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제, 아무도 모른다

21화-관계

by 해금이


어린 소녀들의 친구관계는 연인들 못지 않게 복잡하고 미묘하다. 남자 아이들 사이의 관계가 1차 방정식과 같다면 소녀들의 관계는 3차 방정식과 같다. 소녀들 사이에 오가는 암묵적 신호와 복잡한 감정적 교류가 성인 남녀가 교제할 때 이루어지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일단, 두 소녀 사이에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면 필연적으로 서로를 독점하고 싶어진다. 너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말로 서로를 옮아 매는 것이다. 짝이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귀속된다는 안정감에 소녀들은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


문제는 그런 감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무뎌지고, 일상이 된다. 그러다, 둘 중 하나가 사소한 일에 상처를 입게 되면 관계에 균열이 생기며 영원할 것 같은 관계는 점차 어긋나기 시작한다. 나와 혜영이의 관계가 그랬다. 골덴 원피스로 상처를 입은 내 마음은 다른 곳으로 향했고, 그 대상은 연두였다.


연두는 혜영이와 달리,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 혜영이를 만나면 안 그래도 좁은 마음이 더 좁아지는 반면, 연두를 만나면 자연스레 확 트였다. 당연히, 연두를 만나는 횟수는 점점 늘어났고, 이에 소외감을 느낀 혜영이가 대놓고 따지기 시작했다.


어제는 오락을 하느라 당장의 위기를 넘겼지만,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혜영이는 나에게 다시 예전과 같은 관계를 요구하며 은근한 독점욕을 내비쳤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연두에게 마음이 더 갔다. 마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두 여자를 사이에 두고 갈등하는 남자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저녁 8시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자를 버리고, 집안 어른이 정해주는 여자를 선택했다. 이후, 남자 주인공은 후회를 거듭하며 괴로워하다 암에 걸려 죽어버리는 결말을 맞았다.


남자 주인공의 결말을 참고하자면, 연두를 선택하는 것이 옳았다. 그것이 드라마가 9살의 나에게 주는 교훈이었다.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세상사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주변의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인해 모든 일이 내 뜻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정수리를 뚫을 듯 내리 꽂히는 태양아래, 동네 개새끼도 헉헉 대며 그늘 아래로 기어들어가는 8월이었다. 당시에는 집집마다 에어컨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선풍기 아니면 부채가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다. 며칠째 지속되는 폭염에, 동네 상점이나 공장 모두 창문이나 가게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만리장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더운 여름날,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가게 문을 활짝 열어놓고 출입문 상단에 플라스틱으로 엮어 만든 발커튼을 쳐 놓았다. 새로 장만한 발커튼이 신기했던 나는 가게 안밖을 끊임없이 오가며 플라스틱 조각들이 만들어내는 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놀고 있었다.


‘달그락 달그락, 촤르르, 달그락 달그락, 촤르르.’

“진희야, 고마 해라.”


발커튼을 통과할 때마다 와닿는 감촉과 소리가 신기하고 재미있어 그만하라는 엄마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희야, 손님 들올 때 방해된다. 고마 해라.”


손님이라는 얘기에 잠시 멈칫하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눈 씻고 찾아봐도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가게를 흘깃거리고 지나가는 아저씨들이 있었지만 만리장성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러고보니, 이상했다. 최근 들어, 점심 시간에 손님이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학기 중에는 점심시간이 끝나고 집에 왔기 때문에 그렇다 치지만, 지금은 오전 11시 55분. 점심은 시작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어른들도 나처럼 여름방학을 해서 회사에 나오지 않았나 싶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가게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나는 부모님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한숨을 푹푹 내쉬는 엄마와 신경질적으로 신문을 뒤적이는 아빠. 텅텅 빈 홀 안에는 파리가 왱왱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더불어 시무룩해진 나는 커튼발 근처에서 멀찌감치 물러나 카운터 뒤쪽에 놓아둔 책가방에서 국어책을 꺼냈다. 얌전히 공부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괜한 불똥이 튀지 않을 것 같았다.


불편하고 무거운 공기가 점심시간 내내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결국, 우리집은 손님을 한 테이블 밖에 받지 못했다. 종종, 배달 전화가 몇 건 오긴 했지만 그것도 두 세 건에 그쳤다. 하루 중 가장 대목이어야 할 점심시간을 아깝게 날려버린 부모님은 주방에 모여 쑥떡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얘기를 하는 지 궁금했지만, 가까이 가면 안 될 것 같아 온 신경을 주방으로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간간히 ‘청운각’, ‘냉면’, ‘입간판’ 이라는 단어가 들렸다.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모든 문제가 ‘청운각’ 때문이라는 것이다. 청운각이 문을 연 이후로 확실히 우리집으로 오는 손님의 수가 줄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청운각’에 대한 적개심이 몸집을 키웠다.


