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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Jun 28. 2023

서현의 나날.

14화. 과거.(10)

“자기야. 오늘 뭐 먹을까?” 선우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표정으로 유나에게 말했다. 그의 역겨운 표정에 유나는 지금이라도 집에 가고 싶었지만 계속 그의 제안을 거절하면 관계가 틀어질 것이 두려워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글쎄. 항상 자기가 많이 사줘서.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데? 혹시 자기는 먹고 싶은 것 있어?” 유나의 웃는 모습에 흥분하기 시작한 선우는 자신이 고급 코스 요리집을 미리 예약했다며 유나를 안내했다.


그들이 도착한 요리집은 주변부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을 보여줬다. 그들이 탑승한 차량이 멈추자 입구에서 기다리던 종업원들이 차량의 문을 열어주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선우는 익숙하다는 듯이 차량에서 자연스럽게 내렸지만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은 경험이 없는 유나는 감동하여 분위기에 한껏 취해 정신 차리지 못했다.


“자기야! 최고야!” 선우는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호들갑을 떠는 유나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딘가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도 내비쳤다. “그래. 그런데 조금 조용히 좀 해.” 그는 과장된 행동과 큰 목소리로 떠들고 있는 유나를 진정시켰다. 그의 일갈에 당황한 유나는 멋쩍은 미소를 띠며 조용히 그와 함께 요리집에 입장했다.


그들이 입장한 요리집의 내부는 외관보다 훨씬 빛나며 화려했다. 또다시 유나는 흥분된 기분을 참지 못하고 탄성을 지를 뻔했지만, 선우의 냉랭한 시선이 느껴져 참았다. 그녀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작은 소품들이 넘쳐나는 곳에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했다.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 화려하게 빛나는 세계로 발을 들이겠다고 다짐했다.


요리집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은 낡은 가구들이 널브러져 있고 사생활과 비밀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듯이 공간의 구분이 없는 주변부의 일반 식당과 달리 철저하게 방들이 구분되어 사생활과 비밀을 지킬 수 있었고 이용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해주었다.


“선우님. 오셨습니까? 준비된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깔끔한 복장을 한 여성 지구인이 종종걸음으로 걸어와 예의 바르게 말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구 인류 시절 동양풍의 옷을 입은 여성을 따라갔다. 유나는 마음이 들뜬 자신과 다르게 차분한 모습을 보이는 그에게 묘한 이질감을 느끼며 마음 깊숙한 곳에서 알 수 없는 작은 불안을 느꼈다.


깊숙한 곳으로 갈수록 불빛이 약해지며 몽환적인 분위기의 통로와 방들이 보였고 그녀는 아름답고 몽환적인 분위기에 황홀해하면서도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이 기분에 알 수 없는 불안함은 점점 더 커졌다.


“오빠. 어디까지 가는 거야? 꽤 오랫동안 걸은 것 같은데?” 유나는 평소와 다르게 다정하게 선우의 팔을 껴안으며 몸을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는 무표정하게 앞만 바라보며 안내원을 따라갔다. 유나는 그의 태도에 당황스럽고 불쾌했지만 팔짱을 풀지 않고 조용히 그의 보폭에 맞춰 걸었다.


“도착했습니다. 방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준비한 음식을 천천히 드리겠습니다.” 구 인류의 동양풍 옷을 입은 안내원이 무릎을 꿇고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선우도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유나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오빠. 나 이런 곳은 처음 와 봐. 너무 좋다.” 여전히 유나는 들떠서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나하고 더 깊은 관계가 되면 이곳보다 더 좋은 곳에도 갈 수 있어.”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그래? 나는 지금도 우리가 충분히 깊은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전까지 신이 났던 유나는 마음을 차분히 하며 그를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려는 작업을 시작했다.


“...”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 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요리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그를 보며 그녀는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조용히 방을 둘러봤다. 방의 모습은 일반 식당과 다른 부분이 많았다. 식당이라고 하기보다는 오래된 동양 느낌의 대저택 같았다. 큰 유리로 되어있는 방의 창문으로는 단정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이 보였고 그 옆으로는 책을 통해서만 볼 수 있던 노천탕이 보였다. 자세히 살펴볼수록 식당이 아닌 구 인류 시대의 고급 여관 같았다.


“드르륵..”


그녀가 천천히 방을 살펴보던 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로 만들어진 미닫이문이 열린 곳에는 방을 안내해 준 안내원과 비슷한 복장의 여성 지구인들이 정갈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음식들을 손에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들이 가져온 음식들은 평소 평범한 주변부 지구인들이 먹을 수 없는 진귀한 구 인류의 음식이었다.


