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ngstudio 2023] 한 끗 차이

다사다난과 만사형통 사이에서

by bang

2023년은 다사다난(多事多難), 혹은 만사형통(萬事亨通)의 한 해였다.

지난해 언론사 취업에 실패한 뒤, 격렬한 취업 전선의 한가운데서 상반기를 보냈다. 감사하게도 좋은 직장을 갖게 됐고, 새로운 경험과 다양한 배움들로 하반기를 채워나갔다. 되돌아볼수록 사건과 행복으로 가득한 2023년이었구나, 되돌아보게 된다.


어찌 보면 다사다난과 만사형통은 한 끗 차이에 불과한 것 같다.


어쨌거나, 이제 2023년을 기억의 서랍 속에 묵혀두고자 한다. 긴 시간이 흐른 뒤 케케묵은 기억의 향기로 2023년을 떠올리기 위해, [bangstudio 2023]을 끄적여본다.



올해의 순간


5월 8일, 취업

: 1년 만에 무소속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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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아침은 지금도 생생하다.

여느 취준생처럼 7시와 7시 30분 알람은 가볍게 무시했고, 8시가 넘어 잠을 깼다. 눈을 뜨자마자 켠 스마트폰에는 '전형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라는 연락이 와있었다. 빨라지는 심장을 신경 쓸 새도 없이 최종 결과를 확인했고, '축하합니다'라는 문구에 소리 없는 함성을 질렀다.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셨고, 그날따라 출근을 늦게 하신 아버지는 양팔을 벌리며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행복했던 순간이다. 공교롭게도 어버이날 입사였던 덕에 선물도 갈음할 수 있었다.


취준은 실력 경쟁, 스펙 경쟁이라기보다는 본인의 강점과 회사의 니즈가 맞는 순간을 잘 만나야 하는 타이밍 경쟁에 가까운 것 같다. 감사하게도 그 타이밍이 나의 취준 기간에 비해 빨리 찾아왔고, 그 덕에 취업에도 금방 성공할 수 있었다. 감사함으로 가득한 순간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험과 만남들의 시발점이 된 이 날을 올해의 순간으로 주저 없이 선정한다.




올해의 영화


<괴물>

: 가뭄 속 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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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낭만을 찾던 내 모습이 사라져 가는 것을 느낀다. 올해는 취준이라던가 직장생활이라던가 하는 핑계로 영화로부터 느끼던 감동이 많이 흐려진 듯하다. 어찌 됐든, 블록버스터와 텐트폴 영화만 잔뜩 관람한 올해는 감동을 느낄만한 영화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12월, 사랑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선사한 감동이 이 모든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모든 지레짐작을 보기 좋게 박살내고, 관객의 고정관념에 부끄럽지만 한편으로는 기분 좋은 반전을 선사하는 히로카즈 감독의 재능에 눈물을 감출 수 없는 영화였다. 이 시대에 억압받는 모든 괴물들에게,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건네는 이 작품이 나에게는 가뭄 속 단비 같았다.


'에이 설마 이것까지 성공할까'라는 의구심을 '역시나'라는 인정으로 바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와 '데미언 샤젤... 그는 신인가'라는 질문에 확신을 준 <바빌론>도 선정 직전까지 나를 고민케 했다. 그러나, 히로카즈 감독을 사랑하는 나이기에 올해의 영화로 <괴물>을 꼽는다.




올해의 음반


최유리 - 생각을 멈추다 보면 - EP

: 잔잔히 연말 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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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슴슴하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사전에서는 '싱겁다'를 의미하는 '심심하다'와 같은 뜻이라고 나오지만, 분명 그 뉘앙스가 다르다. '노랗다'와 '누렇다'가 한 끗 차이지만 느낌이 아주 다른 것처럼 말이다. 싱겁지만 썩 불쾌하지 않은, 심심함 속에서 매력이 느껴지는 음식을 먹을 때 나는 "슴슴하다"라고 말한다. 이 앨범이 참 슴슴하다. 역동적인 기승전결도 없지만, 차가운 연말을 보내주기에 제격이었던 앨범이다. 특히 지나가는 한 해의 끝을 잡고 노스탤지어에 젖어있기 참 좋은 음악이었다.


푹 우린 포스트 말론의 'AUSTIN'도 참 좋았지만 뭐랄까, 슴슴한게 당기는 순간이 많았던 것 같다.




