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앞에서 인간은 약할지라도, 필름은 영원하다

<바빌론>을 보고

by b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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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 앞에서 인간은 약할지라도, 그들이 만들어내는 필름은 영원하다.


막대한 현상 변경 속에서 인간은 한없이 약하다. 약육강식의 세계이고, 적자생존의 원칙이다. 영화는 변화 앞에서 무력한 인간 군상을 다양하면서도 처연하게 그린다. 불쾌함, 난잡함, 광기를 첨예하게 다루는 연출과 편집이 훌륭하고, 음악과 원테이크 시퀀스는 경이롭다. 특히 영화사를 주마등처럼 보여주는 엔딩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것보다 ‘사람’이 보였다. 변화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사람.


잭 콘래드는 도태되는 존재다. “개와 배우는 출입금지”를 말하던 할리우드를 바꿨지만 바뀌는 영화에는 적응하지 못한다. 5명이 넘는 여성과 이혼했지만, 영화와는 이별하지 않던 그의 마지막은 참 쓸쓸하다. 뜨겁게 나누던 영화와의 사랑이 외사랑이 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그는 영화에, 그리고 세상에 작별을 고한다. 권총으로 목숨을 끊은 잭에게 영화란, 어찌 보면 같은 방법으로 목숨을 끊은 그의 친구 조지가 그토록 갈구하던 여성의 사랑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도태되는 자는 사라지기 마련이기에 잭의 마지막은 필연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50년 뒤에 태어나는 아이에게 그는 새로운 사람으로 기억되리라,라는 한 줄기 희망 같은 무언가가 피어오른다. 영화는 잔인한 현실을 그리지만 동시에 그 희망을 놓지 않는다.


넬리 라로이는 포기하는 존재다. 변화를 향해 달려가지만, 그 덧없음과 추악함에 포기하고 마는 사람들을 향한 위로다.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음에도 과거, 그러니까 낮은 계층에서 시작했던 삶의 방식과 아버지를 끊어내지 못한다. 그 결과는 마약과 도박 중독에 불과했고, 세기의 스타가 될 것만 같던 그녀는 비참한 말로를 걸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넬리 라로이의 삶을 보면 영화는 계층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고, 허튼 꿈 따위는 꾸지 말라고. 하지만 라로이의 마지막은 행복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본인을 위해 삶을 바치는 사랑을 만나고 떠나지 않았는가.


매니 토레스는 개척하는 존재다. 유성 영화의 등장과 함께 뛰어난 아이디어로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매니의 성공을 과연 진정한 성공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영화 수익을 위해 모욕적인 결정을 내리고, 사랑에 눈이 멀어 회사에 경제적 손해를 끼치기도 한다. 어찌 보면, 변화에 적응하고 성공하기 위해 인간성을 포기했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사랑을 저버리지 않는다. 삐뚤어진 사랑일지라도 매니는 라로이를 위해 삶을 베팅한다. 종국에 그는 사랑과 영화 모두 잃어버리는 비극적인 존재다. 본인의 성공 신화를 쓰게 해 준 ‘사운드’를 포기하지 못한 채 오디오 샵을 운영한다. 그러나, 유일하게 영화의 변화를 바라보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영화관에서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는 존재는 영화가 아닌, 관객이다. 영화관에 앉아있는 우리들, 영화의 변화가 가능했던 근본적인 이유인 관객을 향한 감독의 헌사 아닐까.


시드니 팔머는 변화를 거부하고 회귀하는 존재다. 유성 영화의 흥행과 함께 성공의 길을 걷지만, 당시 세계상 속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체험하고 만다. 그는 차별받는 흑인일 뿐이다. 백인 사이에서는 성공한 신기한 존재일 뿐이다. 얼굴에 검은 칠을 하며 그는 그 굴레를 분명하게 느끼고, 비싼 집과 좋은 차를 거부한다. 그에게는 집과 차보다 본연의 자리인 공연장이 더 소중했으리라.


우리는 모두 변화를 겪는다. 작게는 소속이나 거주지, 크게는 지구적 환경이나 거주국의 변화를 이겨내며 살아간다. 그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약하지만, 그럼에도 결정을 내리고 살아간다. 도태되어 포기하거나, 회귀하거나, 개척하거나, 거부한다. 그러나 영화는 계속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도 계속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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