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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Jun 30. 2023

서현의 나날.

16화. 과거.(12)

유나는 잠들지 못하고 밤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천박하지만 안내원의 말이 옳은 것일까? 정말 어제 단 한 번의 거절로 인해 모든 기회를 잃고 그동안 저질렀던 악행들의 죗값을 뒤집어쓰게 될까? 요릿집에서 뛰쳐나온 선택이 옳은 선택일까? 밤새도록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복잡한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고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일찍 집을 나섰다. 이른 시간 학교의 운동장에는 유나 혼자뿐이었다. 적막한 운동장에 홀로 서있는 그녀는 쓸쓸함과 외로움, 고통을 느끼며 몸을 웅크린 채 서둘러 교실로 향했다.


“탁!” 아무도 없는 고요한 교실에 도착한 유나는 책상에 가방을 던지며 미끄러지듯이 불편한 의자에 앉았다. 고개를 젖힌 채 여기저기 금이 간 교실 천장을 바라보며 선우과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말이 어눌하고 행동이 꿈뜬 모자랐던 지구인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구타했던 기억, 자신보다 예쁜 지구인들을 깎아내리며 괴롭혔던 기억, 의도적으로 승훈에게 접근했던 지구인들을 폭행하고 괴롭혔던 기억 그리고 외모가 뛰어나지만 의지할 곳이 없는 불행한 지구인을 협박하고 폭행하여 성매매를 하게 만든 기억. 그들을 괴롭힐 때 들려오던 비명과 울음에 비열한 웃음을 짓는 자신의 표정까지.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은 평온했던 기억은 떠올릴 수 없었다.


선우의 무리에 속해있을 당시 유나는 자신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한 지구인들을 괴롭히는 행위에서 기쁨과 만족을 느꼈지만 이는 진정한 기쁨과 만족이 아니었고 그녀를 조금씩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추악했던 추억뿐인 그녀는 죄책감과 후회 그리고 괴로움에 몸을 떨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부유하고 힘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지구인들을 이용한 것이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는 생각에 억울한 감정도 들었다.


"** 내가 뭘 잘못했는데..” 유나는 괴로워하며 혼잣말을 했다. “살아남으려면 나보다 못한 지구인들을 밟고 올라가야지. 그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성공한다는 것은 거짓이고 위선이지.” 그녀는 자신의 악행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인정하는 순간 모든 죗값을 치르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하기 싫었다. 그 순간 유나는 복잡했던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래. 오늘 그 돼지 새끼한테..” 하지만 유나는 인상을 구긴 채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또다시 고통스러운 생각에 빠져들었다.


“야. 저기.” 가까운 곳에서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유나는 인상을 찡그린 채 교실로 들어오는 지구인들을 노려봤지만 예전과 다르게 더 이상 그녀를 두려워하지 않고 험담을 계속했다.


“야. 뭐라고 했냐?” 그녀는 평소처럼 위협적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험담을 하던 지구인들은 위축되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 아. 너 재수 없다고 말했어.”


유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지만 조금씩 교실로 들어오는 지구인들도 그녀의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뭐.. 뭐야!” 결국 그들은 유나를 둘러싸고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처음 경험하는 상황에 당황한 유나는 거친 욕설을 내뱉었지만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그녀의 말투와 행동을 따라 하며 조롱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하여 날뛰었지만 마땅히 할 수 있는 행동이 없어 몸만 부들부들 떨었다. 그 순간 그녀의 시야에 돼지같이 뚱뚱한 선우가 보였다.


“자기야!” 유나는 잠시 자신의 상황을 잊은 채 반갑게 선우를 불렀지만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새로운 책상에 앉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확인한 지구인들은 미친 듯이 웃으며 반가워하던 유나의 표정과 말투를 따라 했다. 자신이 그에게 버려졌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유나는 자신을 둘러싼 지구인들을 밀치며 다가갔다.


“자기야. 왜 아무런 말이 없어?” 그녀는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그는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손짓을 했다. 그런 모습에 화가 난 유나는 소리를 질렀다.


