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장터 구경을 갔다. 시골장 둘러보기를 좋아하는 나는 아침부터 신이 났다. 장에 도착하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장터 안의 한 식당에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라는 주인의 인사와 더불어 자리에 앉자마자 눈에 들어온 게 있었으니 그건 ‘산은 산이요, 물은 셀프'라고 나무에 새겨 식당 천장에 매달아 놓은 팻말이었다. 위트 있는 그 말에 웃음이 났지만 왠지 씁쓸함을 숨길 수 없었다. 잘 가다가 삼천포로 빠진 느낌이 들었달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1981년 현대 불교계의 큰 인물인 성철스님이 조계종 종정 취임에 즈음하여 내리신 법어라고 한다. 언제인지 기억은 없지만 처음 그 말을 접했을 때,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뜻쯤으로 여겼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줄 누가 모르겠나. 하지만 그걸 법어로 세상에 내어놓으셨을 때는 그 안에 어떤 철학이 들어있겠거니 생각했다.
마음 닦는 공부를 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경지를 불교 용어로 견성이라고 한다. 일반인들은 말 그대로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산다. 그러다가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는 깨우침을 얻게 되는 단계가 온다. 하지만 견성이 더 깊어지면 마침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임을 다시 깨우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깨달은 산과 물은 그전에 중생의 눈으로 본 산과 물이 아니란다. 아직 깨달음의 단계에 들어서지 못한 나로서는 알 듯 모를 듯 모호하고 알쏭달쏭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속에 오묘한 뜻이 있단 건, 어느 개그우먼의 말마따나 ‘느낌적인 느낌’으로 알 것 같다.
화개장터의 한 식당에서 본 산은 산이요, 물은 셀프라는 문구가 왜 삼천포로 빠져버린 씁쓸함으로 다가왔는지는 내 나름의 그 문구에 대한 해석 때문이었다. 뭔가 깨달음의 경지로 갈듯 시작은 원대하다가 지극히 현실적이며 다소 이기적인 ‘셀프’라는 단어가 마냥 언짢았다. 그 식당의 위치가 깍쟁이들이 산다는 대도시가 아니라 웅장한 산 아래이며 지리산에서 시작된 화개천과 섬진강이 만나는 지점이라 명산의 장엄함에서 오는 큰 기운과 시골장의 정겨움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식당이라고 차려놓고 손님이 들어오면 얼른 자기 이익부터 챙기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어서 오세요. 그런데 물은 직접 가져다 드세요’라고 하면 이율배반적 아닌가? 어서 오시라며 반겨놓고 물 한 잔도 제 손으로 대접하기 싫다면 손님이 환영받는 느낌이 들까? 물도 손님이 직접 가져다 먹고 쟁반 위에 놓인 음식도 스스로 가져다 먹는 삭막한 도시의 ‘푸드 코트food court’도 아닐진대 어째 인심이 좀 야박하다 싶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각박해져만 간다. 우아하게 ‘산은 산이요’를 읊어가다가도 자신들의 이익이 상충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물은 셀프’가 되고 만다. 곤경에 빠졌을 때 진실한 친구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 정승네 강아지가 죽으면 조문객이 구름처럼 몰려들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와보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얼굴 바꾸기가 만연하다. 너와 나의 구분이 확실하다. 그렇게 얼굴 바꾸기와 선 긋기가 확실하지 않으면 살기 힘든 세상이기도 하다. 남의 보증을 잘 못 서서 패가망신하는 이들도 보았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이도 여럿 보았다. 풍요 속에 점점 더 각박해지는 우리들은, 아무리 제도가 그러할지라도, 인심을 나눠도 좋을 부분에서까지 너무 그러지는 말았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