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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Oct 20. 2023

서현의 나날.

36화. 과거. (32)

"그 얘기 들었어?"


"뭐?" 로스터리 서비스팀 직원들은 홀 이곳저곳에서 수군거렸다.


"혜은 씨 말이야." 직원들 무리 중심에 있는 지구인이 말했다. "혜은 씨가 왜? 무슨 일 있어?" "어머? 무슨 일?" 그녀의 말을 듣던 지구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본 뒤 몸을 굽히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얼마 전에 청소팀 직원이 비서실 쪽 통로를 청소하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살금살금 다가갔더니 민망한 소리가 들렸데." 그녀의 말에 직원들은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어머! 어머! 무슨 소리!"


"조용히 해! 손님에게 다 들려!" 함께 있던 직원이 큰소리로 말하자 옆에 있던 다른 직원이 그녀의 옆구리를 찌르고 목소리를 낮추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무슨 소리겠어. 사장님하고 혜은 씨하고 애정행각 벌이는 소리겠지." 다른 직원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어머! 어머!" "설마?" "정말?" 어느새 홀의 다른 곳에서 일을 하던 직원들도 대화에 참여하여 수군거렸다.


"혜은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웬일이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한편으로는 애가 있으니까 사장하고 연애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직장에서 까지 이럴 줄을 몰랐네."


"결국 혜은 씨도 이렇게 되네."


이제는 홀에서 일을 하는 많은 직원들이 모여 큰 소리로 말했다.


"자. 자! 잘 모르는 일은 그만 말하고 다음 영업 준비에 집중하자!" 다음 영업시간을 위해 홀을 점검하던 소현은 직원들에게 소리쳤다. 그녀의 말에 직원들은 투덜거리며 부리나케 흩어졌다.


소현은 혜은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숨기고 싶은 자신의 과거까지 말했지만 결국 걱정했던 길을 걷게 된 그녀의 모습을 보며 화가 치밀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되었다.


"만나면 얘기를 해야겠어." 그녀는 한숨을 쉬며 다시 홀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움직였다.


"간지러워. 그만해." 혜은은 자신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는 그에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윤식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는 처음에 갑작스럽게 태도가 변한 그녀를 의심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어떠한 목적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녀를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마음대로 이용했다.


"조금 더 일찍 이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보다 더 많이 해줬을 텐데." 그는 정복자의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말없이 그를 올려다봤다. 날카롭고 이성적인 예전의 혜은은 어디에도 없었다.


"조용히! 그만! 수업 시작한다. 야! 내가 앉으라고 했지!" 교실에 들어온 교사는 여기저기에 흩어져 떠들고 있는 아이들에게 소리 질렀다. 떠들던 아이들은 한숨을 쉬고 투덜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 야." 교사는 책상에 엎드려있는 서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서현은 책상에 엎드려 교사의 말을 무시했다. 그는 얼굴이 붉어지며 복어와 같이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뜨고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혜은과 윤식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아씨!" 결국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출석부를 책상에 집어던지며 욕설을 뱉었다. 그의 모습을 본 아이들은 그를 무시한 채 수군거렸다. 그는 굴욕적인 감정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방금 전까지 엎드려있던 서현은 천천히 일어나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 창 밖을 바라봤다. 언제나 짙은 안개가 낀 듯한 주변부의 풍경이 보였다.


"... 지겨워." 서현은 인상을 쓰며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시끄러웠던 교실에 정적이 흘렀다. 갑자기 조용해진 교실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자신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아이들이 보였다.


혜은과 윤식이 학교에 다녀간 뒤 서현에 대한 태도가 변한 교사의 모습에 아이들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녀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 뒤로 서현 앞에서 괴롭히거나 무시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서현은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었고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인한 변화가 아닌 사실에 분노했다. "도대체 전학은 언제 하는 거야?" 그녀는 다시 책상에 엎드리며 다른 아이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 조용하게 말했다.


엄마가 그와 함께 학교에 방문 한 날. 엄마는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새벽에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본 서현은 당황하면서도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서현은 차갑게 물었다. 하지만 혜은은 상기된 듯한 표정을 지은채 서현을 무시하고 방에 들어갔다. "어디 다녀오셨나고요." 그녀는 방문을 열며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미 혜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이불을 덮고 잠들었다.


엄마는 술에 취한 듯 비틀 되었지만 알코올 냄새는 나지 않았다. 서현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당황했지만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자신도 방에 들어갔다.


그날 이후 엄마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출근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듯했다. 가장 큰 변화는 새벽에 집으로 돌아온 다는 점이었다. 홀에서 일을 할 때도 늦게 퇴근하는 날이 많았지만 비틀 거리며 새벽에 들어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루는 엄마가 귀가할 때까지 거실 장의자에 앉아 기다렸다가 현관에 들어오자마자 엄마를 붙잡고 얘기했다. "도대체 뭐 하고 다니세요? 왜 매일 비틀 거리세요?" 하지만 혜은은 귀찮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리며 "어린애가 알 필요 없는 일이야."라고 말 한 뒤 서현을 밀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물러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서현은 닫힌 방 문을 열며 엄마에게 소리쳤다.


"어디 다녀오셨나고요!" 하지만 그녀는 이불을 덮은 채 아무 말 없이 누워있었다. 서현은 엄마에게 다가가 이불을 걷으며 다시 소리쳤다. "일어나 보세요!" 딸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들은 혜은은 그제야 눈을 찡그리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몰라! 다음에 얘기해!" 한동안 모녀는 말다툼을 했지만 결국 서현이 포기한 채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새벽에 들어온 혜은은 딸에게 말했다. "내일 이사 가. 지금이라도 준비해. 아니면 내일 등교 안 해도 괜찮으니까 내일 아침에 하던지." 그녀는 일방적으로 말한 뒤 방에 들어갔다. 일방적인 통보를 당한 서현은 화가 나면서도 이사를 하는 곳이 어디인지 궁금했다.


다음 날. 그 건물 1층에 '그'가 웃으며 모녀를 기다렸다.


"반갑다. 윤식이라고 한다."


서현은 묘한 그의 웃음을 보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그렇게 그와 서현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주변에서 시끄럽게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현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봤고 아이들이 가방을 들고 하나둘씩 교실 밖으로 나갔다. 서현은 천천히 허리를 펴고 기지개를 켠 뒤 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을 바라봤다. 그곳은 여전히 짙은 안개가 낀 듯 어두웠다.


"오늘은 정말 말해야지." 서현은 전학에 대한 확답을 받겠다는 다짐을 했지만 이내 이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매일 말하면 뭐 해? 바뀌는 것이 없는데." 그녀는 한숨을 쉬며 가방을 챙겨 교실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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