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탈리스트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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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으로 높아지다 과거로 완성되는
건축 영화를 표방하는 만큼 건축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건축은 돈이 많이 든다. 배를 주리며 그림을 그린 천재는 있어도, 돈 없이 건축물을 완성한 건축가는 없을 것이다. 필연적인 거다.
그렇기에 훌륭한 건축가에게는 늘 훌륭한 투자자가 존재했던 것이다. 가우디가 지금의 바르셀로나를 완성할 수 있었던 건 구엘의 후원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건축주와 건축가의 관계는 바라보기에 따라서 고용인과 피고용인, 후원자와 피후원자 등으로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구원자와 피구원자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둘은 협업하는 관계이지만, 동시에 수직적 뉘앙스도 가진다.
배의 지하실에서 갑판으로 올라오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부터 라즐로는 수직적 계층구조 속에서 올라가려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번호표를 목에 매단 망명인, 그러니까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다. 사촌 아틸라에게 숙식을, 밴 뷰런의 아들에게 서재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제의받으며 계층 이동을 꿈꾸지만 아틸라의 아내가 한 거짓말과 밴 뷰런의 감정적 폭발로 모든 게 무너진다.
그렇기에 다시 찾아온 계층 이동의 기회; 밴 뷰런의 커뮤니티센터 프로젝트를 성공하는 것이 라즐로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헝가리에 남은 아내를 불러오고, 돈을 벌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은 프로젝트의 성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구원자에게 배신당하고 무시당해 왔기에, 건축물을 완성해 스스로를 구원하는 게 최우선 목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목적이 중요한 것이지, 과정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를 말하던 라즐로는 결국 목표를 위해 과정을 잃는 사람. 다시 말해 목적 달성을 위해 자신을 이용하기만 했던 구원자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만다. 건설 현장 직원들을 억압하고, 심지어는 본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고든마저 아랫사람 부리듯 부린다.
영화에는 이처럼 수많은 수직적 관계성이 등장한다. 유대인을 벌레 보듯 깔보는 미국인들, 라즐로에게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끝내 그를 '노망 난 개'로 표현하는 건축주 밴 뷰런, 흑인 고든에게 묘하게 동정과 연민을 표현하는 에르제벳, 아버지가 구원자이기에 본인을 마치 예수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건방진 아들 해리, 그리고 구원자인 아버지의 타락을 믿지 못하고 부정하는 모습까지.
모두가 수직적 계층구조를 올라가려 하고, 올라가며 변하는 모습을 보인다.
라즐로의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수직으로 높이 솟은 콘크리트 벽이 사방을 둘러싸고, 높은 천장에 창문을 만들어 빛이 들어오게 한다. 바닥에는 위에서 내려온 빛이 십자가를 만든다. 위에서 내려온 구원의 상징이 바닥에 맺히기에, 아래에 위치한 자들은 위를 볼 수밖에 없다. 밝은 빛이 내려오는 위 쪽을 보고 있노라면, 올라가야만 자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내내 수직적 구조에 집중하고 영화를 보다 보면, 에필로그에서 머리를 강력하게 맞은 듯 얼얼함을 느끼게 된다.
라즐로는 전쟁 속 아내와 갇혀 있던 포로수용소에서 영감을 받아 건축물을 디자인한 것으로 밝혀진다. 좁은 공간에 갇혀 높이 있는 창문을 보며 희망을 가졌던 시기를 기억하며 디자인했던 건물을 완성해야만 했던 이유는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성공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과거를 기억하고, 그 아픔을 건축으로 승화시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라즐로에 대한 시선이 '성공에 미친 사람이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가'에서 '아픈 과거를 건축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천재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가'로 전이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영화는 내내 수직으로 높아지다, 종국에 밝혀지는 과거로 완성된다.
실존 인물의 삶을 토대로 만들어진 각본이어도 훌륭할 판에, 허구의 인물로 이런 전기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혹자의 평론대로 '고전'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될 정도다. 4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 인터미션조차도 영화적 경험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배우들의 연기의 완벽함부터 촬영의 섬세함과 세트의 놀라움, 음악의 조화로움은 말할 지면紙面조차 남지 않을 정도다(이것들이 덜 좋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