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하면 훌륭한 시작
매년 1월 회고를 시작할 때면 떠오르는 말이 있다. 시작이 반이다.
이 지긋지긋한 클리셰 문장이 왜 이맘때쯤이면 떠오르는 것인지 의문이다. '어찌저찌 시작은 했으니 이만하면 됐다' 안주하는 것인지, '나 대견하다' 자위하고픈 것인지... 아니면 현지 말처럼, '아쉬운 모습보다 잘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태도'를 실현하려는 일종의 선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기저에 깔린 의도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매년 이 말을 떠올릴 때만큼은 자존감이 높아지는 기분이다. 어쨌든 내 2025년은 시작됐고 어떤 이야기를 써 나갈지 기대로 가득하니까!
이제는 송구영신 예배에서 올해의 말씀을 뽑는 게 일종의 세리머니 비슷한 게 됐다.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 잠언 17장 27절 말씀을 뽑았다. 신기하게도 매년 뽑는 말씀이 쏙 마음에 든다. 말씀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바꿔달라는 사람이 그렇게나 많다는데, 나는 단 한 번도 바꾸고 싶었던 적이 없다는 게 경이롭다. 아니면 내가 그만큼 우직하게 적응하고 맞추어가는 사람인 건가.
나는 말이 많다. 위 문단만 봐도 말이 많다. 말을 줄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두 번 한 게 아니다. 말을 아끼는 게 지식일지도 모른다. 또 나는 비열이 낮은 사람이라, 쉽게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냉철하지 못하다. 그래서인지 이 말씀이 내가 지향하는 바를 나타낸다고 느꼈다.
동시에, 나는 말이 많기에 그나마 버티고 사는 것 같다.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수다를 즐기며 관계를 유지한다. 그 관계성 속에서 나의 존재 가치가 드러나는 순간들도 많다. 또 냉철하지는 못하지만, 따뜻한 가슴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늘 약자에게 귀 기울이고 모두에게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게 내가 지향하는 방향성이다.
그래서 이 말씀의 모습을 지향하면서도 내 본연의 모습을 잃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단 한 장의 말씀카드에서도, 이리 생각이 길어지는 걸 보니 말을 줄이긴 해야겠다. 요약 실력을 늘리거나.
꽤나 바쁜 1월 1일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부모님과 집 뒷 산 형제봉을 등반했다. 새해맞이 운동을 핑계로 가족과 대화도 하고, 알토 산책도 시킬 수 있어 뿌듯했다. 돌이켜보면 이때 '시작이 반이다'라는 생각을 좀 많이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집에 돌아와 좀 쉰 뒤에 바로 영화관에 갔다. 리뷰를 올린 적도 있는 영화 '시빌워 : 분열의 시대'를 봤다. 정말 좋은 영화니 꼭... 지금 보길 바란다!
2일에는 양재로 넘어와 아침 러닝을 했다. 얼마 만에 뛰는 10킬로인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글을 쓰는 지금 시점을 기준으로는 달마다 한 번씩 10킬로를 뛰고 있으니... 좀 더 정진해 봐야겠다. 시작이 반이다...!!
혼자 파스타를 해 먹고(머시룸 크림소스 좋았다)...
현지를 만나러 성수에 갔다. 나는 쉬고, 현지는 안 쉬는 날이면 일하고 온 현지를 놀리는 것이 인지상정. 다만 이 날은 좀 미리 성수에 가서 일기도 쓰고 노트북으로 뭔가 작업을 하려 했는데, 현지가 알려 준 카페가 콘센트를 못 쓰는 곳이어서 짜증 아닌 짜증을 냈다. 따뜻함을 잃지 말자 김병훈!!
사진도 찍었는데, 픽닷이라는 무인 사진관은 저 12장에다가 B컷 3장을 더해 촬영한 사진 15장의 사진 원본을 단돈 천 원에 함께 제공한다(광고 아님). 참 좋은 서비스!
사진은 없지만 뉴질랜드 마오리 족이 천연 방식으로 생산한 화이트 와인도 마시고, 아무튼 참 좋았다! 연초의 기운이 좋다!
1월 4일은 키노 FNL 활동을 함께했던 본휘의 결혼식이 있었다. 화려함에 넋을 잃고야 말았다.
최시우가 갑자기 울길래 황당했다.
장충동에서 결혼식이 열린 덕에 이분들의 윤석열 각하 수호 집회도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젊은 세대, 자식을 데리고 나온 부모가 많아 놀라웠다.
내 의견은 생략한다...
그리고 현지를 만났다!
