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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Sep 15. 2023

서현의 나날.

31화. 과거. (27)

"..." 집에 도착한 서현은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컴컴한 천장을 바라봤다.


"중심부.."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둠이 내린 컴컴한 방에서 홀로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끝을 알 수 없는 고민 속으로 빠져들었다.


'고민' 고민은 하면 할수록 깊은 내면에 숨겨져 있는 부정적 감정을 꺼내온다. '고민'이 깊어질수록 삶은 긍정적인 방향이 아닌 부정적인 방향으로 끌려간다. '고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닌 타인과 함께 얘기하고 도움을 받으며 헤쳐나가야 한다. 혼자만의 '고민'은 자신을 발전시킬 때도 있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삶을 망가뜨린다. 어린 서현은 이를 경험하지 못했고 이제 막 고통스러운 경험을 시작하였다.


"아.. 어쩌지.."


"탕. 탕. 탕." 현관문 밖에서 계단을 밟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 엄마?"


"끼익.. 쾅!" 현관문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가 닫혀있는 방문을 뚫고 들어왔다.


"다녀왔어." 닫힌 방문 너머로 반갑고 따뜻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서둘러 엄마와 얘기하고 싶은 서현은 닫혀있던 방문을 급하게 열며 엄마에게 달려갔다.


"다녀오셨어요!" 평소와 다르게 어딘가 들떠있는 딸의 얼굴을 본 혜은은 조금 당황하며 말했다. "응.. 다녀왔어. 오늘 무슨 일 있었니?" 혜은은 불안해하며 말했다.


"아.. 아니요. 별일 없어요." 서현은 불안해하는 엄마를 힐끗힐끗 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평소와 전혀 다른 딸의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없는 혜은은 천천히 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괜찮아. 걱정이 있으면 말해 줘." 그녀는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주의 깊게 딸의 표정을 살폈다. 따뜻하면서도 답을 원하는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는 서현의 눈꼬리와 입술이 살짝 떨렸다.


"저.. 그.." 서현은 고개를 숙여 바닥을 바라보며 천천히, 조금씩 말하기 시작했다. "선행님이 중심부 대학.." 서현은 말을 꺼냈지만 긴장한 나머지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여전히 웅얼거리는 듯한 모습에 혜은은 부드럽게 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서현아. 괜찮아. 조금 더 크게 말해줄래?" 서현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엄마의 말에 움츠리면서도 마음을 가다듬으며 조금씩 크게 말했다.


"오늘 수업이 끝난 뒤에 저를 부르시더라고요." 서현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이?" 혜은은 조금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네.." 여전히 서현은 바닥을 바라보며 손을 꼼지락 거리며 말했다. "왜? 뭐라고 하셨는데?" 혜은은 얼마 전에 만났던 추접스러운 그의 모습이 떠오르며 분노로 가슴이 떨려왔다.


"그놈.. 아니.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어? 엄마한테 자세히 얘기를 해줄래?" 그녀는 딸을 바라보며 점점 빠른 속도로 말했다. 혜은은 딸에게 화난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눈치가 빠른 서현은 엄마의 화를 느꼈고 더욱 주눅 든 채 말했다.


"그.. 선생님이 우수 학생으로 선정하면 된다고.."


"우수 학생?" 딸의 말을 듣던 혜은은 거칠게 숨을 쉬며 말했다.


"네.. 우수 학생 선발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점점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인상이 구겨지는 엄마의 모습을 확인한 서현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우수 학생? 웃기고 있네..." 혜은은 마음속으로 혼자 얘기했다. 박사로 연구소에서 일을 할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한 그녀는 우수 학생 추천이라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교사나 교수가 성적이 뛰어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선발하여 특별 장학금 또는 중심부 명문대학 입학과 훌륭한 직장에 입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도였다. 이를 통해 빈부격차, 계층 간 갈등을 줄이려는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진 빈부 격차와 치유할 수 없는 골이 깊은 계층 갈등은 선한 정책도 변질시켰다.


어차피 본인들이 추천해도 중심부로 진출할 수 없다는 현실을 알고 있는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학생들을 유혹하여 데이트 상대로 가지고 놀다 관심이 없어지면 연락을 끊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배우지 못하고 정책에 관심이 없는 주변부 지구인들은 이런 더러운 거짓에 넘어가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겪으며 살아갔다.


