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각성
-정말 좋으신 분이었어요. 안타깝죠.
-마음이 너무 무거워요. 아이들한테도 친절하시고 다정한 분이었는데…
프리뷰 영상 속, 조하대에 관한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는 온통 그에 대한 미담 일색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잘 포장된 조하대의 친절과 미소에 모두 속은 것이다. 특히, 아이를 옆에 두고 인터뷰하는 엄마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속았어요. 사실, 그 인간은 호시탐탐 당신의 아이를 노리는 중이었답니다.’
현행범으로 잡힌 추미영을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조하대를 미담일색으로 포장하고, 무고한 피해자 프레임을 씌어 방송에 내보내는 일만은 막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 나와 조하대 사이에 있었던 일을 팀원들에게 밝혀야 했다.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 지 두려웠다. 그 동안, ‘미제, 아무도 모른다’에서 다뤄왔던 아동성범죄 관련 방송들을 리뷰하며 전문가가 했던 충고를 곱씹어 보았다.
결코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며, 누구나 당할 수 있는 ‘교통사고’와 같은 것이라는 말. 그러나, 막상, 지인들에게 그 ‘교통사고’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일은 다른 문제였다. 어두운 조명 아래 목소리를 변조한 상태에서 피해사실을 밝혀왔던 수많은 생존자가 떠올랐다.
이제, 내가 그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무섭고 두려웠다. 그럼에도, 말해야 했다. 단순히, 피해가 나에게만 국한됐다면 여전히 망설였을 것이다. 하지만, 연두가 조하대에게 해꼬지를 당한 후 실종되었고,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화진이 또한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프리뷰를 중단하고 편집실을 나왔다.
오전 8시. 밤을 새웠지만 정신은 그 어느때보다 명료했다. 피하고 숨고 도망치기만 했던 어제까지의 나와 단절하기로 결심하자,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방송국을 나와 콩나물 국밥집으로 갔다. 오늘 하루는 상당히 고된 하루가 될 것이기에 든든히 배를 채웠다.
오전 10시. 이 PD가 숙취해소제를 비우는 것을 신호로 제작팀 회의가 시작되었다. 과음 때문에 얼굴이 더 삭아 보이긴 했지만, 취재 결과가 좋았는지 이 PD의 표정이 밝았다.
“드디어 수사자료 확보했어! 장 팀장, 이 능구렁이 같은 인간. 어찌나 까다로운지 내가 마누라 꼬실 때보다 공을 더 들였다니까!”
“고생했어요. 어? 근데, 이게 뭐에요? 파이프인가? 생긴 게 좀 요상하네요?
메인 언니가 수사자료에 첨부된 사진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회의 시작 전, 팀원들이 볼 자료를 복사하며 봤던 사진 속에는 금속 재질로 된 파이프 한 개가 범행 증거자료로 나와 있었다. 길이 30cm에 지름 8cm의 원통형 스테인레스 파이프는 한 쪽 끝이 미려하고 섬세하게 가공되어 있었다. 뭉툭한 연필 모양이었는데 그 끝에 혈흔이 묻어 있었다. 반면, 파이프의 반대편에는 단순한 형태의 조작도구가 보였는데 레버가 달려있었다.
“이게 범행도구야. 뭉툭한 부분을 피해자의 항문에 삽입하고 중요부위를 자른 다음, 원통형의 파이프 안으로 집어 넣은 거지. 그런 다음, 뒷부분의 레버를 작동시켜. 그러면, 앞부분의 뭉툭한 부분이 오픈되면서 중요부위가 항문안에 남게 돼. 이후에, 파이프를 다시 제거했고. 부검 결과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혈중에 수면제 성분이 검출된 걸로 봐서 피해자를 심신상실 상태로 만든 후에 범행을 저질렀어. 상당히 계획적이라는 거지.”
