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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Nov 06. 2023

서현의 나날.

38화. 과거. (34)

"좋은 아침." 윤식은 밝게 사무실을 청소하고 있는 혜은에게 인사했다.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그에게 안겼다. "무슨 일 있어?"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할 얘기가 있어요." 혜은은 그에게 안긴 채 고개를 들고 말했다.


"뭘까? 조금 무서워지는데?"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웃으며 말했다. "우리 서현이.." '서현'이라는 이름이 들리자 그는 인상을 쓴 채 그녀를 밀며 말했다. "우리? 우리라고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오래전 그는 혜은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그 일환으로 자신을 싫어하는 서현의 마음을 얻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서현의 또래들이 가장 선망하는 고가 브랜드의 물건을 선물하고 지적 호기심이 높은 서현을 위해 구 인류 석학의 유명한 강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하지만 그의 선물 공세가 심해질수록 관계가 멀어졌고 결국 인사도 안 하는 사이가 되었다. 윤식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꼬맹이를 보고 싶지 않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분노의 감정이 솟아났다.


"미안해요. 화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녀는 어딘가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대체 몇 번째야? 다음에도 그러면 그 애. 아니 서현이 얘기는 아예 듣지도 않을 거야." 그는 인상을 구기며 단호하게 말했다.


"알았어요. 미안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녀는 재차 사과를 했다. "그런데.. 오늘은 서현이에 대해 물어볼 게 있어요." 그녀는 오랜만에 차분하게 말했다. "빨리 말해. 오늘 일이 많으니까." 이런 그녀의 모습을 오랜만에 본 그는 무시하고 넘어갈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물었다. 그녀는 쭈뼛쭈뼛 거리며 말했다.


"서현이 전학은 언제 가능할까요?"


"전학? 무슨 전학?" 그는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예전에 했던 약속은 잊으셨나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점점 약해졌다. "약속 이라니.. 잠시만." 그는 조금씩 예전 혜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제 딸이 중심부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하셨잖아요." 더 이상 그녀는 쭈뼛쭈뼛하지 않고 단호한 표정으로 차분하고 명확하게 말했다. 윤식은 자신에게 거침없고 당당했던 혜은의 모습이 떠 올라 당황했고 순간 정신을 차린 그녀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 그랬지. 서현이 전학. 기억났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혜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말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시간이 많이 지났어요. 이러다가 중심부 대학이 아니라 주변부 학교를 졸업하게 생겼어요." 이제 그녀는 완전히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듯 보였다.


"아. 걱정하지 마. 입학은 당장 할 수 있어." 그는 헛기침을 한 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이번 주에 전학 갈 수 있도록 조치해 주세요." 혜은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알.. 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무실 청소는 다 했습니다. 오늘은 외부 일정은 없습니다. 나가보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사무실을 떠났다. 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넋이 나간채 의자에 앉아 닫힌 출입문을 바라봤다.


"후..." 잠시 동안이라도 그를 보고 싶지 않은 혜은은 어둡고 좁은 복도를 걸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젯밤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자신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딸의 눈빛은 머릿속에 짙게 낀 안개를 거두어주었다. 소파에 앉아 앞쪽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봤다. 모르는 지구인이 소파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누구야?" 여전히 거울에 비친 지구인은 그녀의 표정과 입 모양을 따라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거울 속의 지구인은 다름 아닌 혜은. 자신이었다.


짙기만 할 뿐 조화롭지 못한 화장, 기품이 느껴지지 않는 천박한 옷차림, 윤기 나지만 기름에 찌든 듯한 털. 과거 자신이 경멸하던 술집 여성 지구인의 모습이었다.


"너 누구야!" 그녀는 악을 지르며 탁자 위에 놓여있던 컵을 집어던졌다.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 산산조각 나며 주변에 흩날렸다. 한동안 미 찬 듯이 소리 지르며 목놓아 울었지만 자신의 전부인 딸은 관심조차 주지 않고 굳게 닫힌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녀는 새벽 동안 울며 변해버린 자신을 탓했다.

"혜은 씨." 혜은은 자신의 이름이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그곳에는 반가운 지구인이 서있었다.


"팀장님." 그녀는 한동안 소현을 바라본 채 눈물을 글썽이며 아무런 말 없이 자리에 서있었다. 소현은 지체하지 않고 혜은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안고 등을 토닥였다.


"얼마나 힘들겠어요. 정말." 그녀는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혜은은 그동안 힘들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조언을 무시한 자신이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입을 꾹 다문채 울먹였다.


"다른 곳에 가요. 얘기 좀 해요." 소현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권유에 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현은 다시 한번 울고 있는 그녀를 꼭 안았다.


소현은 처음부터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통스러운 상황에 던져진 혜은이 눈에 띄었고 과거의 자신과 같이 열심히 일을 하는 그녀를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현은 그녀를 최대한 배려하고 도왔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그녀의 근본적인 걱정과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소현은 숨기고 싶었던 과거의 힘들었던 경험을 말해주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하지만 혜은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지만 옳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 소현은 숨기고 싶었던 과거의 고통까지 말해줬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한 혜은에게 화가 났지만 잠시 뿐이었다. 점차 윤식에게 동화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분노보다 걱정이 앞섰고 어떻게든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돕고 싶었다.


"요즘 어때요? 힘들지 않아요?" 소현은 여전히 울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몸을 떨며 눈물을 흘릴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 소현은 혜은의 요동치는 감정이 차분해질 때까지 조용히 옆에 앉아 기다렸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윤식은 숨을 거칠게 쉬며 로스터리의 이곳저곳을 빠르게 걸었다. 하지만 묵묵히 각자의 일을 하는 직원들만 보일 뿐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한순간에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 그는 불안했다. 자신의 귀중한 장난감 중 하나를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장난감은 없었다. 값비싼 옷과 보석을 사주면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혜은은 달랐다. 비싸고 이쁜 옷과 보석을 줘도 거절했고 오히려 자신을 밀어냈다. 그는 이런 그녀를 더욱 갖고 싶었고 미친 것처럼 접근했다. 그렇게 겨우 얻은 장난감이 자신의 장식장에서 떠나려는 것이다. 스스로 말이다! 그는 미천한 장난감에게 버림받는 굴욕을 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장난감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목적지 없이 미친 것처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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