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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범수 Mar 26. 2022

내가 '딸'이었다면, 엄마는 더 행복했을까

가족은 3남 1녀

넷플릭스에서 '그대 이름은 장미'라는 영화를 봤다. 옛 감성을 느낄 수 있는 복고풍의 '쎄시봉' 같은 음악 영화인 줄 알았지만, 그런 음악 영화는 아니었다. 가수라는 꿈을 쫓아가던 장미가 남자친구와의 오해로 인해 싱글맘이 되어버리고, 딸을 키우기 위해 우여곡절 한 삶을 사는 모습을 그린 영화였다. 내가 영화에서 가장 주의를 기울이며 본 부분은, 장미의 그 험난한 과정 속에서 딸이 엄마의 친구이자 희망이 되어주면서 엄마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장면들이었다.


우리 가족은 부모님, 나와 세 살 터울의 형, 4명으로 구성되어있다. 남자는 셋, 여자는 하나, 엄마뿐이다. 여자가 엄마 한 명이든 딸이 있어 두 명이든, 그것이 뭐가 중요하다고 이렇게 얘기하는 것일까 생각할 수도 있다. 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까지는.

부모님의 품 안에서 자라는 초, 중학생 때까지 형과 나는 엄마와 친구처럼 지냈다. 엄마와 색종이 접기를 하고, 같이 등산도 하고, 벌레도 채집하고, 여행도 같이 다니는. 그런데 사춘기를 맞고 난 뒤에는, 엄마와 대화하는 말 수가 줄어들었고 엄마를 찾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게다가 고등학교, 대학교도 타지로 가면서 함께 생활하지 않게 되자 물리적 거리와 함께 심리적 거리도 조금씩 멀어졌다.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있으면 차라리 혼자 끙끙 앓지, 혹여나 엄마가 걱정하실까봐 엄마에게는 절대 내색조차 않았다. 지금은 그저 안부를 주고받는, 가족이기에는 멀고, 남이라기에는 가까운 사이인 듯하다.

엄마는 가끔 이런 얘기를 하곤 했다. 자기 친구들은 딸들이랑 여행도 가고 한다는데, 우리 아들놈들은 각자 살기 바쁘다고. 웃자고 하는 말이셨겠지만, 나는 이 말속에 엄마의 진심을 느꼈다. 그러나 정말 불효스럽게도,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핑계라면 집에 몇 달에 한 번가는 상황에서 집에 간다면 그저 집에서 쉬고 싶다. 물론, 엄마랑 같이 못 놀 정도로 바쁘냐고 묻는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언제인가 엄마의 나의 임신 일기를 본 적이 있다. 나의 성별이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된 날. 엄마의 일기 속에는 여자인 엄마를 더 잘 공감해 줄 수 있는 딸이기를 내심 기대했다고 쓰여있었다. 그런데 듬직한 아들도 괜찮다고.

작년인가 엄마가 나에게 몇 달동안 생리를 안 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생리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는 생리는 그저 귀찮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엄마의 다가오는 완경을 축하해드렸다. 근데 엄마는 완경이 싫으셨던 모양이다. 이후 다시 생리를 하셨는지, 카카오톡 상태메시지에는 '나는 아직 여자랍니다~ 유후^^' 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이 문구는 내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아 나는 엄마를 공감하지 못했구나'


갱년기로 우울한 날이 많아지는 요즘, 엄마의 곁에 친구같은 딸이 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사람이 딸이라고 친구처럼 지내고, 아들이라고 친구처럼 지내지 않는 것은 아니다만 성별의 장벽은 무시할 수 없다. 무언가 딸이 있고 없고에 따라 집안의 분위기도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엄마 아빠가 최신 트렌드를 못 따라가는 것 또한 잘 알려주지 않은 나의 잘못 같다.


엄마 아빠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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