“범행 도구도 시중에 유통되는 제품이 아니에요. 뭉툭한 앞 부분은 특별히 신경써서 섬세하게 가공한 것 같은데요? 이렇게 정성을 들일 정도면 철저히 설계된 살인이에요. 그만큼, 치밀하고 계획적인 성향이라는 건데, 무방비하게 현행범으로 잡혔다? 추미영은 주범이 아니에요. 분명, 다른 조력자나 공범이 있는 거죠.”
이 PD와 메인 언니가 대화를 주고받는 중에 의외의 목소리가 들렸다.
“범행도구는 발견 안 됐다고 들었는데 어디에서 찾았데요?”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지은 언니가 서 있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쌍깁스를 한 채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회의 자료를 곁눈질하며 보고 있었다.
“이 작가, 어쩐 일이야? 쉬는 거 아니었어?”
남기현 조연출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자, 지은 언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하룻밤 푹 자고 나니까, 사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요? 범행 도구는 어디서 발견했데요?”
지은 언니의 말에 모두들 어이없어 하면서도, 다시 회의를 시작했다. 이 PD가 답을 내 놓았다.
“추미영 본가. 본가 마당 장독대 뒤에 숨겨둔 걸 수사관이 찾았어. 류 작가님의 예상이 맞아. 분명, 공범이 있어. 사건 당일, 조하대를 살해하고 경기도 변주시에서 서울시 동대문구 본가까지 간다고 처. 거기에 범행도구만 숨기고 다시 살인 현장으로 돌아와서 경찰에 잡힌다고?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돼. 추미영은 허수아비고 뒤에 사건을 주도한 진짜 범인이 있어. 경찰도 그 부분을 의심하는 지 공범을 찾고 있고. 문제는, 추미영이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어서 수사 진척이 전혀 안 되고 있어.”
미영이 아줌마. 아홉 살 허진희가 조하대라는 괴물에게 잡아 먹히기 직전, 나를 구해준 은인. 자신의 비극적인 과거가 나에게 되풀이되는 것을 막아 준 고마운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나의 엄마에게 온갖 구박과 욕을 들어먹는 등의 수모를 당하며 모든 오해를 감수했다. 어쩌면 이번 사건 역시, 과거와 같은 맥락에서 벌어진 일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혹시, 추미영은 또 다시 누군가를 보호하거나 구하기 위해 살인범이 되는 억울한 누명까지 뒤집어쓴 것은 아닐까? 불현듯, 얼마 전, 직접 받았던 제보 전화 하나가 떠 올랐다.
-동네에 괴물이... 살아요.
-네? 무슨 괴물이요?
-아이들을 잡아...먹어요. 무서워요. 도와주세요.
-선생님, 동네가 어디에요?
-경기도 변주시 경이동이요.
-괴물이 어떻게 생겼는데요?
-어…저기… 너무 힘도 세고, 소리도... 많이 지르고….
장난전화 취급하며, 간단한 팩트 체크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 갔었다. 하지만, 이 PD가 확보해 온 정보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미영이 아줌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로서는 절박한 구조 요청이었을텐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명치 부근이 뻑뻑하게 저리면서, 울컥 뜨거운 것이 목울대를 건드렸다.
“야! 막내! 너 왜 그래? 왜 울어!”
지은 언니의 당혹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다른 사람들 또한 흐느끼는 나를 보며 동요하고 있었다. 회의 중에 눈물 바람이라니. 주목받는 것을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는 나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눈물은 쉼 없이 흘러내렸고 멈추지 않았다.
회의는 중단되었고, 메인 언니에게 따로 불려갔다. 프로그램 촬영 스튜디오의 구석진 공간에서 메인 언니와 마주 앉았다. 일할 때는 칼 같이 매섭고 단호하지만, 출연자를 대할 때는 그 어느 때 보다 부드러운 사람이다. 출연자를 대하는 것 같은 메인 언니의 조곤조곤하고 따뜻한 말투에 서서히 마음이 열렸고, 지난 밤, 결심한 마음 속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 동안 많이 힘들었겠다. 그래도 장하네. 이렇게 잘 커 주고.”
