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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Oct 18. 2024

과거 01.

5화.

“하교 시간입니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세요. 하교 시간입니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세요.” 교실 벽면에 삐뚤게 걸려있는 낡은 스피커에서 성별을 알 수 없는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교실에 있던 학생들은 가방을 챙겨 밖으로 뛰쳐나갔지만 구석에 한 명의 학생은 여전히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시끌시끌한 교실이 조용해 지자 엎드려 있던 학생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다 나갔나?” 교실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자 서현은 몸을 일으켜 가방을 챙겼다. 아무도 없는 학교 복도에서는 오직 그녀의 발걸음 소리만 들렸다. 텅 빈 공간을 홀로 걸었지만 마음이 편안했고 큰 유리 창으로 들어오는 짙은 주황색의 빛이 고단했던 그녀의 하루를 위로해 줬다.


“우리 더 공부하고 집에 가자.” “그럴까?” 아직 운동장에는 학생들이 가득했고 어떤 방과 후 활동을 할 것인지 서로의 얼굴을 보고 웃으며 얘기했다. 돈과 친구가 없는 서현은 어떠한 활동에도 참여할 수 없었고 헌 옷 보관소에서 주어 온 낡은 교복의 소맷자락을 만지며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를 빠져나갔다. 이때만큼은 어느 누구도 그녀를 괴롭히거나, 멈춰 세우지 않았다. 서현은 안도하는 동시에 외로움을 느끼며 터덜터덜 집으로 걸었다.


빈곤한 주변부라도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주변은 안전하고 지역에서 조금이라도 돈을 가진 지구인들이 거주하는 동네에 위치했다. 이곳 주변에는 자연과 어우러진 공원과 도서관 그리고 특색이 있는 상점들이 즐비했다. 서현은 하굣길에 걷게 되는 이곳을 동경했다.


“나도 이런 곳에서 태어났더라면.. 친구도 있고 방과 후 활동도 했을 텐데..” 자연과 어우러진 상점과 도서관에서는 은은하고 따뜻한 주황 빛이 흘러나왔지만 서현은 따뜻한 불빛을 잡을 수 있는 힘도 여유도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고개를 숙인 채 땅을 바라보며 어둡고 꿉꿉한 냄새를 풍기는 집으로 천천히 걷는 것뿐이었다.


은은하고 따뜻했던 빛이 옅어지며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으어..어..” “으으.. 조금.. 더.. 필요..”


학교에서 멀어질수록 빛은 옅어지며 어둠이 내렸고 폐허가 보였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리는 오물이 가득했고 곳곳에서 비명과 신음 소리 그리고 서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구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지구인들은 힘 없이 가는 신음 소리를 내며 길바닥에 쓰러져 뒹굴었고 종종 두 발로 서 있는 지구인들도 보였지만 자세가 구부정하고 잠자리처럼 계속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들의 모습을 통해 어떠한 힘도 희망도 느낄 수 없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만 느꼈다.


“약쟁이 새끼들..” 서현은 나지막하게 욕설을 뱉은 뒤, 빠르게 집으로 걸었다. 집에 다다를수록 약쟁이들은 사라져 갔지만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지구인과 허름한 옷을 걸친 채 구걸을 하는 지구인들이 촘촘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자신들의 존재감을 뽐냈다.


서현은 그런 그들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무심하게 지나쳤고 술에 취해 치근덕거리는 이들에게는 욕설을, 먹을 것을 내놓으라는 이들에게는 무심함으로 대응했다. 그녀는 몇 년 전까지 이 모든 것이 싫어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도전하는 것마다 실패했고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살아갔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탕. 탕. 탕.”


녹이 슬어 언제라도 끊어질 것 같은 계단을 오르던 서현은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땀이 말라 곳곳이 누레진 셔츠를 입은 뚱뚱한 지구인이 보였다. “후. 후. 후.” 거친 숨을 몰아쉬며 걷던 그는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서현을 발견하고 음흉하고 변태적인 표정으로 그녀를 훑어봤다. “크크.. 저년도 지 어미처럼 되겠지?”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현이 들릴 정도의 큰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서현은 복도에 서있는 그를 노려 보며 지나쳤고 여전히 거친 숨을 쉬는 뚱뚱한 지구인은 음흉하게 위, 아래로 서현을 훑어봤다.


“쾅!”


부서질 정도로 오래된 현관문을 닫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어둠이 내려있었다. 서현은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짙은 어둠이 내린 집이 싫었고 매일 화가 치밀었다. 서서히 흐릿하게 어둠 속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하자 전등 스위치를 찾기 위해 벽을 더듬 거리며 천천히 움직였다.