“야! 부탁 한 번 안 들어줬다고 지금 나한테 이러는 거야?” 그녀는 더 이상 불안과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야. 네가 나였으면 그런 부탁을 바로 들어 줬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그녀의 짜증에 그는 얼굴을 붉히며 거친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오늘 학교 끝나고 아니. 지금 당장 나하고 얘기 좀 해!”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을 확인한 유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지금 결판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서!” 그녀는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그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녀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 움직이는 그의 모습에 안도하며 유나는 주도권을 이어가기 위해 그를 뒤로 한 채 당당하게 교실 문으로 걸어가며 관계가 회복되면 자신을 조롱한 지구인들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상황이 그녀에게 유리하게 흘러간다는 생각에 잠시 동안 속상했던 모든 것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야.” 그녀의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그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왜? 뭐 이렇게 말이 많..” 그 순간 ‘퍽’ 소리와 함께 유나의 시야가 흔들리며 곧이어 더러운 교실 천장이 보였다.


“으.. 으..” 교실 바닥에 널브러진 그녀는 고통스럽게 신음을 뱉으며 꿈틀거렸다. “후우. 야. 이미 너는 끝났어. 누구한테 명령하고 나자빠졌어?” 그는 크게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고통에 휩싸인 유나는 이제서야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녀는 교실 바닥에서 꿈틀 거리며 지구인들의 웅성거림을 들었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일어서려 했지만 무자비한 선우의 주먹질에 통증이 너무 심해 움직일 수 없었다.


“컥.. 컥..” 하지만 그녀는 수치스러운 지금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계속 몸을 꿈틀거리는 도중 ‘퍽’ 소리와 함께 옆구리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헉!” 순간 유나는 신음도 뱉지 못하며 다시 바닥에 널브러졌다.


“아. 씨!” 몸뚱이가 무슨 돌이야!” 유나의 흐릿한 시야에 말라비틀어진 여성 직구인이 눈을 내리깔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 오늘은 어디로 갈까?” 유나의 옆구리를 발로 찬 그녀는 교태를 부리며 그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향기로운 냄새에 취한 그는 천박하게 웃으며 거리낌 없이 새로운 장난감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는 의자에 앉아 히죽이며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유나를 내려봤다.


“모두 자리에 앉아! 수업 시작한다.” 여전히 바닥에 꿈틀거리는 유나를 조롱하던 지구인들은 바닥에 그녀를 내버려 둔 채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느 누구도 비참하게 꿈틀거리는 유나를 돕지 않았다.


“끼이익.. 쾅!” 퇴근한 소현은 꺼져있는 조명을 켰다. “탁.” 밝아진 거실 의자에는 무기력하게 멍하니 거실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딸의 모습이 보였다.


“깜짝이야!” 소현은 놀라며 딸을 바라봤다. 하지만 기억 속의 똑똑하고 당찬 딸은 보이지 않았고 초점을 잃고 멍하고 생기가 없는 딸이 보였다.


“유나야. 무슨 일 있니?” 심상치 않은 딸의 모습에 걱정을 하며 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하지만 유나는 여전히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멍하니 천장만 바라봤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딸의 모습에 마음이 불안해진 소현은 딸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가 물어보면 대답을 해야지.” 그 순간 소현의 눈에 입술이 찢어지고 얼굴 한 쪽이 부어오른 딸의 얼굴이 보였다. “여기 왜 이래? 누가 이랬어!” 소현은 딸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소리쳤다. 그 순간 유나의 눈에 생기가 돌며 놀란 듯이 "괜찮다"라는 말을 한 뒤 소현은 밀며 방으로 들어갔다.


소현은 당장 방에 들어가 사소한 부분까지 묻고 싶었지만 유나가 대답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에 의자에 앉아 화를 참으며 생각했다. “그래.. 학교에 가봐야지. 지금 일이 중요한 게 아니야.” 그녀는 처음 보는 딸의 모습에 불안을 느끼며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봤다.


“야. 저기.” 유나가 지나가는 길에서 보는 지구인들은 수군거리거나 침을 뱉었고 어떤 지구인들은 고의적으로 어깨를 밀치며 지나갔다. 하지만 혼자가 되어버린 유나는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고 자신의 죗값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크하하.” “꺄악!” 교실에 도착한 유나의 눈에 새로운 장난감과 천박하게 놀고 있는 선우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저랬구나..” 그들의 그룹에서 쫓겨나 그들을 조금이나마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유나는 이제서야 과거 자신의 잘못을 느꼈다.


자신이 괴롭힘과 폭행을 당해보니 알게 되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힘들 때 도와주는 지구인이 없으니 알게 되었다. 그동안 자신이 잘못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비로소 혼자가 되었을 때 자신을 둘러보며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되돌리기에 너무 늦어버렸다. 어둠 속에 빠져버린 유나는 더 이상 삶의 목적을 찾지 못하고 예전에 자신이 행했던 악행들을 고스란히 돌려받으며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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