이 날 알게 된 꽤나 놀라운 사실. 그랜드 하얏트 호텔 건너편 케냐 대사관에는 케냐 카페가 있다. 정확한 이름은 케냐키암부커피. 커피를 생산하는 케냐에서 직접 공수해 온 커피인지는 모른다. 사실 케냐와 관계없는 카페일지도 모른다. 난 모른다. 근데 케냐 느낌은 난다. 현지와 '우리 애슐리 알바와 점장' 같지 않냐며 시답지 않은 농담을 나눌 수 있어 좋았다.
말도 안 되는 웨이팅의 그래픽을 뒤로하고 레이지파머스라는 비건 식당을 갔다. QC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느낌이었으나, 맛은 있었다. 직원들의 컨디션이 좋은 날 방문하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현지와 붕어빵도 먹고! 이 날은 하얼빈을 봤다.
붕어빵만 먹을 걸 그랬다.
6일에는 회사 신년회가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고양까지 이동하느라 쉽지는 않았지만, 벌써 입사 후 두 번째 신년회기라는 것에 대해 감회가 새로웠다. 회사 리더십의 생각을 알고, 이 회사가 잘 나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일개 직원의 생각을 가질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회사 리더의 뒷자리에서 열심리 녹음도 했다... 빛나는 이마를 자랑했달까...
이후에는 인터뷰 풀도 정리하고 나름의 역할을 수행해 뿌듯하기도 했다!
이 날은 출근하는데, 문득 건물 사이로 보이는 일출이 참 예뻐 보였다. 이 날부터는 출근할 때마다 저 건물 틈을 보곤 한다.
파리 출장 직원끼리의 뒤풀이도 가졌다!
이제는 책임이 되어버린,,, 큰 형님과 늘 친근한 작은 형님과 함께 해 너무나 즐거웠다. 알토를 닮은 술잔까지 너무나 귀엽고 아기자기한 저녁이었다.
그 주 금요일에는 옆 팀장님께서 저녁 같은 점심을 사주셨다. 저녁 같은 점심이라는 건... 점심부터 나가서 저녁처럼 먹고 마시는 거다. 근데 진짜 재미있었다... 고기가 맛있어서 놀란 게 제일 컸고, 대화가 재밌던 게 그다음, 내가 그 정도로 취했다는 게 화룡점정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데이트하기로 한 현지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난 드르렁 잤다ㅋㅋㅋㅋ
지인짜 즐거웠던 하루다.
사진전은 꽤나 무거웠던 게 사실이지만,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거대한 물결이 휘몰아치던 역사의 순간들을 생생하게 볼 수 있어 좋았다. 또 내가 기자(사진 기자도 왕왕)를 상대하는 직종에 종사하기도 하고 영화 <시빌워>를 보고 난 직후인지라 더더욱 피부에 와닿는 사진이 많았다.
백년옥의 두부와 전은 너무 좋은 기억인지라, 앞으로도 예술의 전당을 간다면 무조건 저 음식을 먹을 것 같다. 카페 잔상은 적당한 소음으로 형성된 분위기가 좋았고, 물론 커피도 맛있었다.
그리고 이 날의 발견은 유즈유. 양재동 최고의 일식 술집이지 않을까 싶다. 적당한 가격(조금 비싸게 느껴질 수는 있겠지만, 물가를 생각하면 나는 수용 가능한 수준이라고 본다)에 지나치지 않은 포션의 안주가 준비되어 있고, 광기 어린 수준으로 다양한 사케가 준비돼 있다. 현지에게 '오늘은 내가 살게' 해놓고 맛있길래 신나서 주문하다가... 풍비박산의 위기를 겪은 날이었다.
12일에는 아빠의 생신(13일)을 맞아 가족 식사를 했다. 광교 '더레이크뷰'였는데, 나쁘지는 않았다.
뷰 값이 당연히 있겠지 생각했기에 나는 이 또한 수용 가능한 수준이라 느꼈다. 다만 크게 인상 깊은 기억은 없다... 오히려 이 날 아빠에게 선물한 맥켈란 위스키를 아빠가 일주일 만에 3분의 2 이상 해치운 게 충격이라면 충격이다.
짤막하게 회사 이야기들.
미팅 이후 그룹원끼리 찾은 전통찻집. 진짜 전통 그 자체였다. 너무 좋았는데 업무 일정이 빠듯해 빨리 나온 게 한이다. 디 올 뉴 팰리세이드 신차 발표회도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행사장 옆에서 엄청나게 인기 많은 추어탕 집에서 밥도 먹었다. 냉정하게 맛이 훌륭했다.
