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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Sep 01. 2023

서현의 나날.

29화. 과거. (25)

"서현아. 잠시만." 교사는 교실에서 나가려는 서현을 불러 세웠다.


"네. 선생님." 서현은 걸음을 멈춘 채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옛 지구인이었지만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은 기름에 떡져서 딱 달라붙어 있었고 과도한 음식물 섭취와 운동 부족으로 망가진 돼지 지구인의 머리통과 같이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면 터질 것 같은 붉은 볼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터질 것 같은 배가 출렁일 정도로 어색하게 웃으며 서현에게 말했다.


"킁킁. 어머니는 잘 계시니?" 그는 코털이 삐져나온 코로 거칠게 숨을 몰아 쉬며 말했다. "네.. 잘 계셔요." 서현은 불결한 선생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킁킁. 그래. 서현이 요즘 나를 덜 찾아오더라." 그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네..." 그는 제자의 반응에 인상을 찡그렸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랬구나. 선생님은 서현이가 이것저것 물어보러 찾아올 때가 좋았는데.." 얼마 전까지 자신이 찾아가 질문을 하면 귀찮아하던 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라 당황스러웠지만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 서현을 조용히 바라보던 선생님은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흠. 흠. 그래. 다음에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렴. 어머니에게도 잘 말씀드리고." 서현은 어색한 선생님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떴다. 서현은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지금 경험했던 일을 기록했다.


"집에 가서 찾아봐야지." 서현은 평소와 다른 선생님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계속 엄마에 대해 말하는 모습이 어딘가 불쾌했다.


혜은은 눈에 띄게 화려하지 않았고 우아하거나 세련되지 않았지만 하얗고 몽실몽실한 털과 동그랗고 새까만 두 눈 그리고 옅게 은은한 붉은 입술은 많은 지구인들에게 단아하고 바른 이미지를 안겨줬고 그녀를 좋아하는 남성 지구인들도 많았다. 아버지를 닮은 서현과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이상해. 오늘 같은 경험을 한 지구인들이 있을 거야." 서현은 구시렁 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삐빅. 삐빅." 오늘도 바쁜 시간에 어김없이 업무용 알람이 울렸다. "하아.." 혜은은 다른 지구인이 듣지 못하도록 홀의 구석에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딸의 중심부 대학 입학을 위해 그와 가까워지기로 결심을 한 뒤에는 알람을 무시할 수 없었다. "네. 사장님." 그녀는 한숨을 쉰 뒤 알람을 받았다.


"크크. 이제는 바로 받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연락을 받지 않던 혜은에게 비아냥 거리듯이 말했다. 그런 그의 형편없는 행동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오직 딸의 미래만 생각하며 참았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지금이 가장 바쁠 시간이잖아요." 그녀는 차분히 말했다. 하지만 그는 상관없다는 듯이 얘기했다. "보고 싶어. 언제 끝나?" 한동안 혜은은 그의 역겨운 말을 들으며 아무도 없는 홀의 구석에 서 있었다.


"타닥.." 집에 도착한 서현은 아까와 비슷한 상황을 찾기 시작했다. 몇 시간 전 상황과 비슷한 내용이 모니터 화면에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화면을 내리며 내용을 확인했다.


"... 이게 뭐야?" 서현이 읽고 있는 대부분의 글 내용은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 또는 불륜에 대한 내용이었다. 사례를 읽고 있는 서현은 얼굴이 붉어지며 당황스러웠다.


"설마.. 엄마도.." 잠시 동안 선생님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것보다는 엄마가 잘못된 선택을 하여 불행하게 살게 될 것 같은 걱정에 휩싸였다.


".. 한 번 여쭈어볼까?" 서현은 고민을 많이 했지만 정확하게 엄마의 상태를 알 수 없고 알고 있다 하여도 어떤 식으로 말을 시작해야 될지 고민되었다.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며 고약한 사례가 가득한 모니터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혜은은 웃으며 얘기했다. 손님을 밖으로 안내한 뒤 다른 일을 하기 위해 홀로 들어가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휴.. 팀장님." 혜은은 갑작스럽게 강한 힘이 느껴져 뒤를 돌아본 순간 소현이 보였고 조금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방금 사장님에게 연락이 왔어." 그녀의 말을 들은 혜은은 조금 궁금해하며 얘기했다. "사장님이요?" 소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하지만 그 뒤로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숙여 바닥을 쳐다보았다.


