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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Sep 29. 2023

서현의 나날.

33화. 과거. (29)

"하하. 감사하기는요. 제가 항상 감사하지요." 윤식은 로스터리의 단골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며 쾌활하게 웃었다. 그는 자신의 명성과 돈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언행을 바꾸는 지구인이었고 이러한 자신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랑스러워했다.


"원래 다 그런 거지. 솔직히 나처럼 못하는 놈들은 진실이니, 올바름이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지. 자기들도 돈을 벌어 봐. 아마 나보다 더 악독하고 변덕스럽게 살아가겠지!" 그는 항상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했다.


"어휴. 불편한 것은 없으시죠? 아. 하하. 언제든지 찾아주세요." 혜은은 여전히 거짓 웃음을 흘리는 그를 따라다니며 일정을 확인하여 그의 업무가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알려줬다.


"잠시 비켜주세요. 잠시만요." 그가 다른 지구인들과 얘기를 하는 사이 멀리에서 친숙하고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리는 곳에는 얼마 전까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음식을 나르고 단골손님들과 대화를 나눴다. 한동안 혜은은 그를 잊은 채 그리운 표정으로 그녀들을 바라봤다.


"혜은 씨. 혜은 씨!" 어디선가 듣고 싶지 않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죄송합니다." 혜은은 옆에서 약간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가 보였다.


"..."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긴장한 혜은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며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이런 그의 침묵을 느낄 때마다 숨이 막혀왔다.


"... 아까 어떤 놈을 보면서 그런 표정을 지은 거야?" 손님이 많은 낮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 탈의실 복도에 도착한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제가요? 아까라니요.." 혜은은 그의 말을 알아 들었지만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 않아 모른 척했다. "제가요? 정말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는 험악하게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 정말 모르겠습니다.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혜은은 최대한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아 고개 숙여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지금 나하고 장난해? 본인이 잘못한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계속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그는 혜은의 행동을 보며 점점 더 숨을 거칠게 몰아 쉬며 말했다. 그 순간 혜은은 답답함을 참을 수 없어 크게 한숨을 쉬었다.


"뭐야? 지금 한숨을 쉬어?" 혜은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그는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죄송합니다. 정말 몰라서 그렇습니다.." 자신의 얼굴에 침을 튀기며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 이게 정말. 아까 내가 돼지 같은 놈들하고 얘기할 때 홀에 있는 놈들을 보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잖아!" 여전히 얼굴을 붉히고 찌푸린 채 소리를 질렀다.


"아. 그건 홀의 손님들을 본 게 아니라 예전 동료들을.."


"웃기고 있네. 아까 내가 표정을 보니까. 그런 감정이 아니었어!" 그는 꽥꽥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장님. 예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끊고 상스럽고 저질스러운 욕설을 뱉었다.


그를 잘 알지 못하거나 가끔 만나는 사람들은 거짓된 그의 모습에 넘어가 좋은 지구인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특히 여성 지구인에 대한 집착과 의심이 심했고 조금만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으면 불 같이 화를 내고 괴롭혔다. 이미 수차례 이런 경험을 한 혜은은 그의 광기에 더 이상 놀라지 않았지만 불쾌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 잘못했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혜은은 대화를 그만하고 싶은 마음에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럼에도 그는 한동안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통로를 오가는 직원들이 늘어나며 그들의 신경 쓰인 그는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는 말과 함께 씩씩 거리며 자리를 떴다. 잠시동안 어두운 통로에 홀로 남은 혜은은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점점 그녀는 자신의 삶은 끝났다며 좌절하면서도 하나뿐인 딸의 미래를 생각하며 무너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눈물을 닦았다.


"야. 야!" 뚱뚱하고 덩치가 산만한 여성 지구인이 책상에 엎드려 있는 서현을 툭툭 쳤다. "... 뭐야.?" 엎드려있던 서현은 귀찮다는 듯이 몸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하아. 일어나." 뚱뚱한 지구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뭐? 돼지 새끼가 뭐라고 하는 거야?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여전히 서현은 책상에 엎드린 채 고개만 살짝 돌려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직도 선생들이 너를 좋게 생각해 줄 것 같냐? 좋은 말로 할 때 조용히 따라와라." 뚱뚱한 지구인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뭐래? 놀고 있네. 너야 말로 좋은 말로 할 때 꺼져라." 서현은 자신보다 몇 배 덩치가 큰 그녀에게 기죽지 않고 욕설을 뱉은 뒤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아씨!" 뚱뚱한 지구인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책상에 엎드려 있는 서현을 밀쳤다. 그 순간 굉음과 함께 엎드려 있던 서현이 교실 바닥으로 쓰러졌고 의자와 책상도 쓰러졌다.


"아.." 갑작스럽게 바닥으로 떨어진 서현은 온몸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괜찮은 척 욕설을 뱉으며 벌떡 일어섰다.


"돼지 같은 년이 미쳤나!"


서현의 욕설에 화가 난 그녀는 한 층 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리를 질렀다. "별 것도 아닌 년이!"


"꺼져! 따돌림이나 당하던 년이 요즘 설치고 다니는 꼬락서니를 보면 진짜 어이가 없어서." 서현은 발부터 천천히 그녀를 훑어보며 빈정거렸다.


"이 년이! 너 오늘 뒤졌어!" 뚱뚱한 그녀는 눈을 희번덕 거리며 서현에게 달려들었다. 악에 받친 서현도 그녀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녀에 비해 아담한 체격 때문에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죽어! 죽어!" 바닥에 내팽겨진 서현 위에 올라탄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녀의 밑에 깔린 서현은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하여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했다.


"헉.. 헉.." 신나게 서현에게 주먹을 날리던 그녀는 헐떡이며 일어섰다. "아까 나한테 욕하던 년은 어디 갔냐?"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바닥에 널브러진 서현을 내려다보며 비아냥거렸다.


뚱뚱한 지구인은 같은 반 친구들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상황에 취해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친구들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알아차린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서현을 바라보는 순간 머리 위로 의자를 들어 올린 서현이 보였다.


"아악!" 그 순간 '퍽' 소리와 함께 그녀의 시야가 흐려졌고 주변에서는 비명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녀는 불법 도축장에서 학대당한 돼지처럼 몸을 덜덜 떨며 교실 바닥에 널브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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