올해의 시리즈


나는 SOLO 16기

: 내가 이걸 왜 보고 있지?


한 시리즈에 이토록 강력하게 빨려들어간 적도, 한 시리즈가 이토록 오래 회자된 적도 드물다. 논란의 연속이던 이 시리즈는 끊임없이 '내가 이걸 왜 보고 있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다양한 인간군상과 인간궁상, 그리고 그들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갈등의 연속이 자극적인 조미료처럼 중독성있다.

작품성 때문이 아닌 그 중독성 때문에, 올해의 시리즈로 선정한다.




올해의 지름


PlayStation 5

: 어른의 행복이란 이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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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이후 요거트 뚜껑을 안 핥아먹어도 되고, 한 끼에 5만 원 이상 쓸 수 있는 어른의 행복을 느끼기 시작했다. 남자에게 절정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기에 게임만 한 것이 없겠지. 대학생 시절 구매한 플레이스테이션 4 슬림 모델을 5년 이상 사용하고 신제품을 구입했다. 4K 60 프레임의 압도적인 몰입감을 즐기며 일주일도 안돼 '스파이더맨 2' 엔딩을 보고야 말았다. 조만간 출시될 'GTA6'를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기대로 가득 차 있을 것만 같다.


퇴근 후의 삶을 더 비효율적이고 낭비스럽게 만들어 준 어른의 장난감, 플레이스테이션이 단연코 올해의 지름이다.



올해의 공간


10월 7일, 여의도 한강 공원

: 공간이 로맨틱할 수 있다니

매년 극악의 관람 난이도를 보여주는 서울세계불꽃축제를 매우 편안하게 구경했다. 그깟 화약이 뭐라고 순간을, 공간을 그토록 낭만적으로 바꿔주는지. 그 순간의 감동은 평생 못 잊으리라. 무엇보다, 매년 그맘때 즈음 서울세계불꽃축제 인파 관련 뉴스를 보며 '그때가 좋았지' 생각하리라.



10월 23일 찾았던 울산바위 건너편의 성인대도 참 잊지 못할 공간이었다.


엄청난 바람과 싸우느라 정신없었지만, 대한민국에 살면서 반드시 한번쯤은 봐야 하는 절경이라 생각한다.


절경에 분위기까지 갖춘 불꽃놀이에 밀려 올해의 공간에 선정되지는 않았지만, 올해의 자연경관으로 선정될 자격은 충분하다.


다만 별 것 아닌 이 시상식의 수준 유지를 위해 이곳을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올해의 음식


도쿄 츠키지 시장 먹부림

: 종일, 종합 일식 세트 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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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먹고 마셨다.

도쿄의 노량진 격인 츠키지 수산시장은 해산물부터 고기까지 일본이 자랑하는 다양한 음식을 갖춰놓은 곳이었다. 음식 종류만큼이나 사람도 많았던 탓에, 조금은 구석진 곳에 위치한 식당을 찾아 카이센동을 먹었다. 당연히 맛있는 참치, 관자는 물론이고 톡톡 터지며 킥을 선사하는 연어 알과 쫀득한 오징어·연어 조각들까지 알맞게 숙성된 회에 감격을 금할 수 없었다. 이후에는 일본 최고급 와규 등급인 A5등급 와규 꼬치를 먹었다. 무지막지한 가격이었지만, 여행은 자고로 돈으로 즐거움을 사는 것 아닌가. 입에서 사르르 녹는 소고기에 나도 녹아내려버렸다. 츠키지 시장을 나와 찾은 Turret Coffee에서는 인생 최고의 라떼를 만났다. 진한 커피의 향과 묵직한 우유의 조화가 여느 라떼와는 다른 무게감으로 입을 벌릴 수밖에 없는 충격을 선사했다.


미슐랭 3 스타의 기준은 '요리가 매우 훌륭해 여행을 떠날 가치가 있는 레스토랑'을 뜻한다고 한다. 츠키지 수산시장과 터렛 커피는 뱅슐랭 3 스타다.




"한 끗 차이"


행복과 불행은 한 끗 차이라고들 한다. 그러니 지금 불행해도 포기하지 말라고도 말한다. 힘들다고 여겼던 올해도 되돌아보고 따져보니, 즐거움의 비중이 더 큰 한 해였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비극 같은 순간이 눈 깜빡할 사이에 희극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2024년이, 그 한 끗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한 해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2023년 12월 31일,

bang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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