. 그리고 스물 세살에 1학년 2학기였으니 4수한 것과 비슷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놀라웠다. 내 이십 대 초반은 참 힘들었구나, 하는 생각. 나는 열심히 살며 많이 이겨냈다고 생각했는데 남들보다 많이 뒤처졌고 느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20대가 허망하게 끝이 나고 벌써 30대가 되어 버렸으니, 참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고 그러면서도 그 모든 힘든 시간을 이겨내고 잘 살고 있으니 내가 대견하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나는 내 과거를 돌아보면서,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일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과 공포에 너무 두려웠지만 관점을 달리해보니 한 번 이겨낸 일이니 또 발생해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과 희망이 들었다. 나는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고, 강하다는 건 모든 걸 잃거나 주저앉게 되었을 때도 다시 일어나는 용기에서 증명된다. 그러니 나는 엄청나게 의지도 강하고 용감한 사람이다. 그걸 확인하는 시간이었을 뿐, 나를 절망케 하는 시간은 결코 아니었다. 내 안에 있는 아주 커다란 힘을 시험해보는 일이었음에 불과하다. 나의 그 힘과 의지는 온전히 내 것이다.

남자친구가 대학원 생활하면서 힘들었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많은 걸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품었던 이상과 다른 현실을 보면서 힘이 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하염없는 느낌 속에서 고군분투했다는 남자친구의 과거도 조금 그려졌다. 뭔가가 확실하게 정해지는 게 없고, 자신의 연구를 하면서 버텨야 하는 그 시간들이 참 힘들었겠구나. 항상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그런데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느낌에 마음 고생을 많이 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석사 졸업을 하려고 했을 때, 얼마나 절망적이어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느껴졌다. 그렇지만 논문도 두 편이나 써내고, 그 힘든 과정을 모두 이겨내고 졸업하고, 또 취업까지 너무 잘 해낸 남자친구도 참 대견하고 멋있다. 그렇게 힘들고 혼자 오롯이 버티는 과정을 견뎌내서 이렇게 좋은 시절을 맞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남자친구를 아낌없이 축하해 주고 싶다. 남자친구가 그렇게 잘 되니까, 나도 더 열심히 살게 되고 내 일에 집중하게 된다. 나도 내 할일을 더 열심히 해서, 자랑스러운 결과를 만들어 내고 싶다. 이렇게 서로 좋은 시너지를 주니까 참 좋은 관계이고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 된다.

국립 현대 미술관에 가서 이은결 마술 영상도 보고 이우환이나 김만기 등과 같은 작가들의 현대 미술 작품도 보았다. 내가 예전에 관심있게 본 적이 있던 단색조 회화 작품도 실제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공부했던 내용이 아주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아 말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 아쉬웠다. 이것 저것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말해줄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현대 미술이 조금 어렵기도 하고, 아주 와닿지는 않았다. 요즘 들어 미술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고 있다. 아주 대단한 사상을 담았다고 해도, 또는 아주 잘 그렸다고 해도 하나의 시각적 작품으로 존재할 뿐이다. 작품이라는 말이 가지는 위대한 느낌보다 그저 객관적인 단어로 나는 이 말을 쓰고 있다. 하나의 시각적인 어떠한 것을 만들어낸 사람들. 그러나 미켈란젤로와 반 고흐의 작품을 볼 때 나는 이런 심심한 느낌을 갖지는 않았다. 결국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자꾸 작가 타이틀을 달고 작품 활동을 하고 전시를 하고 있으니까, 내 흥미가 갈수록 떨어지는 것 같다. 결국 예술이란 게 이렇다. 최고가 아니면, 최악이다. 1등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 전세계에서 1위를 할 정도로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준이 아니라면 결코 기억되지 않는다. 그러나 요즘 잘 나가는 데미안 허스트 같은 작가를 보아도, 내 눈에는 괴상해 보일 뿐이고 예술성이 느껴지지 않아서 미술이란 게 원체 이렇게 평론가와 작가 둘이 노는 리그인지도 모르겠다. 그 와중에 대중이 끼어서 값만 높여주는 지도 모른다. 갈수록 미술이 의미 없게 느껴진다.

우리는 기러기 둥지에 갔는데 어둡고 우아한 분위기에 감동받았다. 오리 바베큐와 뇨끼도 참 맛이 좋았다. 바베큐는 살살 녹았고, 뇨끼는 양이 많고 쫀득했다. 소스에 빵을 찍어 먹는 것도 좋았다. 분위기 좋은 곳에서 식사하니까 행복감이 차올랐다. 이렇게 좋은 곳에 데려와 준 남자친구에게 감사했다.

나와서 익선동 한옥거리를 구경헀다. 비가 오는 카페도 있고, 버터떡을 파는 카페도 보였다. 골목 골목을 돌아다니며 볼 게 많아서 참 재미있었다. 소품샵은 원래는 좋아했는데 요즘에는 너무 많이 봐서인지 다 똑같은 것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게임방에 들어가서 노래방 코너도 이용하고, 3d로 총 쏘는 게임도 하고, 자동차 운전도 했다. 자동차 운전에서 내가 1등을 했다. 총 쏘는 것도 몬스터를 물리치고 내가 점수도 높게 받았다. 그리고 노래방에서는 랩도 많이 하고, 남자친구가 잘 하는 랩을 들을 수 있어서도 좋았다. 조금 덥지만 않았으면 더 오래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재미있게 놀고 나서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남자친구를 강남역에 데려다 주고 마지막 헤어지는 버스를 보며 손을 흔들다가, 남자친구가 버스 좌석에 앉으며 나를 발견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장면도 되게 아름다웠다. 좋은 데이트를 할 수 있어서 감사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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