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와 낭만을 좇는
열 번째 인터뷰이는 인터뷰어 김비실의 친구가 ‘정말 자유분방한 사람’이라며 인터뷰이로 납품해 준 욜로족 고바우님입니다.
목차
1. 인물소개
2. 오늘 여기의 나 - 지금 하고 있는 일
3. 가치를 추구하는 YOLO LIFE
4. 내가 추구하는 가치
5. 삶에 대한 평가 - 나, 그리고 타인
6. 후회하는 일과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
7. 기타 질문
8.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 토마토 학교
9. 마침
이름 : 고바우
나이 : 35세
성별 : 여성
학력 : 대졸(학사)/ 언론정보학과
경제력 : 마이너스가 되면 채우고, 플러스가 되면 쓰고, 0에 수렴하는 경제력으로 살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고바우고요. 서른다섯 살 여성입니다.
학력은 언론정보학과를 나왔습니다.
(언론정보학과에 들어가신 이유가 있을까요?)
원래는 PD가 되고 싶어서 언론정보학과에 입학했으나 방송국이 시키는 대로 영상을 찍어내는 기계가 돼버릴 것 같아서 지레 겁을 먹고 다큐 감독이 되기 위해 연극 영화과를 복수 전공했어요.
거기서 영화를 배우면서 다큐 감독이 되면 내 맘대로 찍을 수 있겠지 싶었는데 감독은 돈을 못 벌더라고요. 다큐 감독은 특히나.
(그럼 지금은 전공과 관련된 활동은 하지 않고 계신 건가요?)
네. 저는 학력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제력은 어떤가요?)
대학을 나오자마자 건설회사에 들어갔어요. 알바비와 차원이 다른 월급을 받고 그 당시 월급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어요.
한 달, 두 달 반, 반 년, 짧은 시간에 큰돈이 쌓이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1년 반을 지내고 나니까 암이 오겠다 싶어서 그만뒀습니다. 그 후로는 주머니 사정을 딱히 걱정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돈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니까요.
그래서 지금 현재 경제력은, 지난 1년 프랑스에 살면서 마구 써버린 마이너스 통장을 메울 만큼만 벌고 있어요. 다음 달이면 플러스 통장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플러스마이너스 제로를 향해 수렴해 가는.)
네. ‘0’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지키는 경제력으로 살고 있어요.
지금은 마이너스를 만회하기 위해서 김해에서 사무직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에 있을 때 일자리 제안을 받았는데 연봉이 나쁘지 않고, 숙식제공에, 사무직이라 일도 크게 힘들지 않겠더라고요. 지방으로 내려가 살아야 하는 건 부양할 가족이 없는 제게 큰 문제가 아니니까. 그래서 처음으로 김해라는 곳에 내려가서 살고 있어요.
(건축계열 일인가요?)
아뇨. 여기는 통신계열이에요. 땅을 파서 인터넷 선을 깔아요.
(광랜 같은 걸 까는 거군요.)
네. 사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에요.
(내가 즐겁고 행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거군요.)
네. 여기서 이 일을 [경제력이] 플러스로 올라오면 해야 할 일들이 있어요. 돈 쓸 계획을 쭉 세워놨어요.
(어떤 계획인가요?)
올해 12월에 프랑스 대학원에 지원할 거예요. 그리고 입학이 된다면 내년에 학기가 시작하는 9월부터 2년 동안 공부할 예정입니다.
건축회사와 광랜을 까는 회사 사이에 5년이라는 공백이 있는데요, 스타트업이면서 사회적 기업이었던 한 회사에서 만 4년을 일했어요.
(누가 봐도 돈을 못 벌 것 같은…….)
어어. 못 벌죠. 근데 행복했어요.
(어떤 일을 하셨길래 행복했을까요?)
발달장애인이라고 아시나요?