"... 혹시 어떤 일 때문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혜은은 소현의 얼굴을 보며 얘기했다. "... 사장님이 혜은 씨 업무를 조정한데." 소현은 한숨을 쉰 뒤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혜은은 고개 숙여 인사했다. "혜은 씨." 소현은 주위를 살펴본 뒤 그녀의 팔을 잡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네. 팀장님." 혜은은 그녀가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아마도 사장과 지나치게 가깝게 지내지 말라는 내용일 것이다. 평소 사장의 행실을 보면 자신을 걱정해 주는 소현이 이해되었다.


"아마도 사장은 혜은 씨를 본인 바로 옆자리에 앉히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소현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마도 비서 아니면 새로운 직책을 만들겠지. 예전에도 그랬으니까." 혜은은 그녀의 말을 듣던 중 '예전'이라는 단어가 신경 쓰였다.


소현은 말을 이어갔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사장하고 엮여서 끝이 좋았던 지구인은 거의 없었어요." 그녀의 말을 듣던 혜은이 말했다. "네. 예전에 팀장님과 동료들이 나눴던 얘기가 떠오르네요." 소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혜은 씨도 알고 있겠지. 그럼에도 마음을 정한 거고." 그녀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혜은을 바라봤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어디 멀리 떠나는 것도 아닌걸요." 혜은은 소현의 걱정을 줄여주기 위해 마음과 다르게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알았어요." 이미 마음을 정한 그녀가 자신의 불안을 줄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혜은 역시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혜은 씨. 오랜만에 둘이 저녁 먹어요." 소현은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혜은에게 말했다. "네. 팀장님." 혜은은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그녀들은 웃으며 좁은 복도를 함께 걸었다.


"서현이는 어때요?" 소현은 밥을 먹고 있는 혜은에게 물었다. "잘 지내고 있어요.." 혜은은 조용히 음식을 삼키며 말했다. "다행이에요. 전에 친구 일을 돕느라 힘들었다고 들었는데 다행이네요. 걱정이었는데.." 소현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소현의 말에 이상함을 느낀 혜은은 차분하게 물었다.


"혹시 어떤 부분이 걱정이셨나요?" 소현은 조심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말했다. "보통 서현이 같이 똑똑한 아이들은 본인이 해결하기 힘든 일을 겪으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방법을 찾아요." 소현은 혜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네.. 그렇죠. 궁금하니까요. 어디가 부족해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는지..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지.." 소현은 혜은을 보며 말했다.


"제가 보기에 서현이도 그랬을 것 같아요.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소현은 자신의 말을 듣고만 있는 혜은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혹시 서현이가 중심부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고 말하던가요?" 혜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오히려 본인은 지금 생활동 괜찮다고 말했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춘 채 한숨을 쉬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 일이 있기 전보다 더욱 열심히 공부해요. 그리고 힘들었는지 가끔 방에서 혼자 울고 있는 모습도 봤어요." 소현은 그녀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그런 소현의 모습을 확인한 혜은은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저도 연구원이 되기 위해 공부를 해봐서 알고 있어요. 중심부와 주변부 대학에서 배우는 것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요." 혜은은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분명히 서현이는 중심부에서 공부를 하고 싶어 할 거예요." 그녀의 말을 듣던 소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아마도 혜은 씨 생각이 맞을 거예요." 소현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나는 혜은 씨가 사장님과 엮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그와 엮여서 행복한 지구인을 본 적이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전과 다르게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혜은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네. 동료분들도 같은 말씀을 해주셨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혜은은 소현에게 말했다. "그런데 저는 도저히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겠어요." 혜은은 고개를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현은 혜은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래요. 이해해요. 혜은 씨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요."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혜은에게 말했다.


"혜은 씨 만약 너무 힘들면 꼭 말해줘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도울게요. 꼭 얘기해요." 소현은 울먹이는 혜은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혜은은 울먹이며 "감사하다"라고 말했고 한동안 소현은 울먹이는 그녀를 감싸 안고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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