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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의 무게를 견뎌라

무엇도 포기할 수 없다면

by 김채원

페르소나란 본래 고대 그리스 가면극에서 배우들이 썼다가 벗었다 하는 가면을 말한다. 스위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페르소나를 일종의 가면으로 집단 사회의 행동규 또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정의했다. 우리는 모두 다양한 페르소나를 쓰고 살아간다.


집에서만 해도 나는 엄마이자 딸이자 아내이자 며느리이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고 아이 유치원에 가면 학부모다. 브런치 작가이기도 하고 매일 글쓰기 프로젝트 글루틴을 운영하는 글쓰기 인사이터이기도 하다. 페르소나가 많을수록 수행해야 하는 역할도 많아진다. 그래서 보통 자신의 상황이나 능력에 맞게 페르소나를 늘리거나 줄이면서 조절한다.


나도 위에 나열한 내 페르소나들이 지금 내가 갖기에 딱 적당한 수준이라고 생각해서 몇 년째 유지 중이다. 아침에 눈을 떠 집을 나설 때까지 아내, 엄마의 페르소나를 쓰고 출근하는 차 안에서 잠시 모든 페르소나를 벗는다.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릴 때 선생님이라는 페르소나를 챙겨 쓴다. 퇴근 시간까지 선생님이라는 페르소나를 잘 쓰고 있다가 퇴근하는 차 안에서 잠시 벗는다. 아이를 하원 시키러 가면서 학부모라는 페르소나와 엄마라는 페르소나를 함께 썼다가 유치원을 나오면서 학부모 페르소나를 얼른 벗는다. 집에 오면 다시 아내라는 페르소나를 엄마 페르소나 위에 덮어쓴다. 저녁을 준비하고 집안일을 하면서 페르소나를 바꿔 쓸 틈을 노린다. 아이들 둘이 잘 놀고 있는 것 같으면 잠시 엄마 페르소나를 벗고 글루틴 운영자 페르소나를 쓴다. 매일 함께 쓰면서 다른 분들의 글을 읽고 격려와 응원을 보내는 게 내 일이다.


페르소나들의 무게는 매일 다르다. 아이가 아프면 엄마 페르소나가 무거워지고 학교 일이 바쁘면 선생님 페르소나가 무거워진다. 그런데 오늘은 여러 페르소나들이 동시에 무거워져서 나를 힘들게 했다. 학교에서는 1교시부터 6교시까지 1시간도 쉴 시간 없이 수업이 가득 차 있었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회의가 있었다. 내일 있을 교직자 배구대회를 위한 준비도 필요했고, 퇴근 후에는 남편 지인 가족과 약속도 있었다. 펜션을 잡고 1박 2일을 보내는 약속인데, 남편의 지인과 나는 초면이다. 초면에 "실례지만 제가 글을 좀 쓰겠습니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오늘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글을 쓸 틈이 없었다. 큰일이었다.


글루틴을 함께 운영하는 알레 작가님께 나의 상황을 알리며 징징댔다. 알레 작가님은 힘들면 하루쯤 안 써도 된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글을 안 쓴다고 세상이 망하는 것도 아니니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더니, 이번 주에 글루틴 멤버들 중 누구도 구멍을 낸 적이 없는데 딱 한자리가 비겠다며, 그 빈자리가 주말 내내 알레 작가님의 마음에 구멍이 되어 찬바람이 솔솔 드나들겠지만 괜찮다고 했다. 런 지독한 양반. 알레 작가님은 나를 컨트롤하는데 최적화된 분이다.


원래 계획은 내일 일정 때문에 남편과 내가 차를 따로 가지고 약속 장소에 가기로 했었다. 그런데 글 쓸 시간 확보를 위해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함께 타고 가며 차 안에서 글을 쓴다.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 이런 스케줄에도 글을 써내는 내가 자랑스럽다.


한 번씩 주위 사람들이 나를 걱정하는 말을 한다. 내 눈이 빨갛다며 일을 조금 줄이고 잠을 조금 더 자는 게 어떻겠냐고 한다. 엄마가 그렇게 자꾸 일을 벌이면 애들은 누가 보냐는 오지랖 넓은 말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가진 모든 페르소나를 사랑한다. 그 모든 게 모여서 나라는 사람을 만드는 거니 무엇도 포기하기 싫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 페르소나의 무게를 견디는 것뿐. 할 수 있다는 믿음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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