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멧북 Jun 29. 2023

서현의 나날.

15화. 과거.(11)

역겨운 그를 뒤로한 채 방에서 뛰쳐나온 유나는 출구를 찾지 못하고 무작정 걸었다. 좁은 골목 좌, 우에는 수를 알 수 없는 방들의 문이 열리고 닫혔다. 문이 열릴 때마다 젊은 여성 지구인들의 웃음소리와 진한 꽃 향이 골목에 진동했다. 이곳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유나는 조금씩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하하하.” “몰라..” 목적지를 알지 못한 채 끝을 알 수 없는 좁은 골목을 달렸다. “헉.. 헉..” 더 이상 뛸 수 없을 정도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귓속에는 더 이상 느끼한 남성 지구인들의 목소리와 가식적인 여성 지구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아.. 하아..” 유나는 거칠게 숨을 들이 마시며 굽혔던 허리를 펴고 앞을 바라봤다. 드디어 눈앞에는 들어왔던 화려한 문이 보였다. 그녀는 헐떡이는 숨을 가라앉히며 화려한 문으로 천천히 걸었다. 문을 지나가려는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만요.” 유나가 뒤를 돌아보자 자신을 방으로 안내한 여성 지구인이 배시시 웃으며 서있었다. 크게 지친 자신과 달리 차분하고 여유가 넘치는 그녀의 모습에 놀란 유나는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시죠?” 유나는 이전보다 약하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여전히 그녀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차분히 말했다.


“이름이 유나였나요? 아. 충고는 아니고 작은 조언을 해드릴까.. 해서요.” 유나는 그녀를 경계하며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아. 저를 너무 경계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는 약간 거리를 두며 말했다. “유나 씨를 보면 과거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작은 조언을 해주고 싶을 뿐이에요.” 하지만 여전히  유나는 경계를 풀지 않고 언제라도 요릿집 밖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문 쪽에 서있었다. 안내원은 그런 유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알았어요. 저는 이 자리에 있을게요. 얘기도 굉장히 짧게 할게요.” 그녀는 유나를 안심 시키며 주변을 살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승훈 님이나 경호원들이 오면 제가 책임지고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보호해 드릴게요.” 그녀는 믿음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유나는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아. 진짜. 속고만 살았나 봐. 히히.” 그녀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용하고 얌전하게 웃었다. “유나 씨 보기에 제가 일개 술집 접대부처럼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유나를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까 보셔서 알겠지만 저는 장소 안내와 요릿집의 전반적인 운영을 담당하고 있어요. 나름 제 직업도 괜찮아요.” 그녀의 말을 듣던 유나는 물었다.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결국 누군가의 후원을 받는 것 아닌가요? 자신의 몸을 제공하면서요.” 직설적인 유나의 질문에 그녀는 미세하게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히히.. 그래요. 그런 일도 있죠. 그런데 그런 일은 극히 적어요. 돈도 없고 뛰어난 배경도 없는데 제 매력을 이용해야죠.” 유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몸을 거래를 성사 시키기 위한 도구쯤으로 말하는 그녀에게 불쾌감을 느끼며 말했다.


“그런 행동을 매춘이라고 하죠. 역겨우니까 그만 말씀하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저는 이만.” 그녀에게서 완전히 돌아선 유나의 귀에 이전과 다른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남들과 다른 삶을 살려면 자신의 많은 것은 포기해야 돼요. 그건 우리 같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지구인들도 마찬가지예요." 유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하아.. 그걸 누가 모르나요? 이미 알고 있는 얘기를 무슨 비법인 것 마냥 말하지 마세요.” 하지만 그녀는 입가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아니요. 제가 보기에는 유나 씨는 아무것도 몰라요.” 유나는 자신을 무시하는 듯 말하는 그녀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쪽이 나에 대해 뭐를 안다고 그런 식으로 말해요?” 자신이 생각하는 빛나는 미래를 위해 현재 고통스러운 삶을 버텨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진 유나는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격렬한 적대감을 느꼈다. 그녀는 유나의 모습을 보며 더욱 조용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겪은 일에 대해 잘 생각해 봐요. 지금의 유나 씨가 선택 가능한 선택지는 그것 말고는 없어요.” 또다시 냉혹한 현실에 유나는 말없이 출입구에 서 있었다. “그런 눈으로 저를 바라보지 마세요. 짜증 나니까.” 그녀는  체념한 듯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나에게 날카롭게 말했다.