발달장애인도 장애 정도에 따라 자립이 가능해요. 그러니까 지원을 어떻게 해주냐에 따라서 혼자 교통수단을 이용해 출근을 하고, 자기 용돈벌이를 하고, 집에서 요리도 해 먹을 수 있는 거죠. 다만 그에 대한 교육이 마련이 마련돼 있지 않거나, 아니면 정보가 [발달장애인이] 이해하기 쉽게 제작되어 있지 않으면 힘들어요.
그래서 이 회사는 그분들이 투표를 하고 병원을 쉽게 이용하는 등 기본 권리들을 누릴 수 있도록 기존에 어렵게 제작돼 있던 정보들을 쉽게 바꾸는 일을 했어요.
(발달장애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적용시킬 수 있는 어떤 정보의 형태를 만들어가는 그 회사였군요. 그래서 그 안에서 오히려 돈은 못 벌었지만 행복했다.)
예. 왜냐하면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되게 많았어요.
어떻게 사람이 같이 일을 하면서 좋기만 하겠어요.[웃음] 나한테 스트레스도 주시고 어쩔 때는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분들이랑 같이 일을 하면서 제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를테면 상대를 배려해 가면서 일하는 커뮤니케이션 방법 같은 거요.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퇴사할 때 제 나이가 32인가 31인가였는데. 생각해 보니까 제가 5년 정도 연애를 못한 거예요. 그래서 지금이 아니면 연애하고 싶어도 못할 텐데, 어디를 가야 연애할 수 있을까 하다가 파리를 가게 되었어요.
(그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잡는다는 그 프랑스 남자들을 만나려고.)
[웃음] 그렇죠. 그런데 웬걸! 가자마자 독일 남자를 만났고 그 후에 또 프랑스 남자를 만나서.[행복한 웃음]
(아 유쾌한 삶을!)
네. 같이 스페인 남부도 가고 로마도 가고. 가본 적 없는 유럽의 도시 곳곳을 신혼여행하듯이 잘 다니고 왔어요.
(굉장히 로맨틱하네요!)
네. 전혀 후회가 없어요.
(그 돈들을 다 써서 나의 인생에 다시없을 기억을 만든 거니까. 소설 같아요.)
또 그렇게 연애할 수 있을까? 그걸 기대하면서 내년에 또 파리에 가죠. 공부라는 목표가 있지만, 공부하면서 연애도 하면 좋겠죠.
(달콤함을 위하여. 거기에 나의 커리어도 같이 더해서.)
[웃음]
(고바우님을 제게 소개해 준 친구가 왜 고바우님을 두고 자유분방한 사람이라고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일해 왔던 과정들은 어떻게 보면 평범하다고 볼 수도 있는데, 느낌이 소위 말하는 욜로에 가까운 것 같아요. 오늘 이 순간을 가장 즐기며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돈이 없을 땐 돈을 좇고, 돈이 생기면 나를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나가고. 굉장히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누군가가 보기에는 대책 없이 산다 이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직 동심을 간직하고 제가 보기엔 너무 멋있다.)
[웃음] 행복합니다요!
발달장애를 장애 스펙트럼이라고도 말하거든요. 되게 다양하기 때문에 그래요.
발달장애인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도 있고 언어발달이 더디거나 지능 자체가 낮은 사람도 있는데 그 사람들을 다 통틀어서 발달장애라고 불러요.
저는 사회복지나 이런 전문성 있는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어쩌다 대학생 때 시작한 자원활동에서 발달장애인 아동과 짝꿍이 되어서 소풍 다닌 게 다예요. 그곳에서 이 사람은 이런 특징이 있구나 이 사람은 이런 걸 좋아하네, 이런 건 되게 두려워하네, 하며 한 사람 한 사람과 관계를 맺어왔어요.
장애의 특징이 워낙 다양하다 보니까 지원 방법도 개별적으로 진행되는 게 많더라고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은 그런 맞춤형 활동을 기획하는 일인데 이게 참 비효율적이고 또 돈이 많이 들어가니까, 복지 예산을 아까워하는 한국보다는 유럽이 공부하기에 좋겠다. 해서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게 됐어요.
