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나는 박경리의 토지를 읽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한국어를 가장 잘 쓴 사람, 삶이 곧 문학 자체였던 박경리의 작품을 읽어가면서 문학이 무엇인지 배운다. 그러면서 평사리 사람들이 살았을 땅이 보고 싶어졌다. 만석 논과 지리산, 최참판댁,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활자에서 그려졌다. 내 두 눈으로 직접 평사리 땅을 보아야겠다 생각이 들어 하동으로 여행을 오게 되었다.
오는 길에 섬진강을 보았다. 이 강을 건너서 사람들이 장에 가고, 이 강물에서 용이 몸을 식히고 했을 것이다. 섬진강은 수더분한 아기 같기도 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름부터가 섬진강이니, 가지런히 정리된 여인의 손길이나 머릿결이 움직이는 소리로 들린다. 적당히 오래되어 친근한 느낌이 들고 아주 낡지는 않았으며 푸근한 구석이 있다.
섬진강은 아련하게 먼 기억 저편의 강이다.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눈 속에 시원하게 담기며 다가오는 맛이 없고, 은은하기만 하다. 윤슬조차 화려하기는 커녕, 수줍게 흘리는 눈물마냥 잘 보이지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강은 우리 민족의 여러 감정들을 흘려보내며 오랜 세월 끊기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강가에 앉아 하염없이 서러움을 씻어 보냈을까 그리면 먹먹해진다. 그 연약한 힘부터가 우리의 강 답다.
최참판댁 촬영지에 들어와 보니, 막딸네, 칠성이와 임이네, 용이네 집 등을 찾아볼 수 있었다. 가깝게도 붙어 있는 이 초가집들에 이야기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이곳에 살았던 이들이 가진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그리고는 실은 박경리의 문학으로부터 이 집이 탄생한 것을 거꾸로 생각해보았다. 내가 지은 것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토지를 읽고 구현한 것이니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기도 하고, 조금은 다르기도 했다. 그래도 내 상상이 닿지 못한 구석까지 눈앞에 맞닥뜨리니, 좀 더 토지의 실체를 마주한 것 같아서 뭉클하고 좋았다.
그리고 환하게 피어난 수국꽃 무리를 지나서 박경리 문학관으로 갔다. 넓은 마당에 푸릇한 잔디가 생명력이 있고, 돌로 지어진 구조물까지 고즈넉하니 분위기가 좋았다. 문학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지리산을 보았다. 저 너머로 별당아씨와 환이가 달아났을 것이다. 참 가깝다. 지리산이 자락을 이렇게까지 뻗어 있어서 그 힘도 이어지는 것 같다. 아주 넓고 큰 산이니 박경리 문학의 힘도 여기에서 나온 것 같다. 이 터에는 산의 정기가 갈무리 되어 있는 것 같다. 편안하게 탁 트여 있어서, 넓은 논이 그대로 내려다 보였다. 최참판댁네에서 만석 논을 내려다보는 정경이 그대로 내 눈에 담겨서 감동을 주었다.
“그래, 글기둥 하나 붙들고 여까지 왔네”
글기둥이란 말이 묵묵하게 느껴진다. 숱한 고통을 인내하고 오로지 글기둥 하나만 보고 긴 세월을 견뎌낸 박경리, 그의 손에서 피어난 문학이 이렇게 찬란하게 빛난다. 문학만 보고 견뎌 왔으니 글은 깊고 넓어졌는데, 삶은 힘이 들었다고 한다. 박경리가 보낸 인고의 시간이 이 말에 담겨 있다.
박경리의 40대 모습이다. 할머니의 모습만 그려보다가 이렇게 젊고 수더분한, 고운 여성이셨을 거란 생각에 잠시 머뭇거렸다. 꽃같을 청춘과 젊은 시절을 글에 바치는 동안 세월만 흔적이 많아졌나보다.
궁금하던 서희의 얼굴도 볼 수 있었다. 아래 사진의 왼쪽은 최참판, 오른쪽은 길상이다. 가운데가 서희.
강포수와 귀녀
용이와 임이네
월선이
봉순이까지
문학관을 나와서 너른 논을 한 번 더 보았다. 그리고 문학관 오른편에 있는 최참판 댁에 들어갔다. 농민들의 집과 달리 넓은 터와 사랑방와 안채, 칸칸이 나뉘어 있는 넓은 집을 볼 수 있었다. 서희가 이렇게 넓은 집 속에 외롭게 있었겠구나 싶었다. 여기에 오니 내가 그려볼 수 없었던 것까지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이런 공간을 만들어준 분들에게 감사하다. 작품 토지를 다른 방식으로 깊게 감상할 수 있었다. 내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토지가 이 평사리 마을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