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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Oct 13. 2023

서현의 나날.

35화. 과거. (31)

"그런데.. 여쭈어 볼 게 있어요." 서현은 혜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응. 뭐든지 물어봐." 혜은은 자신이 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평소와 다른 엄마의 표정을 확인한 서현은 바닥을 쳐다보며 말했다.


"전학은 언제 가나요?" 혜은은 갑작스러운 딸의 질문에 당황한 듯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며 말을 더듬거렸다. "...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전학시켜 준다고 하셨잖아요." 서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엄마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혜은은 딸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계속 두리번거리며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 엄마의 모습에 화가 난 서현은 소리를 질렀다. "저는 그 말만 믿고 있었는데요. 정말 이제는 거짓말까지 하세요?" 혜은은 딸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아니야."라고 말했다. 하지만 서현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혜은을 노려봤다. 그런 딸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고 로스터리의 잡다한 업무와 그의 기분을 맞춰 주는데 집중하는 동안 진정한 목표인 '딸의 중심부 대학 입학'을 잊고 지낸 것이다.


"... 아니야. 잊지 않았어. 내가 이런 삶을 선택한 이유가 뭔데. 정신 차리자." 혜은은 마음을 다잡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딸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번 기회에 그 사람에게 말할게. 그래. 그러자." 혜은은 말 끝을 흐리지 않고 명확하게 말했다. "... 네..." 아까와는 다른 엄마의 모습을 확인한 서현은 짧게 대답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죄송해요." 갑작스러운 딸의 말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딸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전화기 너머로 짜증이 섞인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은은 그의 목소리에 짜증이 났지만 딸을 위해서 화를 참으며 말했다. "우리 서현이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서현이한테만 부모님을 모셔 오라고 했나 봐요."


"우리 서현이? 우리?" 혜은의 말을 들은 윤식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틱틱거렸다. 어이없어하는 그의 목소리를 알아차린 그녀는 딸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그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만 말했다.


"미안해요. 밤늦게 전화해서. 그리고 내일 학교에 동행해 달라고 부탁한 것도요." 혜은의 정중하고 부드러운 부탁에 기분이 좋아진 윤식은 이전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흐음.. 뭐. 애들이 학교 생활을 하다 보면 그럴 때도 있지." 더 이상 짜증을 내지 않는 그의 목소리를 들은 혜은은 그의 생각이 변하지 않도록 더욱 간절한 척을 했다.


"제발이요..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퇴학만은 막아야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그는 놀라며 얘기했다. "퇴학?" 혜은은 그가 질문할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네. 다른 애가 먼저 서현이를 때리고 욕했다고 말했는데 선생님께서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화를 내셨다고 해요."


"..."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예전에 그 선생님이 저에게 치근덕 거렸어요. 물론 제가 거절했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자기한테 치근덕거려?" 그녀는 그가 화를 내며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할 것이란 확신이 들었고 마지막 한 마디를 건넸다.


"아마도 내일 저 혼자 가면 또 치근덕 거릴 거예요. 아니. 서현이가 퇴학당하지 않게 해 준다며 더 치근덕 거릴 수 있어요. 그러면 저는.. 이번에는 거절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전화기 너머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내일 언제 가는 거야? 같이 가서 다시는 그놈이 자기에게 치근덕 거리지 못하도록 만들겠어." 한동안 그는 흥분하여 씩씩거렸다. 그의 과격한 모습을 확인한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이번 기회에 딸의 전학 문제까지 해결하겠다고 다짐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혜은은 교사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저기.." 교사는 당황스러운 듯 그녀에게 말했다. 그는 혜은이 상담을 위해 자신을 찾아왔을 때 그녀가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한 뒤 육체적인 관계를 요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그녀의 옆에는 명품을 걸치고 한 껏 치장한 구 인류 모습의 남성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윤식은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어 그를 내려보며 평소보다 저음으로 말했다. 교사는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의 얼굴만 볼 뿐이었다. 교사의 한심한 모습을 확인한 윤식은 우월감에 취해 로스터리 부하 직원들을 다루듯이 행동하기 시작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혜은 씨 남자 친구 윤식입니다."


"... 네? 아. 네. 처음 뵙겠습니다."


윤식은 짧게 인사를 한 뒤 말을 이어갔다. "서현이가 같은 반 친구에게 폭행을 당했다는데 사실입니까?" 그는 서현의 폭력 행동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채 다른 아이가 일방적으로 서현이를 폭행했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했다. 교사는 그의 일방적인 주장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대화를 하는 동안 주도권을 빼앗긴 채 질질 끌려다녔다.


"아. 선생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서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네." 교사도 힘이 빠진 듯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앞으로도 제 딸을 잘 부탁드립니다." 그와 교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앉아있던 혜은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교사는 자신보다 높은 계층 지구인이 된 듯한 그녀를 바라보며 인상을 구겼다.


지금까지 이런 우월감을 느껴본 적 없는 혜은은 딸의 미래와 상관없이 순수하게 기쁘고 행복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그의 모습을 보았고 평소와 다르게 그가 늠름하고 멋있게 보였다.


"이제 끝났지? 더 이상 저 놈이 자기한테 치근덕 거리지 못할 거야." 그는 피곤하다는 듯이 고개를 까닥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 그 표정 뭐야?" 윤식은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혜은은 그날 처음으로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졌다. 더 이상 그녀는 딸의 미래만 생각하는 '엄마'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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