(증상도 수준도 다양한 발달장애인 개인에게 맞춘 복지에 관심이 생긴 거군요. 자원활동을 하셨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이었나요?)
‘토마토 학교’라고 매주 토요일에 발달장애 아동과 함께 놀러 가는 프로그램인데요. ‘토요일마다 토닥토닥’의 준말이에요. 주로 어린이대공원, 스케이트장, 수영장 등을 다녀와요. 그걸 10년 넘게 했어요… 세월이 어찌나 빠른지… 지금은 김해에 내려와 있어서 1박 2일 캠프에만 참여하고 있어요..
(장기간 활동한 만큼 토마토 학교 활동이 고바우 님께 영향을 많이 끼쳤을 것 같습니다. 자원활동을 하면서 스스로 달라진 점이 있나요? )
불편한 게 많아졌어요. 특히 공공장소에서 발달장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물론 혐오하는 눈길은 아닐 거예요.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발달장애인을 만날 수 있는 일이 흔치 않으니까요. 낯설어서 무서울 수도 있고, 호기심에 바라볼 수도 있죠. 또 모든 발달장애인이 다 착한 건 아니거든요. 그중 누구는 폭력적이거나 대하기 힘든 사람도 있어요. 우리 중에 착한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듯이요.
그게 호기심의 눈길이라고 해도, 이상하게 저는 그게 싫더라고요. 그냥 길 가던 행인 중 한 명인 것처럼 생각할 순 없을까.
(토마토 활동은 어쩌다가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그것도 사랑이네.
첫사랑에 실패해서 맨날 울고 있을 때 한 선배가 궁상떨지 말고 할 거 없으면 나오라고 했어요.
그날 뒤풀이에서 울었지 뭡니까. 다음날 이불킥을…….
(이 토마토 활동을 통해서 발달장애인에 대한 어떤 가치를 지니게 되신 거군요.)
그렇죠.
(이걸 계기로 심지어 직장도 그쪽 분야로 가고, 유학까지 준비하게 되신 거네요.
정말 운명처럼 실패한 첫사랑!
그건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었던 거네요.)
그렇네![깨달음!]
제가 생각했을 때 이건 조기교육입니다.
어떻게 보면 슬픈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부부 싸움을 하셨을 때 아버지가 폭력적으로 변하셨어요. 술의 힘으로……. 어머니는 맞기만 한 거죠.
첫째 딸이었던 제가 그 앞에서, 너무 옛날 기억이라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아빠 그만 때려!’라고 말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아빠가 저를 보러 찾아오겠다고 했을 때 전화에 대고 ‘아빠, 그러지 마. 내가 경찰에 신고할 거야.’라고 말했어요. 그 당시 제가 한 10살쯤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 얘기를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너무 무섭고 강렬했나 봐요, 그 순간이.)
엄마를 위해서 [해야 했어요.] 엄마가 못하니까 나라도 [해야 한다].
그런 것 때문에 지금도 누군가를 위해서 행동한다는 게 남들보다는 덜 어려운 거 아닐까.
(어떻게 보면 그 용기는 타고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무력한 상황에 엄마가 노출되는 걸 보면 같이 무력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모습을 학습하니까. 근데 함께 무력해지고 두려움에 떠는 것이 아니라 직접 나설 수 있는 건 이미 본인 안에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물론 안타까운 환경에서 그걸 조기에 실천으로 옮겨야 하는 상황이 있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원래부터 고바우님이 가지고 있던 강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내가 드셌나?
(용기라고 합시다.)
고집이 셌나? [웃음]
(그럼 누군가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으면 엄마가 좀 생각날 수도 있겠어요.)
한 번은 친구가 저 먼 나라 사는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공감을 하는 거냐고 물어봤어요. 저는 할 수 있는 게 없더라도 관심을 갖고 알고 있어야 한다고 했죠. 그 친구는 다시 ‘그래서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T 같은 질문을 했죠.