“맛있게 드십시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 두 분 모두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기품이 넘치면서도 매혹적인 지구인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모습에 거북함을 느낀 유나는 애써 그녀를 무시한 채 진귀한 음식과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선우를 바라봤다. 여전히 선우는 예의 바르게 그녀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빠. 이건 뭐야? 진짜 맛있겠다.” 유나는 호들갑을 떨며 그에게 말했다. “모르겠어. 음식에는 관심이 없어서. 맛 만 있으면 되는 거지.” 유나는 그의 무심함과 멍청함에 짜증이 났지만 이 순간을 즐기고 싶은 마음에 대충 답변을 한 뒤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아까. 우리를 안내해 주신 분. 어떠신 것 같아?” 그는 음식을 깨작이며 물었다. “모르겠는데. 그냥 뭐라고 해야 할까?” 유나는 그의 말에 대한 의도를 생각하며 말 끝을 흐렸다. “음.. 매력적인 분 같아. 입은 옷하고 화장은 차분한데 표정, 행동은 그렇지 않아. 같은 여성임에도 끌려.” 유나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답변을 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무표정하게 “그래.”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물어봐? 난 그게 궁금하네.” 유나는 무표정하게 음식을 쑤셔 넣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내가 보기에 자기는 중심부에서 화려하고 부유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야.” 그의 말을 들은 유나는 순간 당황하여 멍하게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여전히 선우는 무표정하게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음. 평소에 자기의 말과 행동을 보면 느껴져. 나는 이런 곳에서 살 수 없다!라는 것이. 그것도 아주 강하게 말이야.” 평소 누구에게도 자신의 욕망을 들키지 않도록 노력했다고 자부해온 그녀는 당황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유나의 표정을 확인한 선우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나에게 접근한 거 아니야?” 유나는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야. 나를 어떻게 보고!” 하지만 선우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뭐. 그렇게 화내지 않아도 괜찮아. 자기의 그런 모습을 나쁘게만 생각하지 않아.” 당황한 유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내가 우리를 안내해 주신 분에 대해 물어본 이유가 궁금하다고 그랬지? 여기에서 일을 하는 대부분의 여성 지구인들은 주변부 출신이야.” 그의 말을 들은 유나는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


“뭐?”


“아까 그분도 주변부 출신이셔. 똑똑하신 분이지. 이런 고급 요리집의 관리자까지 올라왔으니까. 혹시 자기는 알고 있어? 여기 관리자가 되려면 얼마나 힘든지 말이야.”


사실 유나는 자신을 방으로 안내해 준 여성 지구인을 덜떨어진 놈들에게 웃음이나 흘리며 몸을 파는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 다른 현실에 당황했고 그녀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그분도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중심부에서 살아?” 그녀의 질문에 선우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크하하하! 그놈의 중심부는.. 크크크.. 당연하지. 그런 것들은 기본이지.” 유나는 그의 비웃음에 기분이 상했지만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분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유나의 질문에 그는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 자기는 공부하고 대외활동은 지금처럼 하면 문제없어. 그런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어.” 당장이라도 중심부에서 살고 싶은 유나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빙빙 말 돌리지 말고 빨리 말해 줘. 짜증 나려고 하니까.” 하지만 선우는 더욱 크게 웃으며 말했다. “크하하하! 아.. 진짜 내가 이래서 너를 좋아해.” 이후에도 한참을 웃던 그는 점점 일그러지는 그녀의 표정을 확인한 뒤 말했다.


“중심부 또는 부유한 지구인들은 성적이 좋고 대외활동 실적이 좋은 것에는 관심이 없어. 어찌 보면 당연하지. 주변에 그런 지구인들이 널려 있는데. 뭐.. 정말 독보적으로 뛰어나면 다르겠지만 그런 지구인은 거의 없어.” 유나는 그의 현실적인 말에 대해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에게 직접 듣고 나니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기력함을 느꼈다.


“그러면 어떤 것이 필요할까? 간단해! 후원자를 찾으면 돼!” ‘후원자’라는 단어에 유나는 앞에 놓인 식탁을 밀며 벌떡 일어났다. “듣기 거북하네. 나 갈게.” 방에서 나가려는 유나의 등 뒤에서 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생각해 봐.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후원자가 없으면 중심부는 커녕 명문 대학도 갈 수 없어. 그토록 네가 도망치고 싶은 주변부. 네가 자주 말하는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아야 해.”


유나는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용하려는 그에게 깊은 혐오감을 느꼈지만 한동안 방 밖으로 나가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크흐흐. 잘 생각해 봐. 아 그리고 어차피 지금까지 나에게 치근덕거렸는데 뭐.. 거기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돼. 그러면 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어.”


그는 미성년 지구인답지 않게 타인을 협박하고 거래하는 것에 능숙했다. 어리석었던 것은 유급을 밥 먹듯이 당하는 선우가 아니라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한 유나였다. 선우는 문 앞에 가만히 서 있는 유나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한 걸음만 더 움직이면 돼.” 그는 욕정에 사로잡혀 거친 숨을 들이쉬며 유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 순간 유나는 강하게 그의 팔을 밀친 뒤 그를 뒤로하고 방에서 뛰쳐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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