“그래도 유나 씨는 다행이에요. 곰 지구인치고는 예쁘고 생기가 넘쳐요. 덩치도 작고..” 그녀는 두 눈으로 유나를 훑어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말할게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방으로 돌아가세요. 그러면 유나 씨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요. 아니. 원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어요.”


출구에 서 있는 유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하루라도 빨리 주변부에서 탈출하여 모든 것을 잊고 중심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역겨운 승훈과 함께 살아갈 생각을 하니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와 역겨움이 몰려와 유나를 덮쳤다.


“저는 그 돼지 새끼하고 평생을 함께 할 생각이 없어요.” 진지한 유나의 말을 들은 안내원은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히히히! 평생을 함께 한다니!” 그녀는 발작적으로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발작적인 웃음이 불쾌한 유나는 인상을 구기며 비아냥거렸다.


“당신처럼 몸을 파는 지구인이 뭐를 알겠어요? 이해해요.” 하지만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어갔다. “아직 어려요. 또래에 비해 똑똑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녀는 천천히 유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잘 들어요. 유나 씨에게 질척거리는 그  돼지 같은 놈도 유나 씨와 부부 마냥 평생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음.. 그놈에게 유나 씨는 며칠 놀다 버려도 괜찮은 이쁜 장난감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게 좋겠어요.” 유나는 얼굴을 붉힌 채 그녀를 노려 보며 아무런 말 없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다행히 유나 씨는 똑똑해요. 그래서 단순히 며칠 가지고 놀다 버리는 장난감 신세는 안 될 거라고 생각해요.” 안내원은 우아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인상을 구긴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유나를 본 뒤 체념을 한 듯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 마지막으로 말할게요. 유나 씨가 꿈꾸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지금 겪어야 하는 일들은 정말 작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에요. 그리고 오늘만 잘 넘어가면 더 이상 그놈이 유나 씨를 건드리지 않을 수도 있어요.” 말을 듣던 유나는 불현듯 자신과 같은 길을 걷게 하고 싶어 하는 듯한 그녀의 의도가 궁금했다. “저 같은 지구인들이 많을 텐데, 왜 이렇게까지 설득을 하시죠?” 유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며 그녀에게 물었다.


“유나 씨를 보면 예전의 나와 친구들이 떠올라요.” 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 “친구요?” 유나는 되물었다. “그래요. 친구들. 저를 빼고 모두 죽거나 연락이 끊어진 제 친구들.” 그녀는 어두운 표정을 한 채 말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사적인 말에 당황한 유나는 조용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저와 친구들은 유나 씨와 같은 상황에 처했어요. 선택을 해야 했죠. 구시대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빛나는 새로운 삶을 버리느냐, 아니면 생각을 바꿔 한 걸음 더 나아가냐. 둘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어요. 하지만 빛나는 미래를 선택한 사람은 저 뿐이었어요.” 언뜻 보기에 그녀는 잘못된 선택을 한 친구들을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입가에 옅은 미소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의 거짓을 확인한 유나는 더욱 그녀를 신뢰할 수 없었다.


“제가 보기에는 친구들을 그리워하거나 걱정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유나는 당당하고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하아.. 진짜 못 해먹겠네.” 조금 전까지 슬픔이 가득했던 표정이 한순간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 짜증 나. 다 필요 없고 그동안  네가 그  돼지 같은 놈하고 어울리면서 저지른 자잘한 문제들부터 이번 성매매 문제까지 모두 너에게 뒤집어씌울 거야.” 그녀는 거짓된 차분함과 우아함을 벗어던지고 경박하고 냉정한 본모습을 보였다.


그녀의 본모습을 확인한 유나는 미친 듯이 웃으며 그녀를 조롱했다. “하하하. 이것 봐. 어휴 진짜 천박해서.” 그녀는 유나의 조롱에 화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닥쳐. 아무것도 없는 년이.. 난 분명히 말했다. 아. 내 친구들. 아니 그 멍청한 년들도 자살을 하거나 연락이 두절된 상태야. 이번 기회가 너에게는 마지막일 거야. 잘 생각해 봐.” 그녀는 요릿집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말했다. 하지만 유나는 그녀의 말에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유나의 말을 들은 그녀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겉으로 보면 약자들에 대한 보호 장치가 충분한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 가진 놈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돈을 써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판을 만들어 빠져나가고 너는.. 그냥 버리겠지.” 그녀는 귀찮은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며 유나에게 말했다. 유나가 반박하려는 순간 그녀는 이전과 다르게 소리를 질렀다.