돌이켜보면 저는 뉴스만 봐도 사회적 분노를 쉽게 느끼는 편이었어요. 단순히 제 공감 능력이 좋은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친구 얘기를 가만 들어보니 저도 문제가 있더라고요. 분노를 느끼게 하는 소수자들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혐오하고 있었어요.
(일종의 언더독 효과처럼 일단 무조건 소수이고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편들어주고 있고, 그 위에 있는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싫어하고 있다는 거군요.)
네.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 형태조차 막연하면서 분노만 하고 있었죠. 그럼 그 친구가 ‘그렇게 좀 생각하지 마!’라고, 너무 갇혀있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들도 한 명 한 명이 즐겁고 재미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러니까요. 친구가 ‘왜 너는 네 생각만 하냐!’고, 너무 갇혀 있다고 말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고정관념을 가지고 계신 거구나.)
그렇죠. 그래서 말을 줄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조심해야 해요.
저는 제 인생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평가합니다.
이 질문 보고 든 첫 생각은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상관없다는 거였어요. 내가 어떻게 보일까, 사회적 지위가 어떻게 될까, 그걸 기준으로 선택한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오히려 그런 것들을 배제하려고 노력하죠.
하지만 요즘 부쩍 부모님이 걱정이에요. 이분들이 살아오신 삶은,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사는 삶이었을 거라 생각하거든요.
얼마 전에 엄마가 이번에 저를 데리고 교회 갔는데, 제 직장이 뭔지 얘기해야 하는 자리가 있었어요.
제게 ‘지금 무슨 일해?’라고 물으셔서 제가 ‘저 그냥 사무직 해요.’라고 답했는데, 순간 엄마에게 미안했어요.
이어서 ‘아니 근데 왜 시집 아직 안 갔어?’, ‘아유 이렇게 괜찮은 처자가 여태 뭐 했어?’, ‘배우자 기도해야지.’라고 인사를 하시더라고요 [웃음]
기껏 낳아 키워줬는데 얘가 하라는 결혼은 안 하고 자유롭게 살고 있으니. 자랑스럽지 못한 딸이 된 것 같았어요. 엄마의 연령대에서는 손주 자랑, 자식 자랑 이런 게 낙일 텐데 그걸 하나도 못 맞춰주고 있는 느낌?
그래도 엄만 괜찮다고 해요. 가끔 만나는 아빠만 “나만 없어 손주. 엉엉” 하시죠.
(우리 아버지도 ‘너흰 언제 결혼할 거냐!’ 이러셔요. 하지만 아빠, 결혼은 혼자 해?)
[웃음] 애는 얼마든지 데리고 올 수 있다! 단, 남편 없이! 이렇게 큰소리치면 돼요.
음, 그거 말고는, 네, 저는 제 인생에 만족해요.
(내 삶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한다고 주저 없이 말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드물다고 생각하거든요. 보통 사람들이 내가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들을 더 많이 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망설임 없이 나는 만족하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 만나는 게 감동적입니다.)
철없다.
(철없다? 어어, 서른다섯인데.)
[웃음]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아 며칠 전에 단단한 사람 같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되게 단단한 사람인 거 같다고.
(단단하지 않으면 그렇게 못 살 것 같아요. 확실하게 내 선택에 확신이 있어야 되니까.)
또 한편으로 저는 제가 실패한 것들을 나열하는 걸 즐기는 것 같기도 해요. 변태인가…….
스무 살 즈음에 정말 열심히 살면서도 왜 쳇바퀴 굴레에 갇혀 있는 것 같을까 고민했을 때가 있었거든요.