혜은은 훤히 보이는 교사의 의도에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며 인상을 쓰며 말했다. "서현아. 더 이상 선생님의 말은 듣지 마." 엄마의 일그러진 표정을 확인한 서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놀랐겠다. 오늘은 어서 자." 그녀는 딸을 부드럽게 껴안으며 말했다. 하지만 서현은 따뜻한 엄마 품에서도 중심부 대학입학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지 못했다. 혜은이 서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긋이 바라보는 순간 서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며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엄마. 그런데 선생님 말씀대로 우수 학생이.." 평소와 다른 딸의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단호하게 서현의 말을 끊으며 얘기했다. "서현아. 걱정하지 말고 엄마를 믿고 지금처럼 공부에 집중해. 그러면 다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지금처럼 엄마가 로스터리의 일로 벌어오는 돈으로는 절대 중심부 대학에 입학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을 알고 있는 서현은 대책 없어 보이는 엄마의 말에 실망했다. 서현은 어두운 표정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찾아낸 자료들에 대해 얘기했다.


"저는 솔직히 모르겠어요. 계속 지금처럼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제 서현도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방법이 없잖아요.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요." 서현은 어려운 현실에 억울함과 분노가 차올라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저는 엄마가 그런 말씀을 하실 때마다 겁이 나요." 서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겁? 무슨 말이니?" 혜은은 울먹이는 딸을 보며 말했다. "..." 하지만 서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아니. 무슨 겁이 나? 말 좀 해줘." 혜은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울기만 하는 딸의 모습을 보며 답답함과 알 수 없는 화가 조금씩 치밀었다.


"... 흑.. 봤어요.." 서현은 훌쩍이며 말했다.


"크고 똑똑히 말해. 못 알아듣겠어!" 혜은은 울고 있는 딸에게 소리쳤다.


"엄마 나이와 비슷한 분들이 하는 짓들을 확인했어요!" 서현은 자신에게 윽박지르는 엄마를 똑바로 쳐다보며 화를 냈다.


"짓? 너 그게 무슨 버릇없는 말이야!" 더 이상 혜은도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다른 남자 지구인. 배우자가 있는 지구인하고 어울리고.." 서현은 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으나 혜은이 중간에 말을 끊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 방법 말고는 없잖아요! 솔직하게. 없잖아요!" 서현의 목소리는 떨리면서도 날카로웠다.


날카롭고 냉정하지만 현실적인 딸의 말에 넋이 나간 혜은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울부짖는 딸의 모습을 바라봤다. 자신의 하나뿐인 딸이. 자신 삶의 전부인 딸이 인상이 일그러진 채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었다.


"..." 그런 것이 아니라고, 너를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 없다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남편이 죽은 뒤 겪은 많은 고통들이 떠오르며 혜은의 가슴과 머리를 뜨겁게 만들었다.


"너! 어디에서 배웠어? 이런 버릇없는 행동은!" 혜은도 더 이상 화를 참지 않고 소리를 지르는 딸에게 소리쳤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남편이 죽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마음속 깊은 곳에 억눌려있던 감정이 폭발하며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버티는 이유가 뭔데! 누구 때문인데!" 그녀는 점점 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말했다. "나도 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위로받고 싶어!" 그녀는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나도.. 나.." 그녀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서 격렬하고 거칠게 감정을 뱉어낸 뒤 숨을 고르며 앞을 바라봤다.


"..." 숨을 헐떡이는 그녀 앞에 눈의 생기를 잃은 채 자신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는 딸이 보였다.


"서현아.. 저기.." 가슴 깊숙한 곳에 억눌러있던 분노가 입을 통해 흩어진 뒤 정신이 돌아온 혜은은 말을 더듬으며 딸의 이름을 불렀다.


"... 죄송해요. 저 먼저 잘게요." 생기를 느낄 수 없는 딸의 얼굴을 보며 자책을 한 혜은은 딸의 이름을 불렀지만 서현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방문에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아.. 아.." 위태롭게 서 있던 혜은은 다리에 힘이 풀리며 제자리에 주저앉아 흐느껴 울었다. 하지만 힘들 때 항상 같이 있던 하나뿐인 딸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적막한 거실에는 혜은의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그녀는 세상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었다.


"... 아니야. 여기에서 쓰러지면..." 한동안 바닥에서 훌쩍이던 혜은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협탁 위에 있는 전화기를 들었다.


"... 사장님. 지금 잠시 만날 수 있을까요?" 그녀는 그날. 자신과 딸의 새로운 삶을 위해 어두운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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