새로 생긴 중국식당 때문에 우리 집은 장사가 안되고 있다. 당연히, 돈도 못 벌 거다. 그럼에도, 월세를 올려줘야 하는 부모님은 돈이 없어 결국 방 한 칸 자리 월세 가게에서 쫓겨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면, 난 또 다시 아빠의 형제, 누이들의 집을 전전하며 더부살이를 해야 할 것이다.


순간, 겁이 덜컥 났다. 또 다시 더부살이를 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얘기만 들어본 ‘청운각’이라는 곳을 직접 눈으로 봐야겠다 싶었다. 우리 식당과 그리 멀지 않지만, 왠지 가기는 꺼려졌던 곳.


집에서 나와 학교 가는 방향으로 쭉 내려가면 나오는 ‘청운각’. 고작 식당에 불과하지만 ‘이상한 나라의 폴’에 나오는 대마왕처럼 두렵게 느껴졌다. 속은 한없이 쪼그라들었지만 주먹을 꽉 쥐고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발걸음을 내 딛을수록 도로변 양쪽에서 들려오는 미싱소리가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마치, 염탐을 하러 가는 스파이가 된 것 같아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청운각’에 도착하니 확실히 사람이 많았다. 주변에 미싱공장이 많아 길거리에 쌓인 원단들로 인해 먼지가 풀풀 날렸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식당 앞에 줄을 서 있었다. 심지어, 점심이 훨씬 지난 시간이었다. 우리 가게 앞을 흘깃거리며 스쳐 지나갔던 아저씨들이 마침 이쑤시개를 이 사이에 끼우고는 청운각을 나왔다.


미싱공장 1층에 자리 잡은 청운각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아주 볼품없었다. 우리 가게 보다 작고 좁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푹푹 찌는 더위를 견디며 음식을 먹기 위해 대기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멍하니 서 있는데, 누군가 팔짱을 감아 왔다.


“진희야, 여긴 어떻게 왔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리니, 내 친구 연두가 서 있었다. 연두가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낯선 공간에 익숙한 얼굴을 마주보니 이질감이 들었다.


“넌 왜 여기 있어?”

“여기가 우리 집이니까.”


무해한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연두의 뒤편으로 연준이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돌멩이로 낙서를 하고 있었다. 이제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내가 ‘만리장성’의 딸이듯, 연두는 ‘청운각’의 딸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연두가 사실은 대마왕의 딸이었던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배신감에 몸이 부르르 떨렸고, 내 팔에 감긴 연두의 손이 거북스러웠다. 어떻게 그 자리를 벗어났는지 모르겠다. 기억나는 것은 내 뒤통수를 향해 외치는 연두의 한 마디뿐이었다.


“내가 나중에 영진빌딩으로 갈게.”


집으로 오는 한걸음을 내 디딜 때마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그 날, 난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렸고 꼬박 이틀을 앓아 누웠다.


이후, 나와 연두의 관계는 180도 바뀌었다. 죽고 못 살 정도로 붙어 다녔던 연두는 더 이상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니었다. 연두가 끼라고 항상 비워두었던 오른팔은 혜영이가 대신 차지했다. 연두가 놀자고 찾아오면, 혜영이도 같이 불렀다. 같이 놀면 더 재미있다며 셋이 모였지만, 연두를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하며 혜영이랑만 놀았다.


자연스럽게 소외된 연두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당당하고 밝던 연두의 얼굴에 점점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전과 다르게, 내 눈치를 보고 쩔쩔매는 모습에 통쾌함마저 느꼈다. 직접적으로 싫다 말하지 않아도 이 정도 했으면, 이제 더 이상 놀자고 찾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연두는 지치지 않았다.


연두의 끈질긴 모습에, 맨 처음 혜영이와 짜고 연두를 따돌리며 느꼈던 일말의 미안함마저 사라졌다. 이제는 연두가 지겹고 징그럽기까지 했다. 마치, 바람난 남편이 본처에게 벗어나기 위해 온갖 패악질을 부려도 묵묵히 인내하는 조강지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결국, 내가 쓸 수 있는 최후의 카드는 오락실이었다. 나에겐 천국 같지만 연두에겐 지옥 같은 곳.처음, 오락실에 연두와 같이 갔을 때, 별천지를 만난 것처럼 행복해하던 나와는 다르게, 연두는 오락실을 싫어했다. 담배연기 때문에 희뿌연 실내공기도 맘에 안 들어 했지만, 오락실 주인 아저씨를 유달리 싫어했다. 한 번은 하도 오락실 아저씨를 싫어하길래 왜 그러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아저씨 이상해.”

“뭐가?”

“왜 그런지 모르겠어?”


되묻는 연두에게 정말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끔뻑거리자, 연두가 내 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 아저씨가 나한테 뽀뽀했어.”