회사에서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준 덕에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展 뮤지엄 디너를 찾았다. 맛있는 코스 요리를 먹고, 도슨트 분의 설명을 들은 뒤 전시회를 관람했다.
전시회가 너어무 좋았다.
나는 이 그림이 제일 좋았다. 찾아보니(그새 까먹었기에) 알빈 에거-리엔츠의 점심식사다. 빛을 너무 사실적으로 표현했고, 고된 노동 뒤 침묵 속에 점심 식사를 함께하는 그 자리에 내가 있는 듯했다.
그리고 좋았던 작품들과 우리 모습!
시그니처(?) 작품인 에곤 실레의 자화상부터 너무나도 예쁜 커틀러리 세트가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이 날, 꽤나 추웠다... 근데 너무나 좋았다!!
그리고 신규 입사자 교육에 참여했다. 입사 2년이 다 되어가는 와중에... 아직 나는 신규 입사자 교육을 다닌다!
전기차를 직접 분해/조립해 볼 수 있어 정말 큰 도움이 되기는 했다. 제품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히 높아졌다. 그리고 불변의 진리. 조립은 분해의 역순이다.
돌아와서는 정병지 회식... 미친 텐션이었다. 키워드는 와스바리!
귀여운 양재동, 멋있던 양재동.
현지와 1박 2일 양재동 데이트도 했다.
아침부터 식물원 김밥 배달 오픈런에 성공해 가히 인생 김밥 중 하나를 먹었고, 양재천 도중에 지나칠 정도로 창의적인 황당한 표지판을 발견했다. 과거 독재자들이 왜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던 것인지 단번에 이해했다. 나라도 저건 이해 못 할 것 같다. 새로운 카페도 발견하고 빵 맛집; 프랑스인 남편과 한국인 아내가 만나 만들어졌다는 스토리도 완벽한 크래미엘도 발굴해 참 좋았던 하루!
운천 정훈 모임도 가졌다.
가스라이팅으로 하급자의 역량을 끌어내던 못된 과거 상급자를 만나러 와준 이들에게 참 감사하다. 동시에 잘 컸음에 대견함을 느끼기도 했다.
앞으로도 이들을 당겨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다짐하는 하루였다.
어쩌다 보니 디 올 뉴 팰리세이드 시승회까지 참여했다. 사실 팰리세이드보다는 GTX를 처음 타봤다는 사실이 기억에 남는 날이다.
파주 고양 등 경기북부 부동산의 잠재력을 확인했다.
저녁에는 영화 서브스턴스를 봤다.
이 작품을 어찌 평할지 도저히 몰라 여전히 리뷰는 못 쓰고 있지만 시빌워와 동일한 4점의 평점을 매겼다. '뚝심 있는 뇌절은 예술이다'라는 한줄평도 썼다. 2월 중에는 정리해서 써야겠다.
설 연휴 전에는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좌) 간만에 뉴비즈 완전체(인수인계 형태이긴 했지만)의 모임을 가졌고
(중) 아롬/지유 하우스 집들이도 있었으며
(우) 구갈중 친구들도 만났다.
관계 속에서 존재함을 느끼는 소중한 시간!
명절 연휴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족과 보냈다.
만두를 빚고, 폭설에 눈사람도 만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알토 옆에 누워 시간을 흘려보냈다.
쉼이 얼마나 소중한 지, 간만에 이렇게 쉬어봤다!
그리고 월말이자 연휴의 끄트머리에서 현지와 평창으로 스키 여행을 떠났다.
평창 고드름의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는 그곳의 추위를 가늠케 했다. 추우면 따뜻한 음식은 더 맛있고, 스키장은 더 즐거운 법. 남원식당에서 집밥 스타일로 맛있는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를 현지와 먹고, 어디선가 끊임없이 나오던 새끼 강아지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이후 스키장을 찾아 현지에게 스키 특훈! 가르침을 주고 장렬히 폴대를 잃어버렸다(누가 가져갔냐 진짜...). 이후 나는 보드로 전향해 현지와 광란의 질주를 즐겼다.
숙소 앞 큰골 식당에서는 생오리 참숯구이와 강원 소주를 마셨고, 숙소 지하 설맥에서 2차를 즐겼다. 여행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가장 큰 기억은 두 가지인데 '인맥보다는 설맥'이라는 가게의 네온사인 문구가 한 가지이고 '쉭쉭' 거리며 스키 타는 흉내를 내는 귀여운 현지 모습이 두 번째이다.
여기까지가 1월!
이만하면 됐다 싶은, 시작이 반이지 싶은 너무나 좋았던 1월이다.
어째 2025년이 좋은 해가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