“탁.”


볼록하게 튀어나온 스위치를 누르자 “지지직.” 소리와 함께 전등이 켜지며 서서히 어둠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집 안에는 옅은 어둠이 남아있었다. 거실 바닥에는 먹고 버린 간편식 포장지가 널브러져 있었고 말라비틀어진 음식물들이 악취를 풍겼다. 서현은 무심하게 너덜너덜한 가방을 구석에 던져 놓고 쓰레기와 오물을 닦아 냈지만 닦고 또 닦아내도 이미 가구와 집에 베어버린 악취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오물을 닦아내던 걸레를 던져버리고 어질러진 물건들을 대충 치웠다.


“엄마. 저녁 뭐 먹을래?” 서현은 시큼한 땀 냄새와 싸구려 향수가 뒤 섞인 불쾌한 냄새가 풍겨오는 방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으..응..” 하지만 작은 신음 소리만 들려올 뿐 서현의 질문에는 답이 없었다. “뭐 먹을 거냐고!” 서현은 짜증스럽게 다시 물었지만 여전히 작은 신음 소리만 들려왔다.


“아. 짜증 나. 나 혼자 먹는다. 나중에 알아서 먹어.” 서현은 모든 것이 귀찮다는 듯이 대충 말을 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문짝이 없는 냉장고에 어지럽게 쌓인 간편식을 뒤적이며 당장 먹고 싶은 음식을 찾았지만 식욕이 없어진 서현은 모든 것이 귀찮아져서 거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서현은 멍하니 곰팡이가 핀 천장의 벽지와 희미한 빛을 내며 깜빡이는 전등을 바라봤다.


“지직. 지직.” 수명을 다해 가는 전등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는 중이었다.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 거야?”


“으..으..” 어둠 속에서 헝클어진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비쩍 마른 몸의 여성이 느릿느릿 기어 나왔다. 여전히 바닥에 누워있는 서현은 눈만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줘.. 더 필요해..” 느릿느릿 기어 나오던 여성은 들릴 듯 말 듯 한목소리로 무언가를 달라며 중얼거렸다. “없어. 내가 다 버렸어.” 서현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으..으.. 이.. 년이!” 방금 전까지 고개를 숙인 채 힘 없이 웅얼거리며 움직이던 여성은 날카롭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밥이나 먹자. 준비할게.” 서현은 여전히 느릿느릿 기어 다니며 욕설을 내뱉는 그녀를 무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주방과 욕실을 구분하기 힘든 공간에서 음식물이 눌어붙은 그릇을 닦는 “뽀드득” 소리와 금방이라도 고장 날 것 같은 전자레인지가 “삑삑”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행복하고 웃음이 가득해야 하는 저녁 식사 시간은 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간편식의 불쾌한 냄새와 여전히 거실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소리를 지르는 엄마의 비명소리로 가득했다.


“삐비이익..” 전자레인지가 멈추는 소리가 들리자 서현은 능숙하게 간편식을 꺼내 방금 닦아 물이 흥건한 그릇에 부었다. “푸욱..찍!” 숟가락으로 길가의 토사물같이 생긴 물체를 입에 쑤셔 넣으며, 여전히 거실 바닥에서 나체로 뒹구는 엄마에게 말을 했다.


“더 이상 약은 없어. 확인해 보니까 어젯밤부터 없었어.” 서현은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엄마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다..닥..쳐!”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듯 몸을 꿈틀 거리면서도 딸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엄마 방에 이거 둘 테니까 먹든지 버리든지 알아서 해.” 서현은 아직 모락모락 김이 나는 간편식을 방바닥에 밀어 넣고 집 밖으로 나갔다.


“야..이..망할..” 닫힌 문 뒤로 엄마의 힘 없이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서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서현은 집 앞에 위치한 을씨년스러운 공원에 있는 의자에 홀로 앉자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서현아. 조심해!” 그녀는 고장 난 채 버려진 시소에 올라가 방방 뛰며 말했다. “괜찮아. 엄마도 같이 뛸래?” 서현은 고른 치아를 보이며 밝게 웃으며 말했다. “엄마는 괜찮으니까.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 그녀의 엄마 역시 밝게 웃었다.


비록 공원은 버려진 놀이 기구로 볼품이 없었지만 서현에게는 엄마와 함께 있는 순간 그곳이 어디든 아름답고 포근했다. 서현은 다른 아줌마들보다 동그랗고 새까만 두 눈, 옅으면서도 은은하게 보이는 붉은 입술까지. 적어도 서현에게는 세상에서 엄마가 가장 이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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