“그게 뭐?”


뽀뽀 정도 한 것이 뭐가 문제인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빠 또래의 아저씨가 동네 아이에게 예쁘다고 뽀뽀하는 게 뭐가 대수란 말인가. 뽀뽀는 좋은 것 아닌가? 오죽하면 아침 8시 30분에 MBC에서 하는 ‘뽀뽀뽀’라는 프로그램도 있지 않은가. 눈살을 찌푸리며 연두의 시선을 되받아치자, 연두가 안 되겠다는 듯 다시 내 귀에 속삭였다.


“입 안에 혀까지 집어넣었단 말이야.”


연두가 어렵사리 꺼낸 말에 머리가 띵 해졌다. ‘뽀뽀를 하는데 왜 혀를 입안에 집어넣지?’하는 생각과 동시에 끈적한 달팽이가 입 안을 기어 다니며 헤집는 익숙한 감촉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찜찜한 기분을 떨쳐버리려 애썼지만, 연두가 내 뱉은 그 말 때문에 애써 외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실, 나 또한 오락실 아저씨에게 뽀뽀를 받은 적이 있다. 오락실에 출입하는 것이 익숙해진 어느 날, 아저씨가 오락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내 뒤로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내 그냥 가겠거니 했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내 고개를 뒤로 꺾은 다음 뜨겁고 물컹한 혀를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저씨의 질척하고 미끈한 혀가 입안을 가득 채우더니 혀를 뽑아먹을 듯 세게 빨고는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에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바로 오락에 집중해야 했기에 아저씨를 쳐다볼 수도 없었다.


봉변을 당한 순간, 난 너구리 게임을 하고 있었다. 먹이도 먹어야 하고 장애물도 넘어야 하며 먹이를 지키기 위해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귀신들을 피하느라 바빴다. 찜찜하고 기분이 나빴지만 애써 별일 아니라고 넘기며 게임에 집중했다. 그 순간, 가장 중요한 건 이번 판을 깨고, 다음 판으로 넘어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 아저씨의 방해로 결국 게임을 망쳤다. 기분이 더러워져 오락실을 나가려 할 때, 아저씨는 나에게 과자 한 봉지를 쥐어 주며 다음에 또 오라며 사람 좋게 웃었다. 처음으로, 아저씨의 미소가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오락실의 게임들은 상당히 중독적이어서 끊을 수 없었고 갈 때마다 통과의례처럼 아저씨에게 질척이는 뽀뽀를 받았다. 담배 쇳내가 뒤섞인 쓰고 떫은 맛.


기분은 나빴지만, 그렇다고 그런 뽀뽀가 나쁘다고만 할 수도 없었다. 나를 때린 것도 아니고, 예뻐해 주는 것 아닌가? 게다가, 아저씨는 종종 맛있는 과자까지 그냥 주었다. 아저씨의 침이 입 안에 들어오는 게 더럽긴 했지만, 한 번만 참으면 좋아하는 오락게임을 무한정 구경할 수 있었다. 잃는 것 보다 얻는 것이 더 많았기에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진짜 이상한 아저씨야.”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연두의 그 한 마디에 그 동안 내가 오락실 아저씨에게 당한 일들이 일반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뭔가 억울한 일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어느 날, 아빠가 오락실에는 가지 말라고 큰 소리로 나를 혼냈다. 평소, 아빠가 나의 오락실 출입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큰 소리로 화를 낸 적은 처음이었다.


연두와 아빠의 말에 한 동안 오락실 출입을 하지 않았다. 만리장성을 나올 때마다 맞은편 오락실 출입문 안쪽에 도열된 게임기들이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조이스틱과 버튼의 감각이 손 끝에서 생생하게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오락실 문을 열고 들어가 너구리 게임기 앞에 앉고 싶었다.


일종의 게임 중독에 빠져 있던 나는 오락실에 가지 않기 위해 지속적인 유혹을 견디고 있었다. 다행히, 내 곁에는 나를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경계선을 앞에 두고 금방이라도 오락실로 튕겨 나가려는 나를 한 팔은 연두가, 다른 한 팔은 아빠가 붙들고 있는 형국이었다. 아빠의 으름장은 즉각적이지만 단발적이었고 연두의 만류는 임팩트는 없어도 오래갔다.


그런데, 그런 연두의 팔을 내 스스로 놓아버린 것이다. 청운각의 딸인 연두가 싫고 미웠다. 연두가 내 곁에 오지 못하도록 혜영이의 손을 잡고 오락실로 보란듯이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갈 때 스치듯 보았던 연두의 얼굴에 서운함과 무력감을 엿볼 수 있었다.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그랬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건, 인물, 단체, 지명 및 장소는 모두 허구이며 실제와 무관합니다.

이전 07화미제,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