잠을 줄여가면서 열심히 살고 있고, 또 나름대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 이토록 불안할까. 이제 그만둬야 하나 싶었죠. 그때 누가 그랬어요. 2차원으로 보지 말고 3차원으로 봐라. 그 굴레를 관통하는 잠재력을 보라고. 네가 열심히 사는 게 어느 순간 터질 거라고. 그게 되게 위로가 됐어요.
지금 당장 내 노력이 성공이란 결과를 낳지 않더라도 내 안에 잠재력으로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겠구나.
그다음부터 실패가 좋은 거예요. 내가 뭔가를 했다는 척도인 것 같아서. 언론 고시 실패. 국제기구 취업 실패.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이것저것 다 실패… [웃음]
실패만 하다 보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저는 더 가난해졌고 이전보다 살기 조금 더 팍팍해졌어요. 그리고 어느 누가 ‘너 그래서 프랑스 1년 갔다 와서 얻은 게 뭔데?’라고 한다면… 불어라고 답하고 싶지만 그것도… 실패하고 연애만 하다 왔지요.
(아름다운 기억? 낭만적인 추억?)
[웃음] 추억 몇 개 건져왔지.
제아무리 ‘성공했다’라고 한들 다 좋게 해석하려고 하는 거지 사회적으로 봤을 땐 실패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결론은, 내 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다. 근데 난 성공한 것처럼 만족스럽다.
저는 쉽게 인정해요.
(아, 나 철없는 거 맞다?)
네. 저 철없는 거 같아요. 그래서 결혼을 못 해.
친구가 곧 결혼을 하는데, ‘넌 평생 결혼을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이래요.
또 쉽게 인정했죠. 자기애 과잉이라 자식을 위해 희생할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냥 철없게 살래!라고 말하는 거군요.)
네. 연애까지만 하고. [웃음]
(이게 먹고 살 걱정만 없다면 가장 살고 싶은 낭만적인 삶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가요?
제 욕구 중 하나는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거거든요. 발달장애인을 위해 쉬운 정보를 만드는 회사에서 가장 오래 일했었는데, 그보다 좋은 직장이 있을까 싶어요.
발달장애인을 직접 만나고, 그분들과 같이 콘텐츠를 제작하고 또 그게 현장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었죠. 그 과정에서 제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구나 느꼈어요. 향후에도 일에서 가치를 찾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 프랑스로 떠나야 한다.
(나에게 발달장애인과 그들의 삶, 그리고 그들의 가족에 대한 것이 좀 중요한 가치가 됐나 봐요.)
근데 그 가치가 되게, 사람들이 말할 때는 대단한 것처럼 보이는데 저는 그냥 내가 신경 쓰이고 내가 계속 관심이 가는 것에 집중하는 것일 뿐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눈 한번 꾹 감고 지나갈 수 있는데 나는 그럴 수 없는, 그냥, 이 사람들에게 뭔가 문제가 생기면 같이 나서줘야 할 것 같은 그 정도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해요. 저처럼 쉽게 눈을 감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저도 다른 문제에는 눈 감겨요.[웃음]
(혹시 직업적인 것 말고도 미래에 내가 나이가 들었을 때 어떤 모습으로 늙고 싶다 이런 이미지가 있을까요?)
술 말아주는 할머니!
(구체적이네요. [웃음])
저는 진짜 바닷가 앞에서 칵테일 바를 하고 싶어요.
(양양 같은 데서요?)
네. 그때쯤이면 프랑스어도 할 수 있을 테니, 여행 온 외국인들과 영어, 프랑스어로 대화하면서 코냑, 칵테일만 마시지 말고 막걸리, 탁주도 마셔봐라 하면서 같이 노는 게 제 꿈이에요.
(골드미스로?)
아뇨. 아이도 셋 낳고 싶어요. 철없다고 하는 이유가 그거예요.[웃음]
처음에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딱 한 번, 있어요.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어머니의 빈자리를 느낄 때 제게 힘이 되어 줬던 이모가 있는데요. 종종 비싼 레스토랑에 데려가 주고, 예쁜 옷도 사주고 그랬어요. 제 우상이었던 이모가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어요.