그 옛날, 미영이 아줌마의 한옥집에 갑자기 방문했을 때가 떠올랐다. 고작, ‘미안하다, 고맙다’라는 한 마디에 흐느껴 울던 아줌마의 모습이 지금의 나와 겹쳐졌다. 그 때, 아줌마의 마음이 지금의 내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이라도 내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해준다는 것은 커다란 위로가 된다. 심지어, 그 대상이 어린 소녀일지라도.
“진희, 네 사정 잘 알겠어. 그러니까, 이번 회차 제작에서는 빠져.”
“네?”
“조하대가 과거에 어떤 짓을 저질렀든, 어쨌거나, 지금은 피해자야. 조하대를 두둔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 프로그램은 피해자의 입장을 주로 대변 하잖아. 너한테는 2차 가해일 수 있지.”
“그래도, 지금은 지은 언니도 일을 못하는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메인 언니와 면담을 하고 내려가니, 팀원들이 내 눈치를 본다. 서먹한 분위기에 고개를 못 들고 있는데, 이 PD가 어색함을 깬 답시고 연준이에 대해 물었다.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한 어투로 말했지만 준비된 멘트 같았다.
“허 작가, 임연준이라고 세기일보 기자가 지인이라고 했나?”
“네, 어릴 적 동네 친구요.”
“믿을만해?”
“네? 왜 그러시는지…”
“내 친구 중에 세기일보에 다니는 사람 있다고 했지? 임연준, 그 친구 똘똘한 것 같아서 회사에서는 어떠냐고 물어봤더니 그런 이름의 기자는 없다는데?”
“그럴 리가요? 명함도 받았는데요?”
“아니, 허 작가 지인이 그렇다는 건 아닌데, 요즘, 기자 사칭해서 사기 치고 다니는 인간들이 꽤 많다고 하니까 조심하라고.”
즉시, 내 자리로 가서 책상 서랍을 열어 명함집을 펼쳤다. 최근에 받아서 어렵지 않게 연준이의 명함을 찾을 수 있었다. 좌측 상단에 세기일보 신문사 로고가 들어간 명함을 꺼내 이 PD에게 건넸다. 이 PD가 명함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세기 일보 명함이 맞긴 한데… 자식이 잘못 알았나?”
“그럴 수 있죠. 신문사 안에 기자가 한둘이 아니잖아요. 거기에다, 세기일보면 메이저 신문사라 직원들도 엄청 많을텐데, 신입기자 이름을 어떻게 일일이 다 꿰고 있겠어요?”
옆에 있던 지은 언니가 이 PD의 의구심을 불식시키려는 듯, 반론을 제기했다. 그러자, 이 PD도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정작, 녀석과 가장 가까운 관계인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묘하게 거슬리고 불편했다. 지난 밤, 전화상으로 아빠와 대화하는 녀석의 차갑고 메마른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게다가, 아빠가 했던 말로 추측컨대, 어제의 만남이 처음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러자, 무심코 넘겼던 녀석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연준이와의 첫만남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되짚어 보았다.
경찰서에서의 우연한 재회.
공교롭게도 겹치는 아이템.
끈질긴 공동취재 요청.
나를 통한 부모님과 옛 동네 어른들과의 만남.
한편으로 자연스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잘 짜인 시나리오 각본처럼 인위적이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고 확인해 봐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았다. 이제, 지난 밤 잡았던 녀석과의 약속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혹시라도, 연준이가 짠 판에 내가 놀아나는 거라면, 적어도, 녀석에 대한 기본적인 팩트 체크는 하고 가야 할 것 같았다.
“저… PD님, 임연준 기자요. 진짜 기자 맞는 지 다시 한번 확인 좀 해 주실래요?”
“뭐? 진짜?”
“네.”
