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개똥철학은 있다(아닌가?). 세상과 인생을 보는 관점,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 등에서 비롯된 각자만의 신념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개똥철학이라고 개무시(?)할 일은 아니다. 울 엄마의 개똥철학은 내게 대를 물렸다. 유전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야무지게 그리고 끈적하게 톱니바퀴 맞물리듯 돌아가는 게 엄마와 딸의 관계이니 개똥철학쯤 공유하는 건 시쳇말로 당근이다.
엄마는 젊었을 때부터 허리가 좋지 않았다. 일상생활은 간당간당하게 이어 가지만 무리를 하면 허리 병이 도진다. 친구들과 오래전 중국으로 여행을 다녀오셨는데 한 번은 꽤 먼 길을 걸어야 했단다. 그곳의 현지인들은 두 사람씩 짝을 지어 가마(?)를 어깨 위에 지고 걷기 힘든 여행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엄마의 허리 병을 아는 오래된 친구들은 엄마에게 그 가마를 이용하라고 권했지만, 엄마는 못하겠더란다. 그게 가마가 아닌 차였다면 냉큼 올라탔겠지만, 응급상황이 아닌 이상 남의 어깨에 올라타서 갈 수는 없다 하셨다. 그 와중에, 엄마의 일행 가운데 부유한 집 마나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녀는 가마꾼을 불러 가마를 탔단다. 그것도 흥정을 붙여 요금을 깎고는 가마에 상감마마처럼 몸을 실었다. 저마다의 개똥철학은 극명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엄마와 나는 한 번도 세신사에게 몸을 맡긴 적이 없다. 우리의 개똥철학에 비추어보면, 멀쩡한 내 팔과 손을 놔두고 도마 위의 생선처럼 벌거벗은 몸을 맡긴 채 비늘이 긁히는 일 같은 세신은 할 짓이 못되었다. 언젠가 내게 마사지 쿠폰이 선물로 들어오자 나는 그걸 주위에 나눠주기도 했다. 사람들은 세신사에게 몸을 맡기고, 마사지를 받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지만, 혹은 누리는 행위라고 여기기도 하지만 우리 모녀에겐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나의 불편한 다리가 못하는 일, 가령 청소일 같은 건 남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고 부탁해도 마음이 힘들지 않다. 누리시는 분들에 대한 질타는 결코 아니니 오해는 마시길. 엄마와 나의 개똥철학이 그렇다는 거다.
언젠가부터 네일샵이란 곳이 생겨났고 이제 그곳에서 손톱을 관리받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내게, 네일샵에서 손톱을 관리받는다는 건 세신사에게 몸을 맡기고 누워있는 거랑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나로 말하자면 손톱 칠하는 스킬은 제법 선수다. 내 몸 가꾸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남에게 맡기는 건 나의 개똥철학에 위배 되는 일이었다. 기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동안 아름답고 싶은 본능은 고이 접어, 혹여 그 본능의 빛이 바랠까, 빛 안 드는 선반 위에 고이 모셔 두었다.
“엄마, 네일샵에 꼭 가세요. 엄마 손이 엄마를 위해 얼마나 수고 하는데 이제 대접 좀 해주세요. 엄마처럼 예쁜 것 좋아하는 사람이 예쁜 손으로 글 쓰면 기분 좋잖아요.”
그녀도 내 딸인지라 나와 비슷한 개똥철학의 소유자이지만, 그녀의 말에 따르자면 나는 이제 좀 누리고 살아도 된단다. 그간 충실히 살아왔으니 그깟 개똥철학은 내게 이미 유효기간이 지났고 이젠 ‘호강타임'을 맞을 때라나. 원래 속 깊은 아이지만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제 엄마의 지난날을 알아주는 것 같아 흐뭇했다.
환한 불빛 아래서 손톱 정리를 받고 어떤 색을 입힐까, 고르는 일은 어른들의 공주 놀이 같은 소소하고 재미난 일탈이었다. 핑크빛으로 새 옷을 지어 입은 손톱 위에 윤슬이 내려앉았고, 긴 손톱의 길이만큼 연장되어 보이는 내 손가락의 길이가 황홀했다. 신체의 말단인 발에 하이힐이 신겨진다면 또 다른 말단인 손톱에는 매니큐어가 칠해진다. 길고 예쁜 손톱은 손이 장착(?)하는 하이힐이다. 높고 뾰족하니 고유한 굴곡을 그리는 아찔한 자존심. 그 아찔함 때문에 여자들이 하이힐을 신듯 새 옷을 입은 나의 손톱에서 그 아찔함이 전해져 왔다.
나만큼이나 예쁜 걸 좋아하는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엄마도 네일샵에 가보세요. 젤이란 걸 바르면 한 달도 넘게 간대요.”
“응. 뭔지 안다. 옆집 할머니가 손녀 시집간다고 발랐던데 예쁘더라. 엄마도 한번 해볼까?”
엄마보다 더 나이 많은 어르신들로부터 엄마는 손이 예쁘단 말을 자주 듣는다. 팔순을 넘긴 노모도 예뻐지고 싶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던가. 엄마의 개똥철학에 대한 경계도 나의 그것처럼 스르르 무너지고 있다. 시대에 맞춰 변하지 않고 진부한 소리만 늘어놓는 사람을 꼰대라고 한다지? 꼰대 개똥철학은 적당히 내려놓아도 좋을 성싶다. 세상이 그리고 내 나이가 그 경계를 허문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벌거벗은 몸을 도마 위에 눕히는 생선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