(젊으셨네요.)
제가 기억하는 우리 이모는 항상 예뻤고 멋있었어요. 사회에서 말하는 그 소위 예쁘고 능력 있고 돈 많은 멋진 삶.
(일등 신붓감이군요.)
이미 멋진 남자친구도 있었어요. 사진작가로, 10년 넘게 연애한 끝에 이모부가 되셨죠. 두 분이 맨날 데이트 나갈 때 저를 껴주셨어요. 그렇게도 완벽했던 이모가 아기를 낳고 돌아가신 거예요. 그때 제가 20살 막 돼서, 심야 영화관 아르바이트하고, 과외 두 탕 뛰고, 시험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었어요.
(이모를 보러 갈 시간을 못 냈구나.)
네. 이모 만나러 병실에 가서도 잠 못 잤다고 하면서 잠만 자고, 이모랑 조금 더 대화를 못하고 보낸 게 가장 후회스러워요. 만약에 과거 중 언제로 돌아갈래라고 생각하면 저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모와 더 이야기할 수 있는 때로.)
네.
(그렇다면 이 이별을 제외하고는 내 삶에 대해 후회하는 게 없는 건가요?)
네. 물론 있기야 하겠죠. 내가 잘못한 선택이 어딘가 있기는 할 텐데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프랑스에 간 일입니다.
[어째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비밀로 하셨다.]
저는 건강미가 넘치는 사람으로 보였으면 좋겠어요. 산만하게 많은 걸 했거든요.
이집트 가서 프리다이빙 자격증도 따오고 프랑스에서 테니스도 배워왔고. 비발디 시즌권을 사놓고 스노보드 자주 탔어요. 풋살은 어제 뛰고 왔어요. [웃음] 헬스장도 주 3일씩은 계속 가고요.
(굉장히 살찔 틈 없이 살고 계시네요. 스포츠를 왜 그렇게 좋아하시나요?)
예전엔 술을 먹기 위해 운동한다고 했는데, 요즘엔 술도 잘 안 마시는데 이래요.
(이렇게까지 몸 쓰는 걸 좋아하시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프랑스에 가기 전에는 스포츠를 갈구하는 것이 호기심과 소유욕으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장비를 열심히 사놓고 조금 하다 말고, 조금 하다 말고. 그래서 지금 말한 스포츠들 모두 어디 가서 명함 내밀기 민망할 정도의 실력이에요.
근데 프랑스에 지내면서 남자친구랑 매일 아침 ‘팍 드 쏘(Parc de Sceaux)’라는 예쁜 공원을 뛰다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그동안 제가 가진 스포티한 에너지를 어떻게 분출해야 하는지 몰랐던 것 같아요.
(이것저것 시도해 보면서 에너지를 분출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익힌 것 같다는 거군요.)
네.
(어른 같아요.)
철없다고 말씀드렸는데. [웃음]
너무 하고 싶어요.
(왜 하고 싶으세요?)
왜냐면 결혼을 한 친구들이 굉장히 어른스럽더라고요. 그들처럼 어른스러워지고 싶어요.
그래서 아, 한 번 사는 인생, 결혼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다만 철없는 나를 받아 줄 만한 믿음직한 누가 생긴다면… 아무튼 저는 결혼하고 싶다.
(결혼이라는 행위에 대한 어떤 욕구는 그냥 인생 살면서 한 번 해봐야 되는 거 아닌가라는 마음에 더 가까울 것 같네요.)
결혼은 하나의 제도이니까 한번 해보면 좀 어떨까 하는 가벼운 생각이었어요. 자유롭게 살고 싶지만 결혼을 ‘구속’처럼 생각해 놓진 않아요.
(결국에는 그냥 나도 누군가 평생 같이 살아갈 수 있을 만큼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이 제도에 내가 발 담그겠다. 딱 이 정도 마음인 거네요.)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제 마음을 이렇게 잘 읽으시죠?