단호한 내 대답에 이 PD는 뭔가 할 말이 있는듯 입을 달싹거리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을 위해 자리를 떴다. 다음에 내가 할 일은 우리 프로그램 취재 중, 연준이가 알려 준 정보에 대한 크로스 체크였다.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부분은 성원 부동산 중개인이다. 연준이는 성원 부동산 사장님이 남해로 바다 낚시를 가서 일주일간 통화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장님은 조연출이 촬영해 온 영상에 버젓이 등장해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성원 부동산으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통화 연결음 끝에 걸쭉한 목소리의 중년 남성이 전화를 받았다.
-성원 부동산입니다.
-안녕하세요. ‘미제, 아무도 모른다.’ 작가 허진희라고 합니다. 몇 가지 확인해 볼 게 있는데 통화 가능하세요?
-아~, 저번에 촬영하고 갔던 방송국 양반들인가?
-네, 맞습니다. 사장님 맞으시죠?
-응, 맞소만?
-사실, 저희 방송국은 촬영 나가기 전에 섭외 전화를 먼저 드리거든요? 근데, 이전에 연락 드렸을 때, 전화를 계속 안 받으시더라고요. 지난 주 금요일인데 기억나세요?
-아~ 그 때? 에이~! 씨부랄 놈.
-예?
-아니, 아가씨한테 그런 게 아니고, 어떤 미친놈한테 한 말이야.
전말은 이랬다. 지난 주 금요일, 사장님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누군가 부동산에 들어와 전화선을 뽑고, 휴대폰까지 훔쳐 갔다는 것이다. 하필, 전화선도 잘 연결된 것처럼 교묘하게 빼놔서 전화가 불통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날은 설사병이 나서 일찍 영업을 종료한 탓에 전화선이 끊어진 사실은 다음 날 알았다고 한다.
-휴대폰 절도 범인은 찾으셨어요?
-에이, 못 찾았어. 이런 조그만 부동산에 CCTV가 있어? 뭐가 있어? 그냥 액땜했다 치고 말았지. 암튼, 그래가지고, 휴대폰 바꾸고 수첩에 있는 연락처 일일이 입력하느라고 얼마나 애를 먹었게.
-그럼, 혹시, 그날 사건 취재하러 기자 한 명 찾아오지 않았나요?
-기자? 무슨 기자?
-추미영 씨 사건 취재한다고 남자 기자 한 명 찾아갔을 텐데요?”
-무슨 소리야? 기자는 찾아온 적이 없는데?
분명, 지난 주 금요일, 연준이는 성원 부동산에서 사장님 대신 전화를 받았다. 가능성은 두 가지다. 사장님이 거짓말을 하거나, 연준이가 기자를 사칭했거나.
-사장님, 그럼, 지난 주 금요일 부동산에 왔던 손님들 기억하세요?
-그날? 누가 있었더라? 그날은 배탈이 나서 정신이 없어가지고… 가만 있어 보자. 백반 집에 김사장, 떡집 박사장… 이전에 부동산 계약했던 손님 한 명…. 적어도 스무 명이상은 다녀간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캐물어서는 지난 주 금요일, 연준이가 성원 부동산에 방문한 사실을 확인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쥐어짜는 중에, 최근, 혜영이 엄마 미장원에 찾아갔던 일이 떠 올랐다. 싸이월드에 빠져 있는 혜영이 주도로 다같이 단체 사진을 찍었었다. 제발, 혜영이가 그 사진을 업로드 했기를 바라며 싸이월드로 들어갔다.
사진첩으로 들어가니, 다행히, 그날 찍은 사진이 최신 게시물로 업로드 되어 있었다. 얼른 저장한 뒤, 사장님께 이메일 주소를 물었다. 재빨리, 사진을 첨부해 사장님께 보내니, 잠시 후, 이메일을 확인한 사장님이 말했다.
-어라? 이 남자…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건, 인물, 단체, 지명 및 장소는 모두 허구이며 실제와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