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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봉길 Feb 18. 2022

전철에서 만난 콩쥐 12

턱을 괴고 앞으로 고꾸라지듯 전철 의자에 웅크려 앉은 여자. 

여자의 귀가 하얗게 보여 눈부시다. 

아침 햇살이 전철 창문을 뚫고 여자 귀에 부딪힌 것 때문이리라. 

오늘도 전철이든 어디서든 사람은 누구나 누구를 보고 산다. 

그 누구가 그 자신이든 아니든. 

나 역시 항상 

앞엔 나같은 그대가 있는가 하여 앞을 보고 또 보는 것이었다. 

여자는 뭐가 못마땅한지, 

멀뜩하니 뱉어내는 혼잣말들이 

예닐곱 걸음 떨어진 전철바닥을 타고 내 발등으로 소복히 쌓인다.   

  

‘이젠 내 사랑 그대가 앞에 없어도 좋아요. 

그래요, 누가 있어도 그 모두 그대 입김이 되는 걸요. 

두 손을 얼굴 가득 움켜잡고 참아도 참아도 흐르는 눈물이 

손 얼굴 가슴 끌어 안고 지샌 시간만큼 이제 또 흐르는 걸요. 

움직이지 않을래요. 

누구 이 두 손 풀어 하늘 바라보라할 때까지요. 

아, 그러나, 

이 전철 앞에선 사람들이 나의 하늘이 없어진 걸 알까요?’     


전철 문이 닫히고 닫혀도 

여자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내리꽂히는 가을은 멈춘 듯하다. 

여자도 아는가 보다. 

사랑이란 언제나 자신 가슴에서 나와야 하는 것을. 

슬픔도 또한 자신 가슴 속에서 나오는 것을. 

여자의 사랑은 끝내 세상을 향한 수많은 가시가 되는가? 

가시는 여자 가슴을 기어이 뚫고 쉼없이 밖으로 뿜어져 나오더니, 

어느새 내 코끝까지 꼬박꼬박 쌓이며 올라온다. 

하, 그래서, 여자는 내 코끝을 올려다 보지 못하는가 보다. 

땅아 뚫어져라 

전철 바닥에다 대고 한없이 하얀 말들을 퍼붓는 걸 보면.     


이제 말을 새로 배워야 할까봐요. 

사랑이 없는 말, 눈물이 없는 말을요. 

아즈작 밟히는 낙엽더미 위 둥근둥근 구름만 놀고 있는 말을요. 

누가 함께 놀다가 웃다가 하는 말도요. 

물이나 풀이거나 구름이 함께 사용하는 말이면, 

그래요, 모두 좋아요.

   

여자가 비스듬 눈을 아래 한 곳을 보는 것은 

사랑을 멀리 보내려는 동작이 분명했다.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것, 

그랬다, 분명히 큰 결정을 하는 순간들일 거다. 

전철이 흔들리는대로 그래서 몸이 쓸리는대로 흩어지는 여자 말이 

갈 곳을 몰라 내 가슴을 꽉 메우며 숨막히게 한다. 

난 가슴 속에 대고 제발 빨리 내려주었으면 하며 꽉꽉 소리쳤다. 

여자는 지금은 아직 자신의 말 들어야 한다며, 

강한 시선으로 

문도 열지 못하게 하며 전철을 더 빨리 달리게 한다. 


어쩌면, 새로 배운 말은 

스스로 만든 멍든 가슴 사람에게는 안 들릴지 몰라요. 

그래도, 무슨 소린지 몰라도, 

지금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서로 고개를 끄덕이겠죠. 

어쩔까요, 발가벗겨진 말들이 

이젠 갈 곳을 몰라 서로 얼싸안은 채 눈감고 있어요. 어쩌지요? 

눈 감고 누구에게도 다가서지 못해 하늘을 우러르고 있네요. 

오늘은 그대들 모두 내 곁을 떠나주었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내가 떠나든.

   

갑자기,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잽싸게 안경을 벗어 왼손에 쥔다. 

전철 문이 열렸다. 

전철을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여자가 씩 웃는다. 

어? 여자가 나가자마자 문이 서둘러 닫혔다. 

분명 내릴 곳은 아니었을 텐데. 

여자는 한 두 걸음 걷다가 두리번거린다. 

웃음 띤 여자 얼굴이 눈부시다. 

사람들과 멀리 떨어지고 싶은 즐거움을 만끽이라도 하듯, 

여자가 춤추듯 몸을 흔들었다. 

손가방을 오른손으로 운동하듯 크게 돌리며. 

무엇이 갑자기 여자를 즐겁게 했을까? 

전철 안으로 들어오는 여자 목소리는 콩쥐가 웃던 소리였다. 


‘어쩌다 툭하고 간단히 일어나면 좋죠. 

어디에 누구와 있든, 헤어져 떨어져 보면 좋죠. 

그냥 자유니까요. 호호, 지금처럼요! 

이럴 땐, 내게서 가슴이 사라진다니까요. 

호호, 가슴은 어디 갔는지 몰라요. 

지금 이 순간도 어디 갔는지도요!    

 

여자가 사랑병을 앓고 있던 것은 아니었단 말인가? 

세상사 어느 것이든 바늘구멍에 넣고 싶어한 모습이 아니었단 말? 

나 혼자 고민을 만들어, 

고민을 덜어주려했던 전철 몇 정거장 착각이라니! 

허허, 그냥 내 마음병이 만든 냈던 쓸데없는 시간이라니. 

참. 엉뚱한 여자와의 시간. 

그런데 참 묘하다. 

콩쥐 같은 여자 말꼬리 한 자락이 

전철 안을 휙 돌다가 전철 문이 닫히는 순간, 

사람들 얼굴 모두 웃음을 띠고 있었다. 

하, 이건 기적이었다.      


호호, 함께 전철을 탔던, 그쪽에 서 있던 아저씨, 고마워요. 

나를 단순하게 해줘서. 

새로움이란 단순함과 같네요!


여자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여자가 전철 창가 밖으로 사라지는 걸 보며, 

나는 웃음을 세 번 네 번 세며 웃었다. 

내 눈엔, 사람들 마음이 다 열려져 보였다. 

활짝 열고 서로 보며, 몇 번씩 웃는 것이라니! 

단순함이 곧 새로움? 

맞다. 그래, 모든 답은 간단할수록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었다. 

하, 모두가 단순해진 이 순간이라니! 

그래서 지금 전철을 탄 내게 

다시 새로운 말과 사랑과 행복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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