[웃음]
저는 저를 닮은 딸 하나 아들 둘 낳고 싶어요.[웃음]
(아주 구체적이시군요.)
소유욕이죠. 좋은 아빠가 될 것 같은 남자, ‘우리’가 되었을 때 행복한 가족이 그려지는 남자가 생기면 실행에 옮길 거예요.
(좋은 남자 그리고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아이가 있는 가족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구나.)
그게 가능하겠냐고요. [웃음]
(그래서 철이 없다는 이야기를……!)
[웃음] 희생할 건 생각 안 하고.
(그러면 아이를 낳았을 때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본인이 하시니까 나는 정말 철없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군요.)
맞아요. 맞아요.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더 힘들어질 텐데 굳이?
재미난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고, 지금까지 누리던 것들을 아이를 낳고 나면 절대 하지 못할 텐데 굳이? 자꾸 굳이라는 말은 어딘가에 계속 붙이는 것 같아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온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는 것 같다.)
토마토 학교를 홍보하겠습니다.
토마토 학교는 ‘토요일마다 토닥토닥’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매주 토요일마다 발달장애인 아동과 1:1 짝꿍이 되어서 어린이대공원, 키즈카페 등에 나들이를 떠나는 프로그램입니다.
저희는 봉사활동이 아니라 자원활동이라고 부르고, 장애우가 아니고 장애인이라고 부릅니다.
(장애인과 장애우, 용어에 어떤 차이가 있나요?)
장애우(友)는 친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요. 이 사람과 내가 친구가 아닌데 친구라는 의미를 넣어서 마치 상대를 돌봐야 하는 거 같은 관계를 만들어요. 장애인은 표준어로 그 사람 자체를 표현하기 위한 말이고요.
(그렇다면 토마토 학교, 왜 추천하시나요?)
이 토마토 학교를 왜 추천하느냐! 일주일을 마감하는 좋은 활동입니다. 직장인이라면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을 보고 업무 스트레스가 사르르 녹아요. 대신 체력은 좀 잃지만요.
(누군가에게는 피로가 쌓일 수도 있겠네요?)
네. 세 시간 동안 아이에게 눈을 떼면 안 돼요.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어요. 그래서 쉬운 일은 아니에요.
아이가 후룸라이드를 좋아한다? 그럼 거기 가서 20번을 타는 거예요. 아이가 뛰는 걸 좋아한다? 그럼 얘만 잡으려고 뛰어다니는 거예요. 아이가 같은 질문을 세 시간 내내 한다? 그럼 중간중간 다른 주제를 꺼내 다양한 대화를 시도해 보는 거예요.
어떤 짝꿍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내가 정신적으로 피로할 수도 있고 육체적으로 피로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어느새 즐기게 될 겁니다. 행복해하는 아동들 미소가 너무나도 큰 행복을 줘요.
간혹 누군가 찍어준 제 사진을 보면 ‘내가 이렇게 활짝 웃었나?’ 싶다니까요.
그래서 더 많은 분들이 토마토 학교에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어요. 더 많은 분들이 이 아이들의 아름다움을 알고 함께 행복을 알게 됐으면 좋겠어요. 아까 얘기했던, 공동장소에서 발달장애인을 신기하는 사람이 줄었으면 좋겠어요.
(발달장애인이 낯설기 때문에 보낼 수밖에 없던 눈길들이 아이들과의 시간을 통해서 그들을 배려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한 명 늘어났으면 좋겠다.
딱 한 번만 와도 좋으니까 와서 찍먹이라도 해보시라는 의미에서 토마토 학교를 추천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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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남들의 이야기도 정말 궁금해지네요. 저 너무 솔직했나요……? 약간 민낯을 보인 것 같아서 민망하긴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게 저인 것을 [웃음]
그나마 비실님이 포장을 잘 해주실 것 같아요.
(열심히 포장해 보겠습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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