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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Sep 22. 2023

서현의 나날.

32화. 과거. (28)

"오늘 일정은.." 혜은은 전화를 붙잡고 얘기를 시작했다.


"아. 뭐. 특별한 내용 없지?" 전화기 너머로 귀찮다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없습니다." 혜은은 예의를 갖춰 건조하게 말했다. "답변이 왜 그래?" 그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따지듯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조금 더 크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혜은은 최대한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예의를 갖춰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윤식은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쯧.. 조금 더 상냥하게 말하면 어때서."


"..."


혜은은 아무런 반응 없이 전화기를 잡은 채 그의 닫혀있는 사무실 문을 바라봤다. 며칠 전 딸과 다툰 혜은은 그날 윤식과 함께 밤을 보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깊은 고민은 순간적인 격한 감정으로 인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날 이후 예은의 삶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홀에서 일하지 않고 윤식의 사무실 앞에 있는 공간에 홀라 앉아 일을 했다. 직책은 그의 일정과 사무실 청소 및 잡다한 업무처리였다. 베이커리에서 일하는 지구인들은 그녀를 '비서'라는 직책으로 불렀지만 혜은은 알고 있었다. 단순히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녀는 괴로워하지 않기로 결심했고 오로지 사랑하는 딸의 빛나는 삶만 생각했다.


"왜 아무런 말이 없어!" 그는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오며 소리쳤다. 전화기를 잡은 채 다른 생각을 하던 혜은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는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 혜은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조금 인상을 찡그리며 자리를 피할 준비를 했다. 조금씩 자리에서 움직이는 혜은의 모습을 발견한 그는 빠르게 다가가 슬며시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혜은의 어깨를 힘으로 누르며 웃었다. 그의 압박에 혜은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없었다. 이미 그에게 도움을 받았고 결국 의존하게 되었다.


"사장님. 여기는 직장입니다." 그녀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절 의사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아주 작은 희망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직장 아. 그렇기는 하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다가 갑작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나와 자기가 있는 이 공간은 직장이 아니지." 그는 의자에 앉아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혜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미 수 차례 그의 역겨운 스킨십을 많이 당했지만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고 매번 도망가고 싶은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럴 때 제발 자신을 찾는 연락이나 동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이 마음속에 가득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녀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사장님. 전에도 부탁드렸잖아요.. 직장에서는.." 혜은은 침착하고 간절하게 부탁했지만 그는 그녀의 간절함을 무시한 채 강압적으로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더 이상 그런 말은 하지 마! 듣기 싫어!" 그는 혜은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결국 혜은은 오늘도 그의 역겨운 행동을 받아들이며 자신을 죽여나갔다. 이미 자신의 꿈을 잊어버렸고 오로지 결과를 알 수 없는 딸의 성공한 미래만이 전부였다.


"야.. 쟤 지각한 거야?" 서현이 교실에 들어오자 같은 반 애들이 끼리끼리 모여 수군거렸다.


"아씨. 시끄러워.." 이미 칠판 앞에 선생님이 수업을 준비하고 있음에도 큰 소리로 의자를 밀며 삐딱하게 앉았다.


"미친 거 아니야?" "내가 듣기로는 쟤 엄마가 부자를 꼬셨다는데." 아이들은 서현의 주변에서 수군거리며 곁눈질로 서현을 힐끗힐끗 바라봤다. "아이씨..!" 서현은 귀찮다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서현을 무서워하거나 배려하는 아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평범한 주변부 학생과 다르게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호기심이 많았던 서현은 공부도 잘해 선생님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서현이 점점 더 뛰어나고 성숙한 지구인이 되어갈수록 같은 반 아이들은 서현을 질투하고 괴롭혔다.


거의 유일한 친구였던 아영이와 헤어진 뒤로 서현은 더욱 고립되었다. 하지만 다행히 공부에 대한 관심, 엄마의 따뜻한 지원 그리고 중심부 대학 진학에 대한 기대로 외롭고 힘든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중심부 대학 진학의 어려움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엄마와의 다툼으로 조금씩 학교 생활이 엉망이 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구 지구인의 모습을 한 '그'와 함께 왔다. 눈치가 빠른 서현은 '그'가 엄마와 어떤 관계인지 파악했고 인사도 나누지 않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목적지 없이 달리는 서현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결국 엄마는 자신을 위해 본인의 삶을 포기한 것이다. 그날 늦게 집에 돌아온 서현은 또다시 엄마와 그렇게 다투었고 서현의 방황은 더욱 심해졌다.


"조용히 하고 똑바로 앉아." 교사는 삐딱하게 앉아있는 서현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서현은 듣지 못했다는 듯이 여전히 삐딱하게 앉아 창 밖을 바라봤다. 한동안 교사는 그런 서현을 바라보며 인상을 구겼다.


"왜 저러는 거야?" "몰라. 이제 막 나가기로 했나 봐." 같은 반 아이들은 서현과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교사를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조용히 해! 수업 시작해야 되니까!" 교사는 아이들에게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서로 수군거리며 떠들었다.


"그만! 조용히 해! 야! 너는 똑바로 앉고! 수업 준비 해!" 교사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서현과 아이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이들의 수군거림은 멈췄지만 들떴던 분위기는 가라앉지 않았고 가장 눈에 거슬리는 서현은 여전히 삐딱하게 앉아 고개를 꺾은 채 창 밖을 바라보았다.


"... 야!" 결국 화를 참지 못한 교사는 씩씩거리며 서현에게 다가가며 소리를 질렀다. "너.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수업 준비를 하라고 했지?" 얼굴을 붉힌 채 소리를 지르는 교사를 바라보며 서현은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일렁였다. "지금 성적이 좀 괜찮다고 내 말을 안 듣는 거야?" 그의 말을 듣던 서현은 인상을 찡그린 채 고개를 까닥거렸다.


"이게 진짜. 너 수업 끝나고 교무실로 와! 지금은 수업을 해야 되니까. 똑바로 앉고."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싫은데요. 집에 빨리 가야 돼요.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지금 하세요." 서현은 교사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얘기했다.


"이게 진짜! 당장 나와! 어서!"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한 그는 얼굴이 붉어진 채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질렀다.


"그냥 여기에서 말씀하세요. 귀찮으니까." 불과 얼마 전까지 예의가 바르고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던 밝은 서현은 완전히 다른 학생이 되었다.


"너. 계속 그러면 부모님이 학교에 오셔야 될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교사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그러자 서현은 이죽거리며 말했다. "아. 그러면 선생님은 좋으시겠네요." 서현의 말을 들은 교사는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서현을 바라봤다.


"어차피 지금 선생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그냥 수업이나 진행하세요." 서현의 말이 끝나자 교사는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서현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하지만 서현은 겁을 먹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대들었다.


결국 수업은 진행되지 못한 채 심한 욕설이 오가는 시간이 되었고 한동안 지속된 욕설이 끝난 뒤 교사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휴우.. 부모님이나 모시고 와." 그는 자신의 말을 한 뒤 교무실로 향했다. 머리가 헝클어진 서현은 욕설을 뱉으며 책상에 올려져 있던 책을 집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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