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다 찾아온 아이의 급똥
긴급상황인 줄 알았다.
공기가 제법 따뜻해졌다. 봄기운을 느끼기 시작하면 이내 여름이 올 걸 알기에 날씨가 좋으면 잠깐이라도 햇볕을 쬐러 나가려고 한다. 문제는 집순이 엄마와 집돌이 아빠를 모두 닮은 파워 집순이 7살 큰 딸을 데리고 나가야 한다는 거다. 미끼가 필요하다. 다행히 요즘엔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무인 문구점에 가자고 하면 곧잘 따라나선다. 주인 없는 가게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마음껏 구경하고 직접 바코드를 찍어 결제까지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문구점까지 가는 길은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나도 만족스럽다.
나무마다 싱그러운 새잎이 돋았다. 꽃이 핀 나무도 있고 꽃을 피우려고 준비하는 나무도 있다. 따사로운 공기와 선선한 바람 모든 게 완벽했다. 아이들은 깔깔 대며 달리기 시합을 하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지나가는 어르신들이 아이들을 보며 "아유~ 예뻐라! 너희가 웃는 걸 보니 진짜 봄이다 봄!" 하셨다. 고마운 말씀을 해주신 어르신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며 나도 아이의 웃음소리에서 봄을 찾을 수 있는 사람으로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구점에 가까워질수록 아이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3평 남짓한 작은 문구점에는 선반마다 아이들이 좋아할 물건들이 종류별로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시크릿 쥬쥬 장난감을 만지작 거리다가 포켓몬스터 카드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말랑이를 눌러보기도 했다. 그러다 첫째가 내 손을 잡아끌고 구석으로 데리고 가더니 귓속말을 했다.
"엄마, 나 똥 마려. 얼른 고르고 집에 가고 싶어."
"뭐? 그럼 지금 바로 가야 되는 거 아니야?"
"아니야.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기는 싫어."
"알았어. 빨리 골라."
내 마음이 급해졌다. 주인이 있는 문구점이라면 상가 화장실 비밀번호라도 물어봤을 텐데 무인 문구점이었다. 올 때 20분이 걸렸으니 갈 때도 20분은 걸릴 것이다. 게다가 문구점에 있는 모든 물건을 하나씩 자세히 들여다보며 세 바퀴는 돌고 나서야 원하는 걸 고르는 첫째의 쇼핑 패턴으로는 물건 고르는데만 10분은 걸리고도 남을 일이었다.
남편에게 이 긴급상황을 전했다. 그리고 미션을 줬다.
"애들이 물건 고르는 동안 오빠가 집에 가서 차를 가져오는 게 좋겠어."
"알겠어. 내가 얼른 달려갔다 올게."
남편은 사명감에 찬 얼굴로 문구점을 나섰다. 아이는 엄마 아빠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소보다 더 신중히 물건을 골랐다. 나는 문구점 사장이라도 된 것처럼 아이들이 쳐다보는 물건마다 너무 좋다고 바람을 잡았다.
"우와~ 이거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이걸로 사자!"
"그렇긴 한데.. 조금만 더 볼게."
"그래? 그럼 이건 어때? 이거 진짜 멋있는데~"
"음.. 나는 이게 더 좋은데"
"그래! 그럼 그걸로 하자."
"아니, 다른 것도 좀 보고."
후유. 아무래도 나는 장사 체질은 아닌 것 같았다. 어렵게 티니핑 피규어를 고르고 결제까지 마쳤다. 남편한테 전화를 했더니 숨이 찬 남편은 말도 제대로 못 했다.
"헉.. 헉.. 지금.. 주차장 헉.. 도착.. 해서.. 시동.. 걸었어.. 헉.. 얼른 갈게.. 헉.."
저 멀리서 남편의 차가 보였다.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 이런 걸까. 아이들을 얼른 차에 태웠다. 이제 진짜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시계를 보니 저녁시간이 다 되었다.
'집에 마땅히 먹을 것도 없는데..'
급한 불이 해결되어 가니 다른 걱정이 시작되었다. 나는 머리를 굴려 남편에게 마트로 가자고 했다.
"마트 화장실에서 똥 누면 되니까 마트로 가자! 그래도 되지 아솜아?"
"응? 누가 똥을 싸?"
아솜이는 급똥을 10분 넘게 참은 사람 치고는 너무도 평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너 아까 엄마한테 똥 마렵다고 했잖아."
"내가? 언제?"
남편이 나를 찌릿 노려봤다. 이마에는 아직도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당황한 나는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너, 너가.. 아까 문구점에서 귓속말로 그랬잖아. 똥 마려워서 얼른 고르고 집에 가고 싶다고.."
나는 남편의 눈치를 보며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 아솜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 그거? 똥 마렵다고 한 게 아니라 목마르다고 했는데"
'똥 마려'가 아니라 '목말라'였다고? 목마르다는 얘기를 왜 굳이 귓속말로 했냐고 묻자 부끄러워서 그랬단다. 내 딸이지만 정말 엉뚱하다.
"엄마, 근데 마트 갈 거야? 아싸! 그럼 거기서 음료수 사줘."
나는 어이가 없어 조용히 '목말라.'와 '똥 마려.'를 반복해서 말해 보았다.
"목말라.. 똥 마려.. 목말라.. 똥 마려.."
그리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누르며 남편에게 변명을 했다.
"와, 진짜 발음이 너무 비슷해서 헷갈린다. 그치? 목말라.. 똥 마려.."
"조용히 해."
남편은 그 사이에 3년은 늙어버린 얼굴로 싸늘하게 말했다.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이상하게 통쾌하기도 했다.
"그래도 아솜이 덕분에 오랜만에 운동 제대로 했다. 그치?"
"조용히 하라고 했다."
조용히 하라고 하면 할수록 어쩐지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웃는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뒷통수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 남편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저녁 메뉴는 남편이 좋아하는 걸로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