“더 이상 어린애 같은 말에 내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아! 그 멍청한 놈 주위에는 너만큼 똑똑한 지구인이 없어. 잘 생각해 봐. 그놈도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순간이 다가올 거야. 아마도 이곳과 같은 요릿집이나 아예 접대를 전문으로 하는 주점을 운영할 수도 있겠지.” 그녀는 천천히 목을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관리인이 필요해. 신뢰할 수 있는. 확실하게 신뢰할 수 있는!” 유나는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말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는지 집중했다.


“확실하게 신회를 받기 위한 방법이 뭐죠? 결혼 말고는 없지 않나요?" 유나는 목을 돌리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결혼은 그저 법률적인 관계야. 그건 헤어지면 끝나는 관계일 뿐이지.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면.. 도대체..” 유나가 말하는 순간 그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내가 말했잖아! 생각을 더 깊고 넓게 해야 된다고!” 아직 어린 유나는 그녀의 말에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결혼보다 확실한 것은 아이를 얻는 거야. 그 멍청한 놈의 피가 섞인 아이.” 평소 아이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생기는 소중한 선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던 유나는 아이를 성공하기 위한 부속품쯤으로 여기는 그녀가 더욱 역겹게 느껴졌다.


“아이가 물건인가요?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내는 물건처럼 말하다니..”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한 눈빛으로 유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하아. 이제 그만 말해야겠어요. 정말 지치네요. 아무튼 잘 선택해요. 한 마디만 더 하자면 남성 지구인들은 대부분 거기서 거기에요. 재력이 있는 놈이나 없는 놈이나 똑같아요.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요. 그러니까. 차라리 재력 있는 놈과 잘 지내며 애도 낳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삶이 더 행복해요.”


그녀는 말을 하는 도중 유나를 힐끗힐끗 보며 말을 이어갔다. “생각해 봐요. 재력도 없는데 애만 낳고 풍족하게 돈도 못 가져다주는 놈과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나요? 고생길이 훤히 보여요. 차라리 제가 본처가 되지 못해도 애는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좋은 것 아닌가요?” 얼핏 그녀의 말은 현실적으로 들렸지만 유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녀에 대한 거부감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제 그녀는 유나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말에 취해 같은 말을 반복하기 시작했지만 유나의 귓속에는 서서히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머리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행복했던 추억이 천천히 떠오르며 행성으로 떠나기 전 든든했던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땀에 흠뻑 젖어 퇴근한 아빠가 말없이 자신과 동생을 앉아서 들어 올리는 모습이. 그때 단순한 몇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아빠의 행복한 표정이 또렷이 보였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웃음이 떠나지 않는 행복한 집이었다. 하지만 이내 든든했던 아빠는 멀어지며 흐릿해지더니 결국 유나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아. 얼마나 완벽해요!” 유나의 앞에는 여전히 자아도취하여 중얼거리는 안내원이 보였다. 기품있게 보였던 행동은 천박했고 은은하게 풍기던 그녀의 향기는 역겨웠으며 매력적인 그녀의 얼굴과 육감적인 몸뚱이는 돼지 새끼처럼 뚱뚱하고 기름져 보였다. 하지만 화려함과 거짓된 부에 중독된 유나는 쉽사리 그녀의 궤변을 떨쳐내지 못하고 내면 깊은 곳에서 갈등했다.


“아무튼. 나는 유나 씨가 나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 생각해요. 지금까지 그 멍청한 돼지 같은 놈에게 잘 맞춰 왔으니까요. 그러니까 어서 돌아가죠. 제가 안내할게요.” 그녀는 궤변을 내뱉고 만족한 표정으로 유나를 재촉했다. 하지만 여전히 유나는 아무런 말 없이 입구에 서있었다. 그녀는 유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씨!  어서 가자고! 어서!”  하지만 유나는 조금씩 뒷걸음쳤다. 그녀는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유나의 팔을 끌어당기기 위해 다가갔다. “어디를 가. 진짜. 여기서 도망가면 이제 넌 끝이야.” 그 순간 유나는 요릿집을 뒤로 한 채 문밖으로 뛰쳐나갔고 그렇게 유나가 꿈꾸던 화려한 삶은 